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역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프랑스영화는 그들이 ‘68의 적자라고 말해왔다. 올해 베니스영화제에도 ’68에 관한 또 한 편의 프랑스영화가 등장했다. 올리비에 아싸야스의 <5월 이후>가 그것이다. 영화평론가 닉 제임스는 이 영화가 혁명의 ‘행동주의와 쾌락주의’를 대비하는 방식에서 필립 가렐의 <평범한 연인들>과 비교했다. ‘68을 해석하고 기억하려는 프랑스영화의 노력은 전쟁에 가깝다. 하지만 2005년에 <평범한 연인들>을 발표할 당시의 가렐은 다르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1968년을 역사의 지도로부터 지우려는 경향이 프랑스에서도 엄연하다고 보았다. 그는 영화란 소중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68년에 대한 날것의 기록을 <평범한 연인들>에 남겼다. 그런 점에서, 여주인공 릴리가 옆의 남자에게 “<혁명전야>(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964)를 봤냐?”고 묻는 장면에 대한 내 생각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바뀌었다. 릴리는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라는 이름을 말한다. 이전에는 가렐이 <몽상가들>에서 느낀 배신감을 그렇게 표현한다고 여겼다. 지금은 다르다. 가렐은 기억하는 것, 그리고 어떤 태도를 지니는 것으로 충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가렐은 베르톨루치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평범한 연인들>을 제작했다. <몽상가들>의 엑스트라와 의상을 공유한 것이 한 예다.

 

<평범한 연인들>은 68의 영웅적 행적과 그 여파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한 시간에 걸쳐 화염병과 바리케이드의 밤이 카메라의 덤덤한 시선에 잡힌다. 밤을 새운 젊은이가 어머니에게 돌아와 “우리는 끝났어. 노동자 계급이 포기하려 해. 노조는 부르주아보다 혁명을 더 두려워하거든. 그들은 돈을 더 받기만을 원해.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혁명에 헌신하는 젊은이는 이내 스크린 바깥으로 사라진다. 진짜 영화는 화염병의 밤이 지난 후에 시작하며, 이어지는 두 시간 동안 영화는 화염병과 총성에서 가능한 한 멀리 벗어난다. 일군의 젊은이들이 그룹 ‘더 킹크스’의 <디스 타임 투마로우>에 맞춰 춤을 춘다. 레이스와 벨벳 복장의 댄디한 모습을 한 그들은 기실 혁명의 패잔병들이다. ‘진짜 예술가는 익명의 존재로 남는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다. 그래서 그들은 외로운 존재들이다. 영화는 남은 2시간 동안, 도피자의 신세로 하나씩 모여든 청년들이 어떻게 해서 환멸의 시간으로 빠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그림을 그리고 누구는 직업을 구하고 누구는 결혼하고 누구는 미치고 누구는 떠난다. 그들은 대마초와 쾌락과 사랑과 일상을 탐닉한다. 마침내 그들조차 하나씩 흩어진 뒤 홀로 남은 주인공의 예고된 죽음 앞에 나지막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김수영은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절망한 자의 상처만큼 복수를 되새김질하기에 좋은 무기도 없다. <평범한 연인들>은 혁명의 실패와 함께 사라진 동지에게 바치는 쓸쓸한 조사이자 현실의 젊은이를 위해 준비한, 멈추지 않는 혁명의 목소리다. 인터뷰에서 가렐은 ‘66년에 만났던 영화적 동지 장 으스타슈를 기억하며 <평범한 연인들>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전작 <야성적 순수>를 으스타슈에게 바쳤던 가렐은,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를 따라 1.33:1 화면비율의 흑백영상으로 <평범한 연인들>을 연출했다. 1973년에 <엄마와 창녀>라는 시와 여자편을 얻었던 68혁명은 다시 30년 뒤에 소설과 남자편인 <평범한 연인들>을 구했으니, 결코 비범하지 않은 ‘평범한 연인’은 그렇게 짝을 찾게 된다. 1980년 서울의 봄과 1987년 6월 항쟁 사이에 20대를 보내면서, 나는 친구들이 하나씩 평범한 가족과 일상의 굴레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보았다. <평범한 연인들>에서 릴리가 프랑수아에게 묻던 질문 - “우리는 지금 뭘 하려는 거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 을, 나는 더 이상 내게 묻지 않는다. 나는 궁금하다. 인간이 꿈을 잃고 지쳐 쓰려져 굴복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의 권력일까 아니면 현실의 폭력일까. 사랑이 그러하듯 시간도 우리를 구원하고 감싼 끝에 저버린다.

 

글 / 이용철(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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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리베트 <미치광이 같은 사랑> 상영 후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 시네토크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번에 ‘친밀한 삶’이라는 제목의 특별전을 하면서 소개하는 몇 편의 영화들이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오늘 보신 리베트의 영화는 몬테 헬만의 <자유의 이차선>이나 필립 가렐의 영화, 찰스 버넷의 영화와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모두 삶의 내밀함을 영화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라신의 연극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들을 제외하면, 사실 관객에게 명료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자크 리베트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일주일 후에나 열흘 후에 혹은 몇 주, 몇 년 후에 현실적인 삶과 연결되었을 때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말했는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지금 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감상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야기하려 한다. 

 <미치광이 같은 사랑>은 68년 가을에 제작을 시작해서 69년에 소개된 된 작품이다. 68년은 리베트를 비롯한 많은 감독들은 랑글루아 사태 때문에 뛰어다니던 시기이자 칸 영화제에서 저지 투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이 영화는 사십대 누벨바그라고 부를 법한 영화다. 1928년생인 리베트가 마흔을 넘기고 만든 영화로, 가렐의 <더 이상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없어>도 그런 사십대를 넘긴 남자의 사랑이야기였다. ‘누벨바그’라고 했을 때 젊은이들의 패기 넘치는 사랑이야기나 끓어오름의 느낌들이 있을 텐데, 이 영화들은 그런 것보다는 숙성된 사랑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숙성되다 못해 파산에 이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치광이 같은 사랑>에는 세바스티앙이 연출하는 연극이 진행되는 것과 동시에 세바스티앙과 클레르라는 남녀의 현실에서의 삶의 문제가 동시에 진행되는데, 이 둘의 관계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연결되는 지점을 갖고 있다. 이 영화는 완성된 듯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출발점과 끝 지점을 장식하는 것은 라신의 연극인데 마찬가지로 우리는 라신의 연극이 완성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백색의 공간만을 볼 수 있다. 이 백색공간은 사각의 링 같기도 하고 흰 도화지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것을 영화라고 생각했을 때는 백색 스크린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백색 스크린의 평면 안에 무언가를 넣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목적만으로 보자면 흰 스크린에 무엇인가를 넣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고, 최종적인 결과물은 결국 보여주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작품이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 영화에서의 결과를 중요하게 본다. 한 부류는 제작자나 투자자이고 마찬가지로 관객으로서 우리도 영화의 결과를 보는 사람들이다. 관객은 결과로서의 영화를 보는 것이지 개인적인 친분이 있지 않는 이상, 과정으로서의 영화를 보러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과정의 시간과 리듬을 담아냈다는 점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완성에 대한 강박이 없는 영화로 보인다. 이것은 몬테 헬만이나 필립 가렐, 찰스 버넷의 <양 도살자>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몬테 헬만은 자크 리베트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 한 바 있고 <자유의 이차선>을 만들 때에는 리베트처럼 영화를 구성해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화들은 모두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면서 실패를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영화를 만드는 행위로 인해서 몬테 헬만은 스튜디오에서 추방당했지만, 리베트는 반대로 자신의 영화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의 리베트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제대로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트뤼포의 전기를 보면 당대의 최고 시네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뤼포나 고다르 같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알려지는 것에 비하자면 리베트는 자신을 알리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크 리베트가 <미치광이 같은 사랑> 같은 영화에 도달해가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1965년 무렵에 리베트는 ‘우리시대의 영화감독’이라는 TV다큐멘터리로 장 르누아르에 관한 다큐를 찍게 된다. 그 과정에서의 르누아르와 나눈 영화작업과 이야기들이 리베트의 영화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리베트는 배우와의 관계나 집단적으로 작업하는 과정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됐고, 감화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가장 르누아르적인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만든 게 이 영화다. 


다른 한 가지는 리베트가 <수녀들>이라는 영화작업을 하면서 연출방식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수녀들>은 처음에는 연극으로 공연된 뒤에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작업에서 그는 굉장한 지루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출방식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연출방식을 바꾸겠다는 것은 감독이 무언인가를 컨트롤하거나 크게 디렉션하지 않고 직접적인 개입을 자제하는 것이다. 


<미치광이 같은 사랑>을 보면 세바스티앙이 연극을 연출할 때 그런 방식으로 한다. 책 자체를 통독하면서 배우들이 직접 연극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을 취하는데, 리베트가 이 영화를 찍을 때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공동적인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라신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리허설 과정을 찍는 것과, 클레르가 연기를 중단하고 크리스티앙과의 관계가 파국적으로 끝나가는 기본적인 구성만을 해놓고, 영화의 매 순간마다 쪽대본을 만들어 즉흥적으로 구성했다. 시대적으로 1968년경에는 프랑스 영화에서 누벨바그 작가들이 개인성을 내세우는 것에서 후퇴하는 시대적 흐름이 있었다.  고다르는 작가의 개인성을  내세우는 것이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보고,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지가 베르토프 집단이라는 공동작업 형태로 전환시했다. 리베트의 새로운 연출방식은 시대적으로도 조응하는 것이었다. 작가의 개인성의 후퇴라는 것을 통해서 영화에 들어갈 때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배우’의 존재성이다. 이 영화가 4시간 가량을 지속하면서 보여주는 것은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두 명의 배우들이 보이는 특별한 퍼포먼스들이다. 특히 뷜 오지에라는 여배우가 보여주는 히스테릭하거나 다변적인 심리적 상태를 보여주는 연기는 정말 놀랍다.  

 

이 영화에는 두 층위의 연기가 있다. 하나는 라신의 연극을 위해 맡은 배역을 소화해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스티앙과 클레르 역할을 두 배우의 퍼포먼스만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전자에는 캐릭터가 정해져 있다. 여기서는 라신의 희곡에 있는 배역들을 배우들이 자신의 몸과 발성을 통해서 재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배우의 물리적인 현존 안에서 그들의 소소한 퍼포먼스가 스스로 캐릭터를 구축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개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 안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전자의 경우보다 훨씬 시공간적 감각이 흐트러져 있다.


 이 영화에는 몇 개의 시간성이 있다. 운명적으로 주어진 시간이 있고(그것은 연극과 삶에서의 예정된 파국이다), 두 번째로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표현되는 달력화된 시간성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런 시간을 무화시키는 형태, 시공간을 무화하는 형태가 있다. 전체적인 시간과 공간이 흐트러진 형태의 느낌이 있는데,  이는 즉흥적인 배우의 퍼포먼스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시간성이라 할 수 있다. 완성에 대한 강박성이 없다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가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자 자유가 증가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영화는 파국을 향해 가지만 사실은 이 속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있다. 영화는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긴 하지만, 그 안에서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담아낸다. 다양한 시도와 가능성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흥미로움이 있다. 이렇게 실패와 불완전한 시도를 담아내려는 시도가 리베트의 영화를 길게 만들었다. 허용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가 담기기 위해서는 252분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성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 영화 이후에 리베트는 <셀린느와 줄리 보트를 타러가다>를 만들었고, 12시간이 넘는 <아웃 원>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아웃 원>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몇년 전에 상영했는데, 꼬박 이틀 동안 상영했다. 전 세계에서 이 영화를 상영한 나라는 많지 않다. 마찬가지로 <미치광이 같은 사랑>을 스크린에서 본 관객들도 많지 않다. 

 


리베트는 연극적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연극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영화와 대비시키면서 영화에서의 연극성을 끌어온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연극과 TV다큐멘터리, 영화가 함께 등장한다. 영화를 전체적으로 보면 연극 리허설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 리허설을 찍고있는 텔레비전 카메라와 그것 마저도 포함해서 촬영한 16mm 카메라가 있다.  그리고 둘의 삶을 담아낸 것은 35mm 카메라이다.  서로 다른 카메라가 연극과 삶의 픽션을 찍는 방식은 TV와 연극 그리고 영화가 크로스 되는 리베트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연극을 재현해가는 것이 아니라 라신의 희곡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 안에서 탐구를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카메라로 크로스 되는 방식은 현실의 사랑 속에서 라신의 비극을 되돌아보거나, 라신 연극이 현실의 사랑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이 되는  거울관계를 형성한다. 연극과 영화가 마주하면서 서로를 지켜보거나 비집고 들어가거나 날카롭게 잘라간다. 이런 거울의 상태는 서로 붕괴하는 지점에 도달한다. 연극과 연인의 사랑은 결국 깨져나가게 된다. 파국에서 제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고다르도 거의 동일한 시기에 <즐거운 지식>에서는 ‘영화의 제로로의 회귀'를 <중국여인>에서는 '영화의 연극영년'을 이야기했는데, 리베트 역시 이 영화로 자신의 영화적 영도성으로 돌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연극은 완성되지 못했고,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지만, 그래서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만, 리베트의 세계에서는 이 영화가 새로운 지점으로 출발점이다.

 

정리: 김고운(관객에디터) |사진: 주원탁(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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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가렐에 대한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 강연 지상중계

 

지난 3월 29일, 필립 가렐의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1991) 상영 후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의 시네토크가 열렸다.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 외에도 필립 가렐의 다른 영화들에 대한 설명, 그리고 가렐과 고다르와의 관련성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현장의 일부를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필립 가렐은 1948년생이고, 프랑스에서 포스트 누벨바그 세대의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장 으슈타슈, 필립 가렐 등이 이 세대에 해당한다. 가렐은 60년대 중후반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난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가렐의 <내부의 상처>(1972)를 사영했는데, 랑글루아가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었다고 전해진다. 가렐은 랑글루아의 총애를 받았던 시네마테크의 아이였다. 가렐의 영화는 남녀의 연애를 다룬다는 점에서 로메르의 유사해보이지만, 영화의 형식에서 보자면 고다르와의 연관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가렐의 영화를 굵직하게 나눠서 보면, 60년대부터 79년까지의 작업들을 초기로 분류할 수 있다. <내부의 상처>에서 처럼 실험적인 경향이 강하다. 이때 같이 작업한 사람이 니코라는 독일 출신의 가수다. 가렐은 79년까지 같이 작업에 참여했던 니코에 대한 기억을 다룬 영화를 이후에 만들었는데, 그 첫번째 영화가 <비밀의 아이>(1982)라는 작품이고, <야성적 순수>(2001)같은 작품들이 있다. 오늘 보신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1991)까지 포함하자면, 세 편의 영화가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세 편의 영화중 니코의 기억을 가장 추상적인, 보편적인 차원에서 다룬 영화가 이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는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비로소 마리안느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마리안느의 죽음이 니코의 죽음과 연결된다. 사망의 경위가 동일하다. 그 전까지는 마리안느라는 여자가 니코와 관련성을 갖고 있는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영화의 마지막에 '니코에게 바친다'는 자막에서 둘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다. 제라르는 영화감독이 아니기 때문에 그를 가렐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또한 마리안느도 가수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는 그런 점에서 가렐과 니코의 관계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와 비교하면 <비밀의 아이>와 <야성적 순수>는 정확하게 영화감독과 배우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1979년 이후부터의 가렐의 영화는 좀더 내러티브가 뚜렷한 편인데, 주로 그의 내밀한 삶의 이야기들, 혹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로 커플들, 연인들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랑의 추구, 이별, 어려움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가렐의 영화를 지탱하고 있다. 가렐의 영화에는 반복적인 테마가 있다. <야성적 순수>가 개봉했을 때 일각에서는 '이번에도 똑같은 얘기'라고 좀 싫어하는 반응도 많았던 것 같다. 자기 얘기를 계속 영화로 만드는 것을 안 좋게 보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오늘 보신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내 나이 때의 사랑이야기라는 점에서 호감이 가는 구석도 있다. 이 영화를 만들 때 가렐은 40대 중반을 넘겼던 나이였고, 영화 속 주인공도 다 그 무렵의 나이대로 그려진다. 니코와의 추억을 제거하고 보면,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는 40대 남자들의 시니컬한 사랑이야기이다. 중간에 영화에서 나온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마지막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 더 이상 아무도 사랑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시대에 마지막으로 사랑을 얘기하는 이야기다. <평범한 연인들>(2005)에서도 가렐은 그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말을 이미 91년도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가렐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조건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네 명의 커플, 그리고 다른 이들까지 합하자면 대략 여섯 명의 인물만이 나오고, 롱샷이 많지 않다. 거의 인물 중심으로 촬영이 되었는데 공간적으로도 변화가 많은 건 아니다. 80년대 초반 영화들은 더 심하다. <비밀의 아이>에서는 물리적 제약이 영화의 주제와 연관된다. 영화를 만드는 취약함들, 가령 낡은 필름, 노화된 카메라, 녹음 장비의 열악함 때문에 스크린에 인물의 형상이 뚜렷하게 담겨지지 못한다. 그런 제약성과 불가능성에서 연인들의 이별, 인물의 사라짐, 떠남, 사랑의 실패가 영화의 테마와 연결된다. 자신이 잊혀지고 희미해지는 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마련된다.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는 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화는 꽤나 심플하다.

몇 가지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드릴까 한다. 이 영화의 초반부 시퀀스에서 화가와 여자가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다. 왜 자신을 그리지 않냐고 따지는 여자에게 화가는 ‘너는 너무 리얼해서 그리기 힘들다’고 말한다. 이들의 대사는 남녀의 사랑의 관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동시에 가렐 자신이 겪었던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모호성을 또한 이 대화에서 반추할 수 있다. 니코와 자신의 과거를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너무 리얼한 것이어서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건 개인의 이야기가 다른 일들보다 더 리얼해서가 아니라 화가의 말을 빌자면 너무 근접해있기 때문이다. 삶을 근거로 픽션을 만들어갈 때, 현실에 너무 밀착된 삶을 영화로 만들어갈 때 예술가가 겪는 혼란, 모호함을 반추하게 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두 남자는 계단에서 내려가면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주인공 남자가 화가에게 ‘넌 너무 학구적이다. 너는 책에 있는 얘기만 인용한다. 삶은 그것과 다르다’고 말한다. 화가는 ‘사랑은 책에서 시작하는 거고, 책이 사라지게 되면 사랑도 끝나버린다. 아마도 우리는 사랑에 관해 얘기하는 마지막 세대일거다’라고 대답한다. 이 시퀀스는 낭만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동시에 누군가의 그림을 그려 나갈 때 겪게 되는 곤란함을 보여준다. 이건 1979년 이래로 가렐의 최신작에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작가와 모델, 영화감과 배우, 예술가와 모델, 이들의 필연적인 관계가 겪는 문제점이 두 남자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가렐의 영화가 고다르의 영화와 비슷한 것도 이런 점들에서다.

이 영화는 시간, 공간의 연결성이 믿지 못할 정도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어떠한 시간적 추이나 변화가 있는지가 짐작이 안 된다. 가렐의 영화에는 그런 순간들이 굉장히 많다. <야성적 순수>에서 감독과 배우가 사랑에 빠지는 영화의 초반부 장면에서도 시간적 추이와 공간적 변화를 가늠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방식은 현실적 시간과 공간을 현재의 상태에서 미래적으로 연결해간다기보다는, 현재의 시점 안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그런 독특한 시제에서의 연속성으로 볼 필요가 있다. 가령 10년 전의 과거를 지금의 관점에서 연결한다면 그것은 그 당시의 시공간적 연결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에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이 장면을 볼 때에 사건은 현재의 시간에서 미래를 향한 시간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재에서 회상되는 과거의 연속성의 관점에서 구성되어 있다. 그 때문에 실제 시공간의 연결과는 다른 느낌과 감각의 연속성이 여기에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언가 비워진 지대, 블랙홀 같은 공백의 지대들이다. 고다르는 ‘남자가 여자를 천천히 쳐다보는 순간이란 그녀를 사랑할 때가 아니라, 그녀가 나를 떠난다고, 싫어한다고 말하는 순간"이라 말했는데, 이는 진실에 가깝다. 그 때서야 비로서 그녀에게 무슨일이, 그녀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기 위해 그녀의 얼굴에 관심을 보이고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보려 시도한다. 고다르가 안나 카리나와 <비브르 사 비>(1962) 등의 초기작들을 찍고 있을 때 그의 심정이 그러했다. 이 때 고다르는 안나 카리나와 불화관계에 있었다. 고다르의 클로즈업의 표현성이란 그녀가 나로부터 떠나가 있는 상태에서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포착하기 위한 시도처럼 보인다. 폭탄선언을 한 이 사람의 마음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돌아보면서 내가 뭘 했는지를 떠올리는 것과도 같다. 그때 우리가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 인식의 공백지대 같은 것이다. 그 때는 몰랐지만 뒤에 생각해보면 뭔가 결여되고 방치된 그런 시간들이 있는거다. 방치한 시간, 방치시켰던 사람들을 화면으로 포착해 나가는 방식이다.

가렐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그래서 남녀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순간인데, 그 때 여자의 마음은 어쩐지 이미 떠나있는것처럼 보인다. 지금 보시는 장면에서 화면은 두 남녀의 시선의 엇갈림에 의해 구축되어 있다. 여자는 벽에 기대어 있고, 남자는 측면으로 앉아 있다. 나중엔 둘 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이란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가렐의 영화를 보면 이런 순간들이 많다. 거의 대부분 여자가 정중앙에 있고, 남자는 측면에서 위치하거나 여자 주변을 배회한다. 남자가 정면을 쳐다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둘의 시선은 엇갈린다. 이런 식의 화면구성은 여자가 중심을 이루지만, 실제로는 남자가 시선을 두지 않았던 그 때의 시간을 되찾는 화면들이라 할 수 있다. 즉,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로 되돌아갔을 때 방치되거나 의식하지 못했던 시간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배려하지 못한 시간 안에서의 배치가 이런 식의 엇갈림으로 표현된다. 영화 후반부에 가면 두 남자가 대화를 하는데, ‘여자들은 어느 순간 떠나는 것 같지만 사실 떠나기 전에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네가 간파하지 못했을 뿐이다’라는 식의 대사가 나온다. 가렐의 영화는 그런 식으로 방치되거나 배려되지 못한 순간들을 영화로 포착해 나간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삶 안에서 되찾아야 할 지대의 진정한 시간이나 지대인 것이다. 가렐의 영화에서 빛나는 순간들이란 그래서 배려하지 않았던 공백의 지대로, 그런 시간으로 영화를 통해 되돌아가는 것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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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에서 마리안느가 사랑한다는 표현으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눌때, 그 장면의 요점은 여자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남자가 그 말의 의미나 말하는 순간에 관심이 없는, 되돌아보면 그런 순간들의 장면을 찍고 있다는 거다. 이것은 어긋난 시선이다. 어긋나 있는 시선이 여자를 따라 화면에 담아질 땐, 현재의 시간 안에 그걸 보고 있는 혹은 만들고 있는 사람의 시선과 새롭게  만난다. 과거에 방치되거나 배려되지 못했던 사람, 그들의 시선과 얼굴과 새롭게 마주하는 것, 그것이 가렐의 시간이다.

이것은 재현이라기보다는 시간적 중첩들을 화면 안에 담아내는 것이다. 가렐은 삶에 근접한 영화를 만들어 가려한다. 하지만 이건 영화 처음에 나온 것처럼 ‘너무 리얼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갖고 있다. 게다가 영화는 너무 쉽게 삶을 다른 세계로 대치해버린다. 고다르의 <경멸>(1963) 첫 부분에 나오는 바쟁의 말을 빌자면, ‘영화는 현실을 비추는 게 아니라 우리가 욕망하는 것으로 스크린을 대체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삶을 그대로 담아내기에는 힘겹다. 삶과 예술적 작품의 구성은 또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미치광이 삐에로>(1965)에서 안나 키라나가 장 폴 벨몽도에게 ‘왜 삶은 소설처럼 완전하지 않은가?’라고, 삶이 그렇게 불완전한 것이 너무 싫다고 말한다. 삶은 대단히 분산적이고 삶을 전체적으로 묶어주는 통일성의 단위를 찾기가 어렵다. 가렐의 영화는 삶과 영화의 관계가 초래하는 이런 어려움과 직면한다.  그런 가운데 가렐의 영화는 방치된 개인, 배려받지 못한 시간, 인지되지 못한 인식의 공백지대로 얼굴과 시선을 되돌려주려 한다. 이것이 가렐이 개인적 삶에 근거해서 영화를 만들어가는 근본적 입장이고, 삶과 영화라는 걸 근접시켜 나가는 그의 특별함이라 할 수 있다.

 

정리: 송은경 관객에디터 | 사진: 최용혁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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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보관 중인 12편의 작품을 모아 상영하는 매우 특별한 섹션을 마련하였다. 이 영화들이 상영되는 주간에 맞춰 내한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프로그램 디렉터인 장 프랑수아 로제는 이날부터 3일간의 일정으로 시네토크 및 시네마테크 관련 포럼에 참여하게 된다. 그 첫 번째 순서로 필립 가렐의 <내부의 상처>와 장-마리 스트라우브, 다니엘 위예의 <로트링겐!> 상영 전에 짧은 영화 소개가 있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번에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시네마테크의 역사 안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 영화를 소개하는 특별전 행사를 열게 됐다. 동시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프로그램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장 프랑수아 로제 씨를 초대하여 오늘부터 내일 모레까지 이어지는 시네토크 자리를 준비했다. 특히 일요일은 시네마테크와 관련된 포럼이 열릴 예정이다. 오늘은 영화 상영 전에 간단한 영화 소개만 해 드릴 것이다.

장 프랑수아 로제(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프로그램 디렉터): 오늘 관람하실 작품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드리겠다. 오늘 보실 작품은 두 작품인데, 하나는 필립 가렐의 <내부의 상처>이고 연이어 보실 작품은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로트링겐!>이다. 이 감독들은 영화적 모더니티의 매우 급진적인 방식을 대표하는 감독들이라 할 수 있다. 필립 가렐은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디렉터인 앙리 랑글루아에 의해 소개되었다. 랑글루아는 30년대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설립하고 77년에 죽을 때까지 시네마테크를 지킨 사람이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수많은 프랑스 시네필들이 무성영화의 클래식들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60년대와 70년대에 앙리 랑글루아는 때때로 관객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관객들에게 F.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와 같은 독일 표현주의 무성영화의 걸작을 보여주겠다고 관객을 불러 모은 후, 사실은 그 영화가 아니지만 그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상영한 것이 필립 가렐의 영화들이었다. 이는 필립 가렐의 영화가 아주 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필립 가렐 감독의 작품은 극장 개봉이 되지 않았었고, 오로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아주 소수의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필립 가렐의 영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드리긴 어렵지만, 필립 가렐의 영화에서 얼굴은 풍경이고 또 풍경은 얼굴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오늘 상영할 프린트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90년대에 직접 프린트를 한 것이다. 당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디렉터였던 도미니크 파이니의 주도로 필립 가렐의 모든 영화들을 복원하고 프린트로 만들었다.

<로트링겐!>에 대해 몇 마디 첨언하자면,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는 아주 급진적인 영화감독들이었다. 그들의 특징은 음악적 표현으로서 영화와 문학을 충돌시키는 점에 있었다. 언제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로트링겐!>은 프랑스 작가인 모리스 바레스의 작품을 토대로 했다. 이 소설의 제목은 <콜레트 보도슈>이다. 1870년대 있었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넘겨주었던 로트링겐 지방에 대한 소설로서, 가끔 전쟁 중에 우리들의 나라를 잃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을 낭독하는 사운드와 함께 과거에 그 일이 일어났던 실제 장소의 현재 모습을 찍은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세계화에 반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영본 역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1995년에 직접 프린트한 버전이다.

김성욱: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공개되면서 사람들이 무르나우를 처음 발견했던 것처럼, 가렐의 영화는 시네마테크의 아들처럼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에서 소개가 됐었다. <로트링겐!>은 감독의 요청에 의해 자막이 없이 상영된다. 왜 그런 요청을 했을지 영화를 보면서 느껴보시길 바란다.

(정리 : 박영석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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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비워진 새하얀 풍경, 시간과 공간을 추측할 수 없는 신화적 혹은 시원적인 느낌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곳을 돌아다니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아이가 있다. 성서의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 같기도 하며, 그보다도 이전의 인류 태초의 인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인간들은 그곳을 무작정 걸어 다니거나 울부짖고 다투거나 무언가 알 수 없는 행위를 한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불과 물이라는 질료, 양과 말 등의 동물들, 그리고 원형의 구도는 영화의 시간성을 자꾸만 태곳적으로 이끌고 간다. 모든 것이 새하얗고 흐릿한 풍경에서 지평선은 무한히 확장되며 하늘과 땅의 경계조차도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호하고 추상적인 영화 <내부의 상처 La cicatrice intérieure>(1972)는 필립 가렐이 니코와 결혼한 후 만든 첫 작품이다. 영화음악을 담당한 니코의 주술적인 음악은 이 영화의 제의적인 느낌을 효과적으로 강조한다.


가렐은 과다노출로 촬영하여 빛으로 가득 찬 새하얀 화면, 그리고 과소노출의 어두운 화면과 암전이라는 두 양극점을 조화롭게 활용하는 감독이다. 빛의 깜빡임과도 같은 밝음과 어둠, 백과 흑의 교차가 있다. 백색의 빛은 영화의 공간성을 무화시키며 암전은 영겁의 시간을 함축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일종의 초월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영화적 시공간을 창출해낸다. 질 들뢰즈는 가렐의 이러한 미학을 각각 '흰 스크린'과 '검은 스크린'이라 불렀다. 이 공간에 놓여진 인간의 신체는 매우 물질적 존재성을 갖는다. 즉 <내부의 상처>에서 등장하는 인간들은 일반적 영화의 캐릭터적인 특징을 지니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신체 그 자체로 스크린에서 존재한다. 그런데 그 스크린 속의 신체는 연기자의 신체 그 자체가 현전하는 것이 아니다. 가렐의 영화에서 흰 스크린과 검은 스크린의 극단적 활용은 신체의 부재를 낳는다. 일종의 사라짐이자 비워짐이다. 영화는 거기에서 출발하여 흰색, 검은색, 회색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시원적 신체를 발생시키고 구성해낸다. 따라서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아이는 그냥 '어떤 인간'의 신체인 것이다.




인물의 이동과 카메라 움직임 또한 공간과 신체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가령 울부짖는 여자를 내버려둔 채 원형을 그리며 무작정 걸어가는 남자가 있다. 카메라는 그를 360도의 트래킹 숏으로 포착하는데, 카메라와 남자간의 거리와 시점이 고정됨으로 인해 그가 단순히 측면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발걸음이 울부짖는 여자를 다시 지나감으로써 비로소 그것이 원형을 그리는 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매 순간 카메라는 신체에 밀착되어 있고, 이러한 신체와의 밀착성에 의해 공간이 구성된다.


이처럼 이 영화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신체들과 공간들의 관계를 사유한다.
흰 스크린과 검은 스크린의 활용을 통해 무화된 텅 빈 공간에서 몇 명의 인간들만이 등장하는 극도로 미니멀한 세계. 가렐의 미니멀리즘은 저예산 영화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안임과 동시에, 빛의 조절을 통해 이뤄내는 순수한 예술성이 돋보이는 지극히 영화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내부의 상처>에서 이러한 가렐의 미학은 시원적인 시공간을 창출하고 여기에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영화를 거의 숭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다. (박영석: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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