[2019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친구들이 들려준 영화 이야기

올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는 모두 여덟 명의 친구들이 참여해 주었다. 친구들은 자신이 추천한 영화를 함께 본 뒤 관객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이 들려준 영화와 극장 이야기들을 일부 옮겨보았다.

 

◆2월 17일(일), <더 체인질링> 상영 후 이경미 감독, 이해영 감독 시네토크

이경미(감독) 공교롭게도 이해영 감독은 이번에 <더 헌팅>(1963)을 추천했다. <더 체인질링>(1980)도 그렇고 소위 ‘귀신 들린 집’ 영화다. <더 헌팅>이 60년대 유령 영화의 대표적 작품이고 그 뒤 다시 이 장르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대표적 작품이 <더 체인질링>이다. 이 작품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둬 다른 영화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컨저링>(2013) 같은 영화도 이 계보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해영(감독) <더 헌팅>과 <더 체인질링> 그리고 지금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힐 하우스의 유령>(2018)까지 쭉 연달아 보면 ‘귀신 들린 집’ 장르가 할리우드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경미 감독이 장담한 것만큼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지만(웃음), 굉장히 재미있게 봤다. 흥행에 성공했던 사실은 몰랐다.

이경미 독립영화 규모로 제작을 했는데 흥행에 성공을 했다. 그런데 비평적으로는 비판도 좀 받았다. 실망한 사람들은 특히 영화 후반에 이르면 장르가 바뀐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하더라.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보았고, 그래서 장르에 대한 배신감을 특별히 느끼지 않았다. 

요즘 귀신이 등장하는 각본을 쓰는 중이라 더 와닿았던 부분도 있었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등장인물의 기분을 계속 상상하며 써야 한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기분이 어떨지 상상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죽은 사람의 기분과 생각은 상상 밖의 일이지 않나. 오늘 <더 체인질링>에서 죽은 아이가 성질을 그렇게 많이 내는 걸 보면서(웃음), 그 지점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나는 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죽고 난 이후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존재는 어떤 논리적인 합의가 안 되는 존재, 감정만 강하게 남아있는 상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해영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링>(나카다 히데오, 1998) 생각도 많이 났고, 한편으로는 오컬트 공포물이라기보다는 추리물이라는 느낌이 훨씬 강하게 들기도 했다. <더 헌팅>이나 <힐 하우스의 유령>은 오컬트적 정서를 살리기 위해 장르적 세공을 정말 열심히 하는데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서는 조금 투박한 편이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추리물적인 재미를 살리는 게 대중적인 장르적 접근 같기도 하다. 

이경미 70년대부터 여러 장르의 호러영화가 굉장히 붐을 이뤘다. <엑소시스트>(1973), <오멘>(1976)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렇게 초자연적 소재의 오컬트가 많이 나오다 보니 오히려 <더 체인질링>이 차별점을 보여주었다는 생각도 든다. 호러영화 팬으로서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관객들이 조금 부럽다. 당시에는 오컬트에 슬래셔 장르, 좀비까지 정말 여러 장르가 계속 등장했다. <나이트메어>, <13일의 금요일>, <할로윈>, <살아있는 시체들> 시리즈 등등. 

이해영 <더 체인질링> 이후에 <폴터가이스트>(1982)가 나왔다. 역사적으로 따진다면 이전의 호러영화들이 정서나 분위기가 주도하는 공포를 만들었는데  <폴터가이스트> 같은 작품들은 귀신 들린 집을 소재로 취하면서도 훨씬 투박한 장르적 요소들을 노골적으로 전면에 배치한다. 그 후 80년대로 넘어가면 ‘팝콘 무비’ 계열의 호러영화들이 등장한다. 사실 으스스한 분위기의 호러영화는 팝콘 무비로 즐기기는 힘들다. <13일의 금요일>(1980) 같은 영화는 맥주 마시면서 왁자지껄 떠들며 보기 좋은 대표적인 영화다. <더 체인질링>은 이런 호러영화의 변화 가운데 놓인, 가교 역할을 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장르의 역사를 읽을 때도 중요한 징검다리로 한번 짚어야 할 작품 같다.

이경미 귀신 들린 집 소재가 왜 이렇게 늘 흥미롭고 무서울까 생각을 해봤다. 공포는 내가 가장 안전해야 하는 곳이 사라졌을 때 느끼는 것 같다.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사실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 상황이 공포스럽듯이 말이다. 집은 내가 가장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마지막 보루 같은 곳인데, 그곳이 무너질 때의 공포는 정말 클 것 같다. 그래서 집에 귀신이 들린다거나,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죽어서 나를 괴롭히는 상황, 즉 내가 가장 지키고 싶었던 어떤 최후의 대상이 사라지고 무너질 때 공포를 느낀다고 생각했다.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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