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보관 중인 12편의 작품을 모아 상영하는 매우 특별한 섹션을 마련하였다. 이 영화들이 상영되는 주간에 맞춰 내한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프로그램 디렉터인 장 프랑수아 로제는 이날부터 3일간의 일정으로 시네토크 및 시네마테크 관련 포럼에 참여하게 된다. 그 첫 번째 순서로 필립 가렐의 <내부의 상처>와 장-마리 스트라우브, 다니엘 위예의 <로트링겐!> 상영 전에 짧은 영화 소개가 있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번에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시네마테크의 역사 안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 영화를 소개하는 특별전 행사를 열게 됐다. 동시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프로그램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장 프랑수아 로제 씨를 초대하여 오늘부터 내일 모레까지 이어지는 시네토크 자리를 준비했다. 특히 일요일은 시네마테크와 관련된 포럼이 열릴 예정이다. 오늘은 영화 상영 전에 간단한 영화 소개만 해 드릴 것이다.

장 프랑수아 로제(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프로그램 디렉터): 오늘 관람하실 작품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드리겠다. 오늘 보실 작품은 두 작품인데, 하나는 필립 가렐의 <내부의 상처>이고 연이어 보실 작품은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로트링겐!>이다. 이 감독들은 영화적 모더니티의 매우 급진적인 방식을 대표하는 감독들이라 할 수 있다. 필립 가렐은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디렉터인 앙리 랑글루아에 의해 소개되었다. 랑글루아는 30년대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설립하고 77년에 죽을 때까지 시네마테크를 지킨 사람이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수많은 프랑스 시네필들이 무성영화의 클래식들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60년대와 70년대에 앙리 랑글루아는 때때로 관객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관객들에게 F.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와 같은 독일 표현주의 무성영화의 걸작을 보여주겠다고 관객을 불러 모은 후, 사실은 그 영화가 아니지만 그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상영한 것이 필립 가렐의 영화들이었다. 이는 필립 가렐의 영화가 아주 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필립 가렐 감독의 작품은 극장 개봉이 되지 않았었고, 오로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아주 소수의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필립 가렐의 영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드리긴 어렵지만, 필립 가렐의 영화에서 얼굴은 풍경이고 또 풍경은 얼굴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오늘 상영할 프린트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90년대에 직접 프린트를 한 것이다. 당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디렉터였던 도미니크 파이니의 주도로 필립 가렐의 모든 영화들을 복원하고 프린트로 만들었다.

<로트링겐!>에 대해 몇 마디 첨언하자면,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는 아주 급진적인 영화감독들이었다. 그들의 특징은 음악적 표현으로서 영화와 문학을 충돌시키는 점에 있었다. 언제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로트링겐!>은 프랑스 작가인 모리스 바레스의 작품을 토대로 했다. 이 소설의 제목은 <콜레트 보도슈>이다. 1870년대 있었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넘겨주었던 로트링겐 지방에 대한 소설로서, 가끔 전쟁 중에 우리들의 나라를 잃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을 낭독하는 사운드와 함께 과거에 그 일이 일어났던 실제 장소의 현재 모습을 찍은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세계화에 반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영본 역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1995년에 직접 프린트한 버전이다.

김성욱: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공개되면서 사람들이 무르나우를 처음 발견했던 것처럼, 가렐의 영화는 시네마테크의 아들처럼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에서 소개가 됐었다. <로트링겐!>은 감독의 요청에 의해 자막이 없이 상영된다. 왜 그런 요청을 했을지 영화를 보면서 느껴보시길 바란다.

(정리 : 박영석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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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비워진 새하얀 풍경, 시간과 공간을 추측할 수 없는 신화적 혹은 시원적인 느낌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곳을 돌아다니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아이가 있다. 성서의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 같기도 하며, 그보다도 이전의 인류 태초의 인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인간들은 그곳을 무작정 걸어 다니거나 울부짖고 다투거나 무언가 알 수 없는 행위를 한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불과 물이라는 질료, 양과 말 등의 동물들, 그리고 원형의 구도는 영화의 시간성을 자꾸만 태곳적으로 이끌고 간다. 모든 것이 새하얗고 흐릿한 풍경에서 지평선은 무한히 확장되며 하늘과 땅의 경계조차도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호하고 추상적인 영화 <내부의 상처 La cicatrice intérieure>(1972)는 필립 가렐이 니코와 결혼한 후 만든 첫 작품이다. 영화음악을 담당한 니코의 주술적인 음악은 이 영화의 제의적인 느낌을 효과적으로 강조한다.


가렐은 과다노출로 촬영하여 빛으로 가득 찬 새하얀 화면, 그리고 과소노출의 어두운 화면과 암전이라는 두 양극점을 조화롭게 활용하는 감독이다. 빛의 깜빡임과도 같은 밝음과 어둠, 백과 흑의 교차가 있다. 백색의 빛은 영화의 공간성을 무화시키며 암전은 영겁의 시간을 함축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일종의 초월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영화적 시공간을 창출해낸다. 질 들뢰즈는 가렐의 이러한 미학을 각각 '흰 스크린'과 '검은 스크린'이라 불렀다. 이 공간에 놓여진 인간의 신체는 매우 물질적 존재성을 갖는다. 즉 <내부의 상처>에서 등장하는 인간들은 일반적 영화의 캐릭터적인 특징을 지니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신체 그 자체로 스크린에서 존재한다. 그런데 그 스크린 속의 신체는 연기자의 신체 그 자체가 현전하는 것이 아니다. 가렐의 영화에서 흰 스크린과 검은 스크린의 극단적 활용은 신체의 부재를 낳는다. 일종의 사라짐이자 비워짐이다. 영화는 거기에서 출발하여 흰색, 검은색, 회색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시원적 신체를 발생시키고 구성해낸다. 따라서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아이는 그냥 '어떤 인간'의 신체인 것이다.




인물의 이동과 카메라 움직임 또한 공간과 신체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가령 울부짖는 여자를 내버려둔 채 원형을 그리며 무작정 걸어가는 남자가 있다. 카메라는 그를 360도의 트래킹 숏으로 포착하는데, 카메라와 남자간의 거리와 시점이 고정됨으로 인해 그가 단순히 측면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발걸음이 울부짖는 여자를 다시 지나감으로써 비로소 그것이 원형을 그리는 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매 순간 카메라는 신체에 밀착되어 있고, 이러한 신체와의 밀착성에 의해 공간이 구성된다.


이처럼 이 영화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신체들과 공간들의 관계를 사유한다.
흰 스크린과 검은 스크린의 활용을 통해 무화된 텅 빈 공간에서 몇 명의 인간들만이 등장하는 극도로 미니멀한 세계. 가렐의 미니멀리즘은 저예산 영화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안임과 동시에, 빛의 조절을 통해 이뤄내는 순수한 예술성이 돋보이는 지극히 영화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내부의 상처>에서 이러한 가렐의 미학은 시원적인 시공간을 창출하고 여기에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영화를 거의 숭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다. (박영석: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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