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


초기 영화들에 보인 관객과 평단의 일관성 있는 호응과 달리 <달콤한 인생>(1960)은 엄청난 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영화다. <달콤한 인생>은 <카비리아의 밤> 이후 펠리니가 더 이상 네오리얼리즘의 범주가 아닌 그만의 고유한 속성을 만들어낸, 그 출발점에 위치한 중요한 작품이다. 전작에서 보여준 개인의 내밀한 현상, 즉 외부의 영향과 관계없이 인물 스스로 겪는 정신적 혼란이 <달콤한 인생>에서 구체화되었다. 펠리니는 여기에 시적이고 환상적인 표현을 추가했다. 밤과 낮이라는 시간의 경계에 따라 행동과 사고가 완전히 뒤바뀌는 마르첼로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달콤한 인생>의 모든 에피소드는 마르첼로의 행적을 따라 진행되는데, 그가 만나는 모든 인물들(여성들)은 마르첼로의 시각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의 욕망에 따라 등장하고 사라진다. 마르첼로와 여성들, 그리고 마르첼로의 친구들이 벌이는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만남과 헤어짐의 장면들은 밤에서 낮으로 전환되는 ‘새벽’에 배치되어 인물들의 현실의 시간을 모호하고 몽환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달콤한 인생>은 마르첼로의 주변에 놓인 사회적 현상들을 비난하는 영화다. 3류 기자이지만 기사를 쓰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상류층 모임 등을 쉽사리 드나들 수 있었던 마르첼로는 상류계급에 대한 비판을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다. 펠리니는 이 영화로 제13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자국에서는 극장 개봉부터 수없이 많은 구설수에 올라야만 했다. 각계각층을 누비며 비정상적인 인물들의 행위를 폭로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당시 이탈리아 상류사회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개봉 즉시 <달콤한 인생>을 향해 거센 항의가 쏟아졌다. 특히나 영화의 첫 장면, 바람둥이를 연상시키는 헤픈 인물들이 예수의 조각상을 공중에 띄워놓은 채 추파를 던지는 장면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종교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극단적인 평가를 얻었던 만큼 화제가 되어 자국에서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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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페데리코 펠리니의 <오케스트라 리허설>

<오케스트라 리허설>(1978)은 텔레비전 방송국이 인터뷰를 하는 형식으로, 한 공간에서만 촬영된 영화다. 영화의 무대인 음악당은 원래 예배당이었으나 반향이 없는 음향적 기능을 가진 덕에 음악당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곳에 옛 성직자들의 무덤과 역대 지휘자들의 초상이 걸려 있어서 신성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연주자들은 인터뷰를 할 때 자신의 악기에 대한 매력과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보여준다. 그들은 또한 급료와 휴식시간 등 노조규약에 민감하다. 지휘자는 호통을 치면서 연주자들에게 제대로 연주하라고 하며, 결국 그들을 휘어잡아서 옷을 벗어야 할 만큼 열정적인 연주를 하게 만든다. 하지만 휴식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연주자들과 노조대표의 반발에 부딪쳐 리허설은 얼마 안가서 중단된다. 이들이 쉬는 동안 지휘자는 인터뷰에서 옛 시절을 회고하며 지금 시대는 진정한 음악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한탄한다. 그런데 휴식시간이 끝나자 연주자들은 조금 전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간데없고, “음악은 착취의 사슬”이라고 목청을 높이며 지휘자를 몰아내려 한다. 연단에 메트로놈을 세우고 급기야는 그것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시위는 점점 과격해져서 단원들끼리 서로 충돌하고 권총이 발사된다. 혼란스런 순간에 음악당의 벽은 둔중하고 커다란 쇠구슬(‘종말의구’를 상징한다)로 허물어지고 음악당은 아수라장이 된다. 하프연주자가 다쳐서 실려 가고 나서야 시위가 진정된다. 이 때 지휘자가 연단에 서서 “음악이 우리를 구원한다”며 연주자들이 자신의 지휘에 따르도록 독려한다. 연주자들은 감동에 젖어서 연주한다. 하지만 지휘자는 예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좀 더 정력적으로 연주하라며 호통을 치고 리허설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영화를 본 관객들과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이탈리아의 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메타포로 읽으려 했다. 극 중 “리허설은 공장과 같다”는 지휘자의 말에서 드러나듯 영화는 펠리니 자신이 영화를 만들면서 겪었던 고뇌와 어려움들을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펠리니는 자신이 직접 재난의 현장에 뛰어들 듯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펠리니는 영화가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우리가 어떤 끔찍한 재난의 위협을 받고 있는지, 우리 안에서 어떤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객들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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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페데리코 펠리니의 <아마코드>


영화 제목인 ‘아마코드’는 펠리니의 고향이자 이 영화의 배경인 이탈리아 리미니 지역의 방언으로 ‘나는 기억한다’라는 뜻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영화는 마치 펠리니가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풀어놓은 것처럼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1930년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나레이터를 자청한 마을 변호사의 소개에 따라 주인공 소년 티타와 친구들이 학교와 교회에서 벌이는 짓궂은 장난에서부터 티타의 가족 이야기, 마을의 아름다운 여인 그라디스카에 얽힌 이야기, 무솔리니의 마을 방문으로 벌어지는 해프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건들을 인과관계나 중심 내러티브 없이, 마치 일기장의 페이지를 넘기듯 차례차례 담는다. 여기에는 겨울 마녀를 불태우는 축제로 맞이한 봄에서 아름다운 해변의 여름, 티타의 할아버지와 삼촌이 소변을 보던 황금빛으로 변한 들녘의 가을, 눈이 쌓인 겨울, 그리고 다시 돌아온 민들레 홀씨가 날리는 봄까지 다섯 계절의 시간 흐름만 있을 뿐이다.


<8과 1/2>에 이어 펠리니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외국어상(1974년)을 수상했다. 과거를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 펠리니의 일련의 영화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되는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기억의 세계가 환상의 세계와 뒤섞이고, 과거가 리얼리즘이 아닌 환영의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8과 1/2>이후 펠리니의 영화에서 과거의 기억과 환상, 그리고 현실은 서로 뒤섞여 이들 간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아마코드>에서 펠리니가 기억하는 과거의 한켠에는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 내려앉은 공작처럼, 그리고 말을 하는 무솔리니 얼굴 모양 꽃장식처럼 아무렇지 않게 환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환상이 너무나 아름다운 화면 뒤에 숨은 채 파시즘 하의 이탈리아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파솔리니, 로셀리니와 함께 네오리얼리즘의 전통에서 출발한 펠리니가 1973년에 이르러 이 영화 속에서 환상처럼 재현하고 있는 파시즘의 모습은 그저 조롱이라고 보기에 편치만은 않다. 음악을 담당한 니노 로타를 공집합으로 이 영화와 이보다 한 해 전에 만들어진 코폴라의 <대부> 혹은 구스 반 산트의 2007년 작 <파라노이드 파크>를 묶어본다면 더 흥미로운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우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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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페데리코 펠리니의 <사티리콘>


<영혼의 줄리에타>가 흥행에서 실패한 뒤 페데리코 펠리니는 제작자인 디노 드 로렌티스와의 소송에 휘말려서 재산 일부를 압류당하고, 늑막염으로 요양소에 들어가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요양소에서 돌아온 후 <기이한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의 옴니버스 공포영화에 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1969년 <달콤한 인생>의 후속작이라 일컬어지는 <사티리콘>을 만들었다. <사티리콘>의 시대적 배경은 고대 로마이며, 현대물인 <달콤한 인생>과 내용적인 면에서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등장인물들의 기행과 도덕적 타락상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다.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고전적인 극영화의 서사 구조에 충실했던 <영혼의 줄리에타>에서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이 결합된 <8과 1/2>의 구조로 되돌아갔다고 평가된다.

이 영화는 1세기경 네로 황제 시대의 로마 작가인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사실적이고 풍자적인 내용의 원작은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출판되었을 정도로 온전히 보존되지 못하고 단편적으로만 남아있었다. 펠리니는 원작에 대해서 눈이 없고 부서진 코를 하고 있는 박물관의 두상을 회상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조각조각 나누어진 원작을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대신 죄의식이나 수치심이 없는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도구로 삼았다. <달콤한 인생>이 기독교적인 반면 <사티리콘>은 기독교적 도덕관에서 해방되고자 한 이교도적인 풍속화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와 동시에 구원과 은총이라는 기독교적 모티브를 품고 있기도 하다.

<사티리콘>은 미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시사회 반응도 무척 열광적이었다. 특히 비틀즈의 존 레논이 <사티리콘>의 팬이었는데, 당시 그는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의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마틴 스콜세지는 ‘조명과 컬러를 가장 탁월하게 이용한 영화 베스트 10’(이 리스트는 영어권 영화 10편과 그 이외 지역의 영화 1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을 선정할 때 이 영화를 뽑기도 했다. 이 목록에는 이탈리아 영화가 네 편 들어있는데 <사티리콘> 이외에 루키노 비스콘티의 <센소>,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붉은 사막> 등이 뽑혔다. (홍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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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페데리코 펠리니의 <카사노바>


페데리코 펠리니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만들어낸 영화 <카사노바>(1976)는 카사노바 이야기에 관한 가장 독창적이고 이질적인 해석을 한 작품이다. <사티리콘>부터 시작된 펠리니 중후기의 화려한 미장센과 카니발적인 환영의 세계가 이 영화에서 정점을 맞이한다. 영화의 긴 러닝 타임 동안 밀도 깊게 펼쳐지는 강렬한 이미지들과 과잉의 에너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매혹과 혐오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오가게 한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로마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다. 각 나라의 도시들, 파티장을 표현하는 오색찬란한 화려한 공간부터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공간과 음침한 뒷골목까지, 수많은 공간들이 정교한 세트디자인으로 표현되었다. 다닐로 도나티가 만들어낸 다채로운 의상들은 더욱 놀랍다. 금은보화로 치장된 화려한 옷부터 컬트적이다 못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의상들은 과잉적인 찬란한 색채들의 향연을 펼치며 아름다움과 추함의 미학을 공존시킨다.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의상디자인상을 수상했다. 한편 펠리니의 오랜 동반자인 니노 로타의 음악은 매우 복잡한 이 영화의 세계를 절묘하게 감싸고, 카사노바를 연기한 배우 도날드 서덜랜드는 아크로바틱한 운동성과 섬세한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는 경이로운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카사노바는 베니스에서 감옥에 갇혔다가 운 좋게 탈옥하여 각 나라를 떠돈다. 각 나라의 유명한 도시들에 가서 수많은 파티에 참석하고, 그곳의 여자들을 만난다. 그가 참석하는 파티들에서는 카니발적인 축제들이 펼쳐진다. 추악한 욕망을 무차별적으로 표출하는 집단 광기의 난교 현장들은 유럽인들의 정신이 병들었음을 시사한다. 반면 카사노바에게 섹스는 욕망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제의나 의식 같다. 영화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섹스 장면들은 전혀 에로틱하지 않다. 단순히 옷을 벗지 않아서만이 아니다. 욕망이나 감정 없이 진자나 피스톤의 단순한 왕복운동처럼 벌어지는 섹스는 마치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카사노바가 섹스를 할 때마다, 남근을 형상화한 새의 모형은 날갯짓을 하며 빙글빙글 돌고 괴상한 음악이 함께 흘러나온다. 카사노바는 차라리 하나의 섹스기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섹스를 통해 죽음에 한 발자국씩 가까이 다가서는 것으로 보인다. 질 들뢰즈의 지적대로 영화 후반부에 자동기계 인형 여인으로 귀결되는 ‘기계적인 경련과 죽음의 파편화’처럼 말이다. 카사노바의 노년은 비참하고 쓸쓸하다. 그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보는 마지막 꿈의 이미지는 인형 여인과 춤을 추는 장면이다.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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