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 앤 씨'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5.07 해빙기 러시아의 전쟁영화
  2. 2010.04.24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를 기리며

지난 2일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엘렘 클리모프 감독의 <고뇌> 상영 후, '해빙기 러시아의 전쟁영화'란 테마로 경상대 러시아학과 홍상우 교수의 강연이 열렸다. 스탈린 사후의 '해빙기'에 러시아에서는 새로운 미학을 선보인 전쟁영화가 풍성하게 만들어졌는데, <고뇌>도 그 중 하나다. 이번 강연은 러시아의 역사, 정치와도 무관하지 않은 해빙기 러시아의 전쟁영화를 살펴보며 전쟁을 다시금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홍상우(경상대 러시아학과 교수): <고뇌>는 볼세비키 혁명 50주년 기념으로 만든 작품으로 60년대 완료가 되어야 했으나, 여러 차례 검열에 걸리게 됨으로써 뒤늦게 완성된 작품이다. 80년대에 완료되었는데, 자료마다 완성된 시기가 좀 다르게 표기되기도 한다.

러시아의 전쟁영화는 소재가 다양하고, 완성도나 사유의 깊이는 계속 진전되어 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직 다루지 않는 소재들이 있다. 자신들이 가해자였던 체코침공이나 폴란드침공에 대해서는 다룬 적이 없는 것 같다. 러시아 전쟁영화에서는 가상의 적들이 등장한다. 제정러시아 시대에는 일본인이, 2차 대전 시기에는 유대인과 독일인이 적으로 등장한다.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서면 자본가나, 귀족계급, 로마노프 왕조를 안 좋게 묘사한다. 전후에는 전쟁에서 돌아온 죄수들을 스파이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러시아는 2차 대전을 ‘대조국전쟁’이라 부르면서 자신들이 영웅적으로 싸워서 승리했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2차 대전으로 부른 것은 최근의 일이다. 공식적으로는 전쟁이 끝났으나 아직도 이러저러한 내전은 진행 중이라 할 수 있다. 빨치산을 다룬 영화를 포함한 러시아의 다양한 전쟁영화는 역사에 대한 해석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역사가들이 공식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기존의 숨겨진 역사들을 전쟁영화를 통해 많이 다룬다. 역사적 해석에 있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준 셈이다. 최근에 잘 만들어진 전쟁영화들은 기록에 남아 있던 사실들을 모티브로 삼아서 만드는 경우들이 있다. <어떤 전쟁>과 <즈베즈다>는 러시아 감찰부대에 관한 영화들이다.

러시아의 전쟁영화는 소비에트 영화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소재나 주제가 다양한 만큼 서구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다. 러시아 전쟁영화의 특별한 위치는 소련의 탄생 배경과 해체 배경과도 관련이 깊다. 또한 실제이야기든 가공한 이야기든지 중앙집권화된 군국주의적 성격이 있는 국가한테는 체제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토대가 되기도 한다. 전쟁영화는 오락이나 예술의 형태로 공식적인 역사를 전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제작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소재가 되는 것이다.

러시아 전쟁영화는 몇 가지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우선, 1932년까지 러시아는 러일전쟁, 1차 대전, 내전, 그리고 혁명 등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겪었다. 이 시기는 소련영화의 황금시기였는데 전쟁영화가 가장 중요한 장르는 아니었고 주변부 역할에 머물렀다. 스탈린주의 시기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도입되었는데, 대량숙청이 이루어지는 등 국가에 의한 테러가 빈번하던 시기다. 스탈린은 문화예술 작품에 관심이 높아서 자신이 직접 작품들을 살피기도 하고, 또 심한 검열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를 소비에트 영화 전체의 암흑기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통치체제를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기는 했지만, 전쟁시기라는 점이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전쟁 중에 만들어진 이러한 영화들의 중요한 진보는 영화가 여성화되고 탈계급적 성격이 보인다는 점이다.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여성이나 대중인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이 많다.

그 다음 시기는 여성화 및 인간화가 더욱 두드러진 2차 대전 시기다. 이른바 대조국전쟁 동안 제작된 영화들은 적에 대항해서 싸우는 여성들, 인민들, 정규군 외에 빨치산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졌다. 종전이 다가올 무렵에는 여성이나 비정규부대가 전면에서 물러나고 장군이나 높은 계급의 인물을 다룬 판에 박힌 스토리의 지루한 영화들이 상당기간 등장했다. 전후의 피폐된 현실에서 전쟁에서 싸운 전체 인물들을 다루기보다는 스탈린 본인을 영웅시하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바로 그 다음 시기가 가장 많이 얘기되는 해빙기다. 64년 이전까지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대조국전쟁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는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이반의 어린시절>, <학이 난다>, <병사의 발라드> 등은 탈스탈린화의 덕택으로 만들어진 영화들로, 그 중 <병사의 발라드>, <학이 난다> 그리고, <인간의 운명>(세르게이 본다르추크) 등은 대중성도 상당히 고려해서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로 인해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이 60년대 후반의 브레즈네프시대 때인데, 2차 대전을 기념비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고, <해방>이 시기의 유일한 전쟁영화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이 1970년대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전쟁영화의 질이 높았다곤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오르기 추흐라이, 알렉세이 게르만, 라리사 셰피트코 같은 재능 있는 감독들이 도전적인 영화를 만든 시기이다. 80년대 중반에 고르바초프의 개혁시도 이후, 85년에서 86년에는 영화산업이 거의 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승 40주년을 기념해 만든 <컴 앤 씨>가 이 시기의 유일한 걸작이다. 90년대 들어서면서는 전쟁영화의 제작은 거의 빈사상태에 빠졌다. 그러다가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들어서서 러시아의 경제가 회복되었고 영화산업도 활발해졌다. 여기에는 푸친이 러시아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는 의도도 작용했다. 2001년에서 2005년 동안에는 러시아 문화에 관한 계획이 세워지면서 영화산업에도 많은 돈이 투자되었다.

러시아 영화 전체를 볼 때, 전쟁에서의 승리를 다루는 영화들은 스토리상에서 몇몇 공통점을 가진다. 나치는 야만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그로 인해 소비에트 인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았으나 스탈린의 영도 아래 마침내 승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계급적 영웅주의와 보편적인 고통, 이 두 가지가 대개는 전쟁영화의 내러티브를 구성한다고 이야기된다. 아무리 혁신적인 영화들이라도 이런 자취는 남아 있다. 검열이 언제나 있어왔고, 그런 검열이 오랜 세월 지속됨으로써 자기검열도 또한 있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단순한 스토리가 약간 복잡해진 것은 전후에 적군에의 협력 여부를 다루는 내부감찰기관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즈베즈다>가 이러한 영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서구영화에서의 전쟁영화의 공식은 행복하고 긍정적인 결말로 이루어지는 반면 러시아 영화는 죽음을 강조한다. 이는 전쟁에서 순교임무를 완수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해빙기 영화의 대표적인 세 작품에서도 주인공들은 전부 다 죽게 된다. 러시아 전쟁영화는 이야기가 굉장히 명쾌하고 메시지도 간파하기가 쉽다. 이는 소비에트 체제가 유지되는 한에서 영화가 수행해야 할 임무중의 하나가 선전선동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리: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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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해 교감했던 아름다운 부부,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는 60년대 소비에트 영화계의 해빙기(1957~67년 사이를 말하며 소비에트 예술계에 자유가 꽃핀 시기)에 뉴웨이브를 주도하던 매우 주목받는 부부 영화인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거장 감독인 알렉산더 도브첸코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은 라리사 셰피트코는 장편 데뷔작 <날개>(1966)로 단숨에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녀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떠올리게 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구축했고, 풍경과 인간의 얼굴을 담아내는데 있어 그 누구보다 특별했다. 그러나 4편의 장편영화만을 남긴 채, 그녀는 1979년에 비극적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남편 클리모프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전해지며, 러시아 영화계에 있어서도 더 없이 큰 손실이었다. 이후 엘렘 클리모프는 아내를 추모하는 단편 <라리사>(1980)를 만들고, 아내가 마지막으로 기획했던 영화를 이어받아 <안녕>(1983)을 완성한다. 그의 대표작 <컴 앤 씨>(1985)는 분명 아내의 영화 <고양>(1977)의 세계와 공유하는 지점, 그녀의 영화를 떠올리면서 만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이와 같이 사별 후에도 그들의 교감은 예술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클리모프의 영화는 형이상학적 세계와 리얼리티에 대한 관심이 혼재되어 있고, 이 점 때문에 그는 시적리얼리즘의 거장이라 불렸다. 1980년대 중반 클리모프는 67년 이후로 강한 검열로 억압받던 영화계의 개방을 주도했고, 그동안의 금지작들이 공개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황제에 대한 동정적 묘사 때문에 금지되었던 클리모프의 <아고니>(1981)도 그의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뒤늦게 대중에게 공개된 사례다. 이 영화는 198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슬픔의 기억을 승화시키고 다시 날아오르는 그녀의 비행, <날개>


라리사 셰피트코의 <날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중년 여성(학교 교장)인 나쟈가 느끼는 삶의 무상감과 고독을 그린다. 영화의 첫 장면은 매우 이채롭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포커스 아웃된 형태로 보여주는 듯하지만, 곧 카메라가 뒤로 물러서면 그것이 실내에서 창을 통해 바라본 창밖의 풍경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는 숏은 사실은 여주인공 나쟈가 처한 심리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외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부에 갇혀있듯이, 그녀의 삶도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무언가에 의해 갇혀있는 것이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친구인 박물관 원장도, 딸과의 소통 불능도, 학교의 문제아 소년과의 충돌도 그녀의 삶에 커다란 파동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그녀는 일상의 공허함을 느끼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그녀가 거리를 걸을 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거리가 갑자기 확 비워지는 순간이 있다. 그녀의 시점으로 구성된 숏은 보도바닥을 비추다가 서서히 상승해 하늘로 향하고, 전쟁 당시 영웅적인 파일럿이었던 나쟈와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미챠와의 추억의 단편들을 담은 장면으로 연결된다. 이제야 알게 된다. 그녀의 모든 슬픔은 그 남자의 부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움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이제 그녀는 프로펠러를 작동시키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그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사랑했던 사람에의 기억과 그 사람을 상실했던 슬픔과 온전히 조우하고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시 한 번 하늘로 날아올라야만 했던 것이다.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 슬픔을 승화시키는 비행. 분출하는 삶의 열망. 영화는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그 열망을 보여준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성에 대한 성찰, <고양>과 <컴 앤 씨>

라리사 셰피트코의 <고양>과 엘렘 클리모프의 <컴 앤 씨>는 독일에게 점령당한 러시아의 작은 마을의 저항군과 민중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극한의 상황을 그린다. 영화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어디까지 버텨낼 수 있는가, 어디까지 버티는 것이 윤리적인가에 대해 사고한다.

<고양>의 세계는 하얀 눈으로 가득 차 있다. 산 속의 저항군들이 겪는 가장 큰 고충은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는다는 것이다. 신체로 다가오는 즉각적인 고통, 먹을 것이 없는 사태.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계는 또한 경계가 무화된 세계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특정 지역 벨로루시라는 장소는 하얀 눈과 함께 비워지고, ‘어떤 공간’으로 남는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인간에 대한, 인간성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차원의 성찰로 확장된다. 또한 눈 덮인 대지는 무언가 영적인 것이 깃든, 앙드레 바쟁이 칼 드레이어의 영화를 일컬었던 말을 빌리자면, ‘백색의 형이상학’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곳에 내던져진 인물들은 미묘한 삼각형을 이룬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자,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어 밀고자가 되는 자,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대독협력자인 러시아 고문기술자. 영화는 그들의 얼굴을, 눈동자를 보여준다. 모든 감정은 눈동자에 응축되어 있다. 이들이 처한 극한적 상황은 순교가 더 인간적인지 밀고가 더 인간적인지에 대한 판단 자체를 시도할 수 없게 만든다. 하얀 대지는 신음한다. 이 고통은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컴 앤 씨>는 <고양>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이어받아, 거기에 역사적 리얼리티를 가미한다. 이 영화는 ‘비엘로 러시아’ 마을의 민간인 628명이 독일군에 의해 불에 타 죽은 실제 역사를 재현한다. 저항군에 가입하려다가 쫓겨난 어린 소년은 마을 주변을 떠돌며 이 모든 사건들을 본다. 카메라는 소년을 따라다니며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들을 탐사하고 바라보는 증인의 눈처럼 움직여간다. 영화의 배경은 리얼리티에 입각해 있지만, 동시에 초현실적인 기묘한 느낌이 배어있다. 영화의 후반부는 마을 사람 전체를 밀폐된 창고에 몰아넣고 불태워 죽이는 독일군들의 모습을 오랜 시간동안 보여준다. 카메라는 창고 내부에서 타죽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는 대신, 창고를 둘러싸고 하나의 축제처럼 즐기고 있는 독일군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그들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끔찍하다. 어쩌면 희생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끔찍할지도 모른다. 소년은 이 모든 것을 바라본다. 동시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과 눈동자를 본다. 소년이 겪는 극도의 공포감과 충격은 얼굴의 손상을 통해 드러난다. 그 학살의 축제가 끝날 때쯤이면 소년의 얼굴은 마치 노인처럼 보인다. 그 어떤 것으로도 씻어낼 수 없을 법한 극한의 고통의 흔적이 소년의 얼굴에 새겨져 있다. 인간의 얼굴을 통해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는 감정을 놀랍게 묘사하는 면에서 셰피트코의 <고양>의 경지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소년은 물가에 잠긴 히틀러의 포스터에 총을 쏘기 시작한다. 총이 발사될 때마다 거꾸로 돌아가는 뉴스릴의 영상이 몽타주 된다. 마치 역사를 되돌리고 싶다는 듯이. 역행하던 독일의 역사는 종국에는 히틀러라고 생각되는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사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자 소년은 아이의 얼굴을 향해서는 더 이상 총을 발사하지 못하고 대신 눈물을 흘린다. 앞서 독일의 파시스트는 “아이들이 있으면 다시 되살아난다. 너희들은 존재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고, 소년은 이 말을 들었다. 아이를 향해서는 차마 총을 쏘지 못하는 것, 이것이 그 소년의 내면이 선택한 최후의 인간성일까. 이는 소년이 한 명의 개인으로서 역사를 홀로 마주했던 순간이다. 소년은 군대의 행렬에 합류하면서 다시 집단의 일원으로 사라진다. 카메라는 그 행렬에서 벗어나 숲을 가로질렀다가 다시 행렬을 비추고 멈춰 선다. 그렇게 그 고통의 기억을, 오욕의 역사를 떠나보낸다.

러시아 역사의 중대한 순간을 재현하는 <아고니>

엘렘 클리모프의 <아고니>는 러시아 황실이 무너지면서 제정정치가 끝나는, 20세기 러시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순간을 보여준다. 영화는 일촉즉발 위기의 임계점에 처한 러시아의 상황을 보여주는 뉴스릴 필름을 활용하며,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자막을 통해 이름과 직책을 소개하는 등 역사적 사실을 매우 정밀하게 표현한다. 황실의 무너짐의 중심에는 로마노프 왕족의 최후의 짜르인 니콜라이 2세의 유약함과 황실 깊숙이 침투해 사실상 국정운영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남자 라스퓨틴의 광기가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각료들로부터 혁명의 경과에 대해 보고받던 황제가 현실에서 도피하듯 회의실을 벗어나 비밀 통로로 보이는 복도를 지나 황후의 내실로 들어가는 부분이다. 그곳에서 라스퓨틴은 종교적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고 황후는 그를 숭배하듯 떠받든다. 황제는 거기서도 도피하여 사진현상실로 들어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라스퓨틴은 성자이자 예언자로서의 모습, 광인으로서의 모습, 현명한 책략가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의 중심성은 점점 그가 성인인가 광인인가에서, 그를 둘러싼 인간들과 사회가 벌이는 행동과 인간성의 문제로 옮겨간다.

황실과 민중간의 간극은 도저히 매워질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클리모프는 이 거대한 틈새를 흑백의 기록용 뉴스릴 영상과 컬러로 재현된 영상(픽션)의 몽타주를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러시아의 비극적 역사(전쟁, 폭동, 기아로 비롯된 고통)가 기록된 영상과 황실 내부의 동화적 공간에서 라스퓨틴이 이상한 향락의 쇼들을 벌이는 장면이 충돌하면서, 러시아 황실이 왜 무너졌으며, 왜 무너져야만 했는지를 비판적 시선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역사적 리얼리티와 라스퓨틴이라는 인물 자체가 내포한 영적인 면모에 대한 흥미 모두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황실과 라스퓨틴이 무너져 내릴수록, 흑백으로 표현되는 초현실적인 재현된 이미지가 다수 등장하면서, 컬러와 흑백의 이분법적인 경계가 무너지고 뒤섞이기 시작한다. 기록된 영상과 재현된 영상이 혼재되면서, 황실과 민중간의 간극의 틈새도 좁혀진다. 즉 황실이 무너지고, 나라는 민중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변혁을 표상하는 영화적인 방식의 하나의 훌륭한 사례로 남아있다.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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