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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의 가치는 없다 - <올 더 머니>

[동시대 영화 특별전 - 세상과 불화하는 인물들]


부동의 가치는 없다

- <올 더 머니>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올 더 머니>(2017)는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언뜻 교훈극 같기도 하다. 인류사상 최대부호로 알려져 있는 말년의 사업가 J. 폴 게티(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손자 존 폴 게티(찰리 플러머)를 납치한 범죄조직에 몸값을 지불하는 데에는 더없이 인색하게 굴자, 존 폴 게티의 어머니이자 한때 J. 폴 게티의 며느리였으나 지금은 쥐뿔도 가진 게 없는 애비게일 게티(미셸 윌리엄스)가 J. 폴 게티의 재정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온갖 애를 쓴 끝에 존 폴 게티는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J. 폴 게티는 친손자 대신 아기 예수 그림만 끌어안은 채 씁쓸한 최후를 맞고, 애비게일 게티가 미성년인 아들을 대신해 그의 모든 재산을 임시 상속해 관리하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인간애’와 ‘탐욕’이라는 두 가치의 대립 구조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평생 가족 대신 돈을 선택해온 J. 폴 게티가 탐욕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이혼 소송 때도 아들과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모든 금전적 대가를 포기한 바 있으며 아들의 몸값을 협상하는 중에도 수시로 대부호의 사업적 술수에 비소를 감추지 못하는 애비게일 게티는 인간애를 대변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둘 중 승자는 애비게일 게티로 보인다. 그는 도덕적인 면에서만 절대적 우위를 점할 뿐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게티 가문의 모든 부를 이양받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




이 영화는 그러나 애비게일 게티의 손을 들어주는 도덕극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시무시한 면면이 있다. 실은 어쩌면 J. 폴 게티의 응시에 끝까지 붙들려 있는 경제 드라마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탓이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기에는 인간애와 탐욕의 대립보다, 가능한 모든 인물과 풍경과 이미지와 서사를 자본으로 환원해온 인류의 오래된 욕망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J. 폴 게티가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착해 유전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그저 황무지에 불과했을 사막의 풍경을 한 바퀴 빙 둘러볼 때, 존 폴 게티인 줄로만 알았던 새까맣게 타버린 주검이 알고 보니 경제적 논리에 의해 대신 살해된 납치범들 중 하나로 밝혀질 때, 존 폴 게티의 도주극이, 그의 잘린 귀가, 그의 잘린 귀의 사진까지도 흥정의 소비재가 될 때, J. 폴 게티가 국외에서 납치당한 손자의 몸값 지불을 절세 수단으로 삼으려 할 때, J. 폴 게티의 하수인으로서 납치 사건 해결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플레처 체이스(마크 월버그)가 결국 그의 비인간적 태도를 견디다 못해 던진 따끔한 일침과 사표야말로 최고의 협상 수완으로 드러날 때, J. 폴 게티의 죽음마저 거래의 양식으로 표현될 때, 영화는 자기 앞의 모든 대상을 인물이든 풍경이든 단편적 이미지든 드라마든 상관치 않고 교환 가능한 무엇으로 게걸스럽게 치환해내고 있는 듯 보인다.

어찌 보면 결말부의 애비게일 게티 역시 그 살벌한 거래의 세계 속으로 불려 들어온 것인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좀 전까지 평온해 보였으나 갑자기 부들부들 떠는 애비게일 게티 앞에는 J. 폴 게티의 조각상이 놓여 있다. 부동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의 가치는 언제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음을 주지시키는 부동의 시선, 역설의 이미지다.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무차별적인 경제 논리와 일치하는 그 시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을 것이다.


이후경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