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 강좌] 오즈 야스지로를 말한다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기간 중에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세계를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세 차례의 영화사 강좌가 마련되었다. 그 마지막 강좌로 지난 9월 30일 저녁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상영 후 영화평론가 김영진 교수의 강연이 진행되었다. ‘오즈 영화에서의 감정에 관하여’란 주제 때문인지 흥미로운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 강연 현장을 여기에 싣는다.


김영진(명지대학교 교수, 영화평론가): <고하야와가의 가을>이라는 영화는 잘 아시듯이 오즈 야스지로의 후기작 중 하나로, 이후에 <꽁치의 맛>을 찍고 돌아가셨다. 개인적으로 오즈의 후기작들도 좋아한다. 보통의 나이 든 감독의 영화 같지가 않다. 주인공인 만베이라는 캐릭터는 이전까지의 오즈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노인의 캐릭터와는 다르다. 철없는 노인의 모습인데, 나이가 들면 보통 지혜와 성숙함을 가진다는 생각에 반해, 노인이 된 오즈 본인이 늚음에 대해 그런 관점을 보인다는 것이 특이하다. 어떻게 보면 냉혹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느낌도 있다.
오즈는 당대의 거장이었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었지만, 이 영화를 찍을 당시는 이런저런 공격도 많이 받고 있었을 무렵이기도 했다. 60년대에 정치의 계절이 시작되고, 영화 지형도 급격히 바뀌게 된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무너지고, 희미하게나마 자주영화의 시대가 열리고, 오시마 나기사 같은 감독들이 주류로 떠오를 때이다. 마치 미국에서 60년대의 존 포드가 그랬던 것처럼 오즈 역시 낡은 세대의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즈는 그를 비판했던 어느 젊은 감독을 나중에 만나 ‘영화감독이라는 것은 다리 밑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창녀 같은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임종 무렵에는 ‘영화는 사건이 아니라 드라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를 굉장히 크게 생각하고, 영화는 중요한 것을 찍어야한다는 경향에 맞서 오즈는 늘 홈드라마만 찍었던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혼담이 오가고 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 그런데도 그의 영화가 오랫동안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왜일까.
오즈는 배우가 연기를 못하게 한다.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으면 나중에는 배우가 지칠 정도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시 찍었다고 한다. 오즈의 영화를 보면 연기가 굉장히 양식화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감정이 쌓인다. 비결이 뭘까. 일단 내러티브에서 보면 일반적인 영화에서 계속 끌고 가는 부분을 잘라내고, 내러티브 전개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되는 부분을 길게 찍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영화에서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들을 묘사하지 않고, 반대로 일반적으로 누락되는 것들을 굉장히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그 느낌이 굉장히 묘한데, 그 가운데서 우리는 공간에 대한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공간이다. 이는 오즈 영화의 특징적인 면이다. 이를테면 만약 아버지와 딸의 얘기라면, 딸을 시집을 보내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늘 딸이 있던 2층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비어있는 2층의 거실이나 침실을 보여주고 나면 그제야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이 밀려들면서 끝난다. 상실감이나 부재의 느낌이라는 것은 우리가 늘 함께 있던 공간에 누군가가 없을 때 절실하게 느껴진다. <고하야와가의 가을>에서는 굉장히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부재의 느낌이 있다. 만베이의 집에선 매미 소리가 계속 들린다. 굉장히 중요한 사운드 장치처럼 되어있다. 얼마 안 있어 그 매미들도 완연한 가을이 되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오즈의 영화들이 대부분 그런 방식으로 삶의 순환, 운명을 받아들이는 느낌을 보여준다. 그것이 대개는 따스하게 그려지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을 보면 조금 냉정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까마귀들이 엄청 강조 되고, 마치 조종을 울리듯 오즈 영화답지 않은 음악이 흐른다. 거기에 아키코와 노리코가 대화를 하면서 ‘나는 내 길을 가겠다’고 말한다. 일말의 미련이나 감상도 없이 탁 끊어버린다. 종래의 오즈의 영화들에 깃들어 있던 정조들, 따뜻한 느낌들과 조금은 다른 느낌을 준다.
오즈의 영화에서 내러티브가 인과관계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인위적으로 누락시키고, 어떤 부분은 보통 영화에서보다 훨씬 늘여놓는 가운데 공간의 느낌이 강조된다는 것과 함께 수평의 대화 장면들 역시 특징적이다. 통상적인 쇼트/리버스 쇼트가 아니라 스트레이트하게 붙어있는, 그것도 구도를 똑같이 해서 붙어 있는 쇼트들을 보여준다. 그런 식으로 굉장히 양식화된 화면이 주는 느낌에 우리는 반응을 하게 되는데, 그게 오즈 스타일의 힘인 것 같다. 오즈의 영화에는 화면사이즈의 양식화와 함께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쇼트들, 흔히 말하는 빈 쇼트들이 등장한다. 그야말로 통속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득 특정한 사물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식이다. 70년대에 폴 슈레이더는 이러한 오즈의 스타일을 ‘초월적 스타일’로 명명하면서 선의 결정체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하스미 시게히코 같은 평론가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만춘>에서의 항아리 쇼트에는 항아리만 있는 게 아니라 항아리에 떨어지는 그림자와 빛이 있고, 무드가 있다고 얘기한다. 그 공간에서만의 무드가 아닌, 두 부녀가 살아왔던 삶의 무드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고하야와가의 가을>에도 그런 쇼트들이 있다. 만베이가 속한 공간은 교토의 오래된 가옥들이 있는 공간이다. 거기에 노리코가 근무하고 있는 현대식 빌딩들을 보여준다. 그런 식의 인서트 커트들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후반부에서 까마귀나 무덤, 화장터 굴뚝에서 나는 연기 같은 것을 보여주는 쇼트들에는 기존의 오즈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근본적으로 그런 쇼트들은 누구의 시점이 아닌데, 사람에 대해서 뭔가 거리를 두는 오즈만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영화에서의 화면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시선으로 어떤 층들을 가지고 있다. 거리감를 충분히 두고 있으면서, 애정을 갖고 있는, 그러면서 상투적이지 않을 수 있는 힘이 그런 쇼트들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날드 리치라는 미국 평론가가 서구에 일본 영화를 소개하는 어떤 프레임이 있다. ‘일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오즈도 그런 틀 안에서 시켰다. 그런가 하면 80년대에 노엘 버치나 데이비드 보드웰 같은 평론가는 서구적 맥락 안에서 오즈의 영화를 해석한다. 인과관계에 따라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방식의 고전적인 영화와 다르다는 점에서 오즈의 영화를 굉장히 모던한 영화로 보았다. 오즈의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받쳐주는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구의 평단에서 오즈의 영화가 재해석되었던 맥락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하스미 시게히코 같은 평론가는 표층 비평이라고 해서 심층을 전제하지 않고 텍스트의 표면을 가지고 얘기한다. 영화에서의 표현만을 집요하게 관찰하며 비평하는 것이다. 심층을 전제하고서 설명하는 것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오즈의 영화에서 먹는다는 것, 계단을 오른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굉장히 신선하고 재미있다.
오즈에 대한 해석이 어떤 식으로 향하든 특이한 것은, 지금도 오즈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앞서 있는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의 페드로 코스타 같은 감독은 자신이 오즈의 영화에서 받은 영향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영화가 오즈의 영화와 닮아 있다고 말한다. 본질적인 문제인 것 같다. 오즈는 진짜와 가짜와 같은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초월해 거기서 나온 감정이 진실하냐 아니냐를 가지고 승부를 걸려고 했던 감독이었다고 생각된다. 페드로 코스타 같은 감독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핵심이라는 면에서 오즈의 영화가 굉장히 위대하다고 얘기한다. 오즈는 익숙하건 익숙하지 않건, 일종의 관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려고 했던 감독 같다. 가장 뛰어난 배우는 연기하지 않는 배우다. 훌륭한 감독이 배우에게 디렉션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연기를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오즈도 결국 그런 것을 시도 했던 게 아닐까. 자신이 만든 양식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가짜 같다는 느낌을 결국 역설로 돌파했던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객1: 하라 세츠코는 늘 딸이나 며느리로 등장하는데, 그래도 다음에 볼 영화에는 또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진다. 오즈의 영화에는 늘 익숙한 배우들이 역할을 바꿔가며 등장하는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김영진: 말씀하신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웃음) 일본영화는 이미 30년대에 스튜디오 시스템이 확립되어 있었다. 당시 오즈 사단이라고 해서 작업하는 스탭들과 배우들이가 항상 같았다. 관객들이 일정한 기대를 갖고 극장을 찾게 되니까, 스튜디오 시스템에서는 그러한 것이 굉장한 자산이 된다. 오즈의 홈드라마, 카프라의 코메디, 존 포드의 서부극 하는 식이다. 익숙하다는 것은 영화 산업 안에서 티켓 파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반복 된다. 그러한 반복과 차이는 장르나 스타시스템에서 굉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 안에서 아주 절묘하게, 계속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들이 중요하게 된다.


관객2: 오즈 의 영화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오즈의 영화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김영진: 홍상수 감독이 좋아하는 감독 중의 한명이 오즈 야스지로다. 일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오즈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대한 얘기 중 하나가 비판이 사건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인간의 욕망을 하나로 제한시켜 놓고, 공간이나 시간, 아이덴티티를 확장시켜가면서 이를 변주해 가는데, 오즈의 영화에서도 그런 점들을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 그리고 굉장히 일상적인 사물인데 오즈의 영화에서 보면 굉장히 특권화된 순간처럼 보일 때가 있다. 삶에 대해 생각할 때, 늘 같은 일상 가운데 갑자기 무언가 감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마 그런 점에서 유사성을 느낄 수 있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관객3: 오즈의 영화 같이 늘 비슷하고 평범한 홈드라마가 당대에도 흥행 했는지 궁금하다.
김영진: 오즈는 흥행 감독이었다. 그가 쇼치쿠에서 영화를 찍으면서 항상 최고의 스탭들, 배우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영화가 흥행이 잘 됐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영화는 역설이다. 고다르는 40,50년대가 사람들이 르누아르나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를 부담 없이 보러가던 좋은 시대였다고 말했다. 당시의 서민적인 오락이었으면서도, 지금 보면 굉장히 에센스가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던 시대였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 조유성(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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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선택,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 시네토크

2월 6일 토요일 오후, 홍상수 감독의 선택작 <오데트>의 상영 이후 허문영 평론가의 진행 하에 관객과의 대화가 펼쳐졌다. 느린 트래킹으로 시작한 영화는 보는 이를 유혹하기 위해 현란한 재주를 부리는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적의 순간에 가닿기 위해서는 긴 기다림이 필요했다. 하지만 영화가 마지막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우리 모두는 잉거의 부활을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20년 만에 <오데트>를 다시 보게 되어 너무 좋았다는 홍상수 감독의 애틋한 목소리에서도 마지막 순간의 떨림이 그대로 이어졌다. 허문영 평론가 역시 과도한 설명을 아끼려는 모습이었던 그 현장을 전한다.


허문영(시네마테크부산 원장, 영화평론가): 이 영화를 보신 많은 분들도 그렇게 느끼시겠지만, 다시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신비로운 영화인 것 같다. 먼저 감독님이 이 영화에 대해서 느끼시는 바가 궁금하다.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과 이 영화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신지.

홍상수(영화감독): 사실 관객 분들이 어떻게 보셨는지가 더 궁금하다. 이 영화를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 추천했고, 같이 볼 수 있게 돼서 좋았다. 스물일곱인가 스물여덟에 처음 봤고, 오늘 두 번째로 봤다. 대학원 다닐 때였는데, 소위 말하는 클래식이란 영화들을 찾아보고 있던 시기였다. 그 때 보자마자 평생 기억하고 있을 만한 영화라고 생각했고, 이후로도 가끔씩 생각했던 영화다.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학생으로서 중요한 레퍼런스 포인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게 이상적 표본이 된 영화 중 하나다. 이후에 가끔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면 카메라의 수평운동, 계속되는 카메라의 느린 움직임과 긴 기다림이 기억난다. ‘긴 기다림이 있어야만 이 결말이 믿어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카메라 움직임부터 여기 나오는 인물들, 그들의 성격이나 인품, 단순한 세팅,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서 우리를 자꾸 어떤 믿음으로 몰고 가고 준비시킨다. 그리고는 아주 한참 걸려서 우리는, 물론 만들어진 그림이고 연기한 것이지만, 마지막 장면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것임을 믿게 된다. 다른 영화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정도의 기적은 많이 만들어지지만, 그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나 정말 믿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마지막 장면을 믿고 싶었고, 기적이 일어나길 기다렸고, 실제로 며느리가 다시 살아났을 때는 정말 믿었던 것 같다.

영화의 힘을 느꼈다. 이 영화에는 눈으로 기적을 볼 수 있게 만들고, 그것을 믿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영화는 만든 사람의 영악함이나 계산이 아니라, 만든 사람이 영화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이었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를 통해서 이런 것을 할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영화의 모든 부분들, 리듬이나 대사의 깨끗함, 인물들의 인품을 만들어낸 과정에서 만든 사람의 진지함, 충실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점들이 좋아서 칼 드레이어가 쓴 책을 읽어봤는데, 책은 좀 답답하더라. 좀 답답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충실함에 대한 바람, 관심, 열정이 있었던 사람인 것 같다. 충실한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우리는 그런 충실함으로부터 왜 멀어졌나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런 진심을 갖고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영화를 보고나면 내가 믿고 있는 헛된 잡소리들, 내가 쌓아놓은 관념적인 탑들, 사람들한테 잘 통한답시고 습관처럼 하는 제스처들, 과잉된 자의식 같은 것들 때문에 움츠러들어서 제대로 사랑해 주지 않은 내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봐도 이 영화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기독교 영화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이런 진지함과 충실한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영화다. 그런 중요한 문제를 환기시키고 건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영화라 생각한다.

허문영: 말씀하신 것보다 더 나은 설명을 덧붙이기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몇 가지 질문을 드리긴 해야 할 것 같다. 기독교적인 부분들 때문에 얼핏 이 영화는 감독님과 안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굉장히 경건하고 금욕적인 분위기의 영화처럼 보여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 영화를 종교와 신앙 문제에 관해 고뇌하는 영화로 받아들이고, 잉거의 부활을 종교적 신앙의 실현, 믿음의 실현으로 이해하곤 한다. 기독교 영화로 보지 않으셨다면, 어떤 측면에서 이 영화를 보셨는지 궁금하다.

홍상수: 이 분이 어떤 배경에서 이 영화를 만드셨는지는 모르겠다. 기독교적 신앙이 있는 분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에서는 저 빌딩을 돌아서면 적이 있고, 적들을 죽이려면 오른쪽으로 돌지 왼쪽으로 돌지를 고민한다. 전쟁 얘기면 전쟁가지고 얘기하는 것이고, 연애얘기면 연애가지고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다루는 문제가 어느 정도의 현실 속 리얼리티를 갖고 있느냐하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이 영화도 기독교와 상관없이 봐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분이 정하신 주제의식과 환경, 재료들이 있는 것이고, 그것들로 만들어낸 인물들과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것들이 부딪히면서 어떤 작용을 일으키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너무 잘 만들어진 영화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음속의 충실함이란 것에 도달하려는 사람들이 회의를 느끼는 모습들이 여러 인물들에 잘 나뉘어져 있다. 첫째아들과 아버지, 반대편에 있는 재단사, 그 모두를 다 사랑하는 며느리, 미친 사람 취급받는 남자에 잘 나눠져 있다. 그들이 믿음에 관해 하는 얘기도 전혀 교조적이지 않다. 아마 영화를 보시면서 충분히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계속해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참여하고 있는데, 작년에는 에리히 본 스트로하임의 <탐욕>, 재작년에는 장 비고의 <라탈랑트>, 그 앞에는 브뉘엘의 <절멸의 천사>를 고른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 추천작들을 보면 <오데트>를 포함해서 모두 무성영화거나 무성영화 시대에 자신의 이력을 시작한 감독들의 영화다. 무성영화의 자장 안에 있는 영화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본인은 유성영화시대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난 뒤에 영화를 시작해서 유성영화를 만드는 감독인데, 무성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호가 있는 것 같다.

홍상수: 무성영화를 많이 보지는 못했다. 추천작들이 오래된 영화들이기는 하다. 보신 분들은 어떠실지 몰라도, 그 무렵의 영화들이 좋다. 보고 진짜 훌륭하다고 느끼는 영화들은 이런 옛날 영화들이더라. 자연스럽게 나에게 박힌 영화들이 있다. 굳이 얘기하자면 뤼미에르 형제가 맨 처음에 만든 짧은 단편들을 좋아한다. 영화관에서 틀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쇼트들인데, 보고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안개 낀 부둣가에서 남자들이 배타고 가는 것을 찍은 쇼트가 있는데, 움직임 자체가 주는 느낌만으로도 예쁘고 아름다웠다. 영화의 원류가 된 분들의 영화에 많이 끌린다. 물론 초기 영화감독들도 전시대의 화가나 소설가에게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들이 영화적 완성도에 도달하면서 영화의 위치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계속 다시 보고 싶다고 느끼는 영화들은 대부분 그런 분들의 영화다. 그 이후의 감독들은 시기적으로 늦게 태어나서 할 수 없이 그 전의 것들을 흡수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단지 흡수한 것을 여러 가지로 섞을 때 자신의 태도가 반영되고 재능이 표현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은 공교롭게도 ‘말’이라는 뜻의 <오데트>다. 이 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은 우리가 보통 접하는 유성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런 점에서는 감독님의 영화에서 대사를 다루는 방식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듣기에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조화의 느낌이 있다. 대사가 정보 전달이나 의미 전달의 기능을 한다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육체로, 혹은 배우라는 육체에 부착된 물질적 음성으로서 감각된다. 듣고 있으면, 저 음성과 저 방식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말의 물질성, 육체성을 중시하는 점이 공통적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드레이어는 영화를 찍을 때 현장에서 음성을 매치시켜 보고 잘 안 맞다 싶으면 대사들을 빼버렸다고 한다. 감독님은 이 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셨는지.

홍상수: 개인적으로는 말들이 듣기에 너무 좋았다. 귀가 편했다. 내용은 자막을 통해서 이해했지만, 말들 한 마디 한 마디가 딱 있을 것만 있는 느낌이다. 인물들의 인품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하나도 거슬리는 것이 없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음악 같다고 할까. 쓸데없는 것이 붙은 곳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인물들도 무척 좋았다. 저런 시대나 장소가 실재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하나의 가치관 속에 묶여 살면서 그 속에서 서로 더 충실하려고 애쓰고, 가끔은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부닥치기도 하는 커뮤니티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오즈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도 현실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쁘지 않나. 하나의 큰 가치관 속에 묶여 있으면서 서로 충실하려는 사람들이고, 어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걸 극복하려는 애씀 자체가 예쁜 인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말하셨듯이, 물결이 조용히 흐르는 것 같은 카메라의 수평 트래킹과 롱테이크가 특히 인상적이다. 물론 롱테이크나 트래킹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이 영화에서는 각별한 느낌을 자아낸다. 드레이어는 영화사상 가장 격렬한 몽타주 영화 중 한 편인 <잔 다르크의 수난>을 만든 사람이지만, 전체 필모그래피에서 <잔 다르크의 수난>은 좀 예외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이 영화에서와 유사한 카메라 워크와 롱테이크를 더 선호했었던 것 같다. 드레이어 본인도 인터뷰에서 “나는 롱테이크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다”고 밝힌 바가 있다.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청년시절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트래킹과 롱테이크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궁금하다.

홍상수: 처음 봤을 때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 그 답답함도 필요했었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 보면서는 훨씬 편했다. 나이 탓도 있겠고, 생각이 달라진 탓도 있을 것 같다. 그 때 놓친 것이 많았던 것 같다. 오늘은 인물들도 구경하고, 인물들이 만들어나가는 관계도 봤다. 사이사이에 구경하고 쳐다볼 게 너무 많아서 답답함을 못 느꼈다.

 

관객1: 영화를 본다는 체험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주는 위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신이 있나 없나를 따지기 보다는,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어떻게 관객이 체험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트래킹과 긴 호흡을 통해 보여준 좋은 영화인 것 같다. 보면서 베르히만의 <처녀의 샘>이 계속 떠오르더라. 그 영화도 굉장히 호흡이 길면서 마지막에 큰 울림을 주는 영화였는데, 보셨다면 어떤 느낌이셨는지.

홍상수: 그 영화도 봤지만, 이 영화를 훨씬 좋아한다.

허문영: 실제로 드레이어가 좋아했던 영화 중 한 편이 <처녀의 샘>이었다.

 

관객2: 작년에 필름포럼에서 <오데트>로 강연하실 때 마지막 키스가 주는 육체적 느낌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오늘 보니 훨씬 더 이상하고, 훨씬 더 육체적인 느낌이 든다. 마지막에 신을 부르는 대신 삶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이상하게 다가온다.

허문영: 마지막에 나오는 잉거의 키스 장면은 너무 외설적일 정도로 적극적이다. 아기가 네 동강이 나서 죽었다는 끔찍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다시 애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동물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 느낌까지 드레이어가 계산했는지 여부를 떠나서, 이 영화에는 관능적이고 외설적이면서 육체적인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3: 진심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데, 믿음은 이성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순수한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 일어나야 가능한 것 같다. 공통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비슷한 것 같다. 영화에서 어린 딸이 신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엄마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라는데, 그런 순수함이 기적을 가능케 한 것 고, 거기서 오는 감동이 있다.

홍상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고, 그렇지만 잡으려면 잡을 수 없고, 또 있으면 엄청난 힘을 얻고 너무 편안해 지는 것이 믿음인 것 같다. 믿음은 특권 같다. 특권은 권리가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분석을 통해 믿음을 확보하는 방법을 찾거나, 증거가 있으니까 믿음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제일 온전한 상태일 때 자기가 느낀 것, 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 아닌가 한다. 내가 본 것과 느낀 것을 통해서 이미 생각하기도 전에 내가 그것을 믿고 있는 거다. 하지만 내가 불안하고 흐트러져 있을 때는 온갖 잡것들이 낀다. 그러면 온전한 상태에서 느끼고 본 것을 자꾸 분석하려고 든다. 증거를 대야 믿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있어서 결국 못 믿게 만드는 거다. 믿음은 확고하거나 자물쇠로 채워놓은 것도 아니고, 내가 딴 생각이나 딴 짓거리 하고 다녀도 그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믿으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온전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내 속에 계속 믿음이 있을 수 있다. 믿음은 너무 많은 것을 주는 큰 행복이기 때문에 그것에 증거를 댈 필요도 없고, 그것을 남에게 자랑하고 팔고 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정리: 이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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