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9일 브라이언 드팔마의 <분노의 악령> 상영후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시스템 내부의 균열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비전에 대한 감각을 담고 있는 영화만큼이나 흥미로웠던 이날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번 시네바캉스의 ‘이미지의 파열’ 섹션은 70년대 말부터 80년대의 미국 영화들 안에서 시스템적 균열의 양상들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을 꼽았다. 그 중 <분노의 악령>(1978)은 일순위 중 하나였고, 나머지 영화들이 그에 따라 배치됐다고 할 수 있다. ‘시네필의 바캉스’ 섹션의 영화들은 좀 더 일탈적인 영화들로, 그 자체로 작가들이 마치 바캉스를 떠나듯이 휴양하며 찍은 듯한 영화들인데 비해, ‘이미지의 파열’의 영화들은 바캉스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즉물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시스템 내에서 균열을 만들어내는 영화들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이나 시스템의 만족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주면서도 스스로 고유한 파열을 만들어가는 과정 안에서 고군분투했던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오늘 상영한 드팔마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다. 영화 안에는 젊은 시절의 긴장성이나 트라우마, 분노 같은 것들이 있는데, 허무맹랑하지만 한편으로는 놀랍고 가혹한 진실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트라우마를 품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고, 이들은 자신의 힘을 어찌할 바 모른다. 그 힘이 어디서 기원하는가는 모호하지만, 죽음과 관련된 트라우마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컨트롤하려는 집단이 있다. 그것은 국가적인 기관으로 등장하고,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창조력의 엄청난 힘을 컨트롤하려는 집단에 의해 희생당하는 한 명의 젊은이 로빈과 그 과정에서 오히려 아버지를 파괴해나가는 길리언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분노의 악령>에는 비전의 매혹 같은 것이 존재한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투시자들의 삶에 대해 말하는데, 지나간 삶과 다가올 삶, 아주 무한한 우주의 기억을 간직한 세계와 접속해 보게 되는 투시자들의 비전을 길리언과 로빈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드팔마는 그러한 비전을 놀라운 방식으로 이 영화에서 표현하고 있다.

 

 

영화에는 두 개의 스토리 라인이 있고, 이 둘이 얽혀가면서 최종적인 국면에 이른다. 하나는 아버지가 아들 로빈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관계가 파열된 이후에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가는 이야기 안에는 일종의 이상한 미스터리 플롯, 패러노이드 이야기의 형식이 있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미국영화의 상당수가 이런 식의 편집증적인 영화, 음모적 영화라고 불리는 장르 안에 있으며, 그런 맥락 안에 이 영화가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길리언이 염력을 통해 로빈과 교통해가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는 트라우마 혹은 초자연적인 것 못지않게, 일종의 증인, 증언과 같은 연결점이 있으며 이는 앞서 말씀드린 비전을 독특하게 표현해낸다. 과거의 끔찍한 사건을 지켜보는 자로서의 길리언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녀는 이중적 공포를 갖고 있다. 하나는 무언가를 자꾸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텅 빈 극장에 앉아 비어있는 스크린을 지켜보는데, 그 스크린이 뭔가로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 혹은 뇌 속의 무언가가 비집고 나와 스크린에 그대로 투영되어, 마치 영화를 보듯이 사건을 목도하게 되는 그런 공포다. 길리언의 또 다른 공포는 접촉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와 손을 잡거나 만지면 피가 나오게 되기 때문에 그녀는 어머니와의 접촉도 꺼리게 된다. 이러한 모티브들은 <캐리>(1976)와 이면화를 이루며, 더 넓게 보면 <캐리>와 <분노의 악령>, <홈 무비>(1980), <드레스 투 킬>(1980), <블로우 아웃>(1981)이 굉장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분노의 악령>은 원작 소설에서 출발한 것이긴 하지만, <캐리>와의 연속선 안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분노의 악령>에서 아이들이 갖고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국가가 컨트롤하려한다면, <캐리>에서는 어머니가 종교적인 차원에서 고양시키려 한다. 그 억압되어있던 에너지가 영화 후반부에 학교에서 벌어지는 파티에서 폭발하는데, 캐리는 양동이 가득 담긴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서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것은 분할화면의 사용이다. 캐리의 에너지가 자신의 몸의 한계를 넘어서게 될 때 몸 바깥으로 나아가게 되면서 순수한 힘으로 전이된다는 점이 특별하다. 그녀가 쳐다본다든가 손짓을 하면 그 에너지가 곧바로 분할화면의 다른 프레임 안에 파괴적인 힘으로 형상화된다. 하나의 프레임이 갖는 용적의 한계를 넘어서는 에너지가 또 다른 프레임들을 복수적으로 양상하는 특징이 있다. <분노의 악령>에서는 프레임의 경계지대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공존하는, 말하자면 후면영사처럼 표현되어 있는 또 다른 방식의 장면적 전환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캐리>의 분할화면과 <분노의 악령>의 독특한 프레임 배치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사실 <캐리>와 <분노의 악령>이 연결되는 가장 큰 맥락은 <캐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길리언을 연기하는 에이미 어빙은 <캐리>에서는 캐리의 친구로 등장한다. 그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캐리의 무덤을 찾아가는 꿈을 꾸는데, 무덤에서 나온 캐리의 손은 그녀의 손을 붙잡는다. <분노의 악령>에서 길리언이 어떻게 초자연적 능력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 영화에서는 설명되지 않는데, <캐리>와 연관지어 보면, 캐리의 능력을 길리언이 전수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접촉을 통해 트라우마의 기억을 간직하게 된다는 것, 누군가가 죽어가며 분출하는 슬픔과 분노를 그것을 보는 자가 이어받게 된다는 것은 드팔마의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며, 이후에 <드레스 투 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유명한 엘리베이터에서의 살인 장면에서 죽어가는 자와 시선을 교환하고 그녀가 내미는 손을 잡으려는 여자에게 희생자의 마지막 제스쳐, 공포스런 몸짓이 이전되는 과정은 거울을 통해 왜곡된 프레임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드팔마의 영화에 존재하는 접촉과 전수, 이전의 과정들은 달리 말하면 일종의 증인적 행위로서의 보기이며, 이는 드팔마 영화에서의 비전을 특징짓는다. 캐리의 무덤가에서 캐리와 접촉하면서 전수받은 초자연적 에너지가 <분노의 악령>에서는 점차적으로 꿈틀거리며 뛰쳐나오게 되는데, 그런 에너지들을 어떻게 조절해나가면서 장면화 하는지가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든다.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텔레파시 능력을 표현하는 장면인데,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단편적인 이미지들로 등장한다. 그 이미지들은 죽음과 연관되어져 있으며, 하나는 과거를 다른 하나는 미래를 지칭하는 사건이다. 길리언이 계단에서 360도 패닝하면서 보는 것과 후면영사되는 과거의 장면은 시선에 의해 매칭되지 않지만, 그녀의 시선에 의해 점차적으로 과거의 장면을 보는 것 같이 표현된다. 과거는 마치 투사되는 영화의 이미지를 보는 것처럼 설정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과거의 한 순간에 입회되어 있는 듯하다. 그녀는 현재에 있지만 과거를 보고 있고, 과거는 그녀 바깥에 있지만 동시에 과거 안에 그녀가 내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녀가 보게 되는 파편적인 이미지들은 사실상 세계를 이루는 단편들이며, 이 단편들은 전체적인 종합성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각각의 조합들을 통해 비가시적인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지나가버린 과거를 증언하는 것과 비슷한 영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증언한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비전을 경유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분노의 악령>의 한 장면에선 영화를 본다는 설정이 초래하는 공포의 순간이 있다. 로빈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순간을 촬영한 영상을 끊임없이 로빈에게 보여줌으로써 무언가를 본다는 것으로 인해 생기는 트라우마가 로빈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계속 증가시켜나간다. 이 영화에서 본다는 것은 인물들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증가시키는데, 트라우마적 보기의 방식이 초래하는 서로 다른 두 길이 존재한다. 드팔마가 캐리에 이어 로빈에게서 자기파괴적인 상태로 귀결되는 젊은이의 결말을 보여주었다면, 그들과 유사한 설정을 두면서 동시에 거기에서 이탈해나가는 길리언이라는 새로운 젊은이를 둠으로써 또 다른 길을 열었다고 생각된다. <분노의 악령>은 억압된 성인의 질서로 보수화되기 전단계에, 완벽하게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염력, 텔레파시로 표현되는 이들의 능력은 달리 말하면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가시화시키는 능력,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창조성의 능력과도 닮았다. 이 영화에서 국가는 국제적인 기관과 음모에 의해 이러한 젊은이들의 에너지들을 끌어들이고 통제하려고 한다. 이 영화의 쾌감은 젊은이들의 능력을 컨트롤해나가는 세계 안에서 그들의 창조적 에너지를 어떤 방식으로 전환해서 어떻게 그 세계와 싸움을 벌여나갈 것인가를 제시하는 점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시스템 안에서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드팔마의 고군분투의 느낌이 있다. 70년대에 뉴아메리칸시네마의 많은 감독들이 시스템에 투항해 주류적인 영화 안으로 편입되어 갈 때, 드팔마는 굉장히 이상하고 저급한 익스플로테이션한 장르들을 끌어들여 영화를 만든 뉴아메리칸시네마의 별종이었다. 그러 그가 <캐리>나 <분노의 악령>을 통해 주류적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러한 작가들이 갖는 공포와 불안의 느낌이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방식으로 보면 보기의 능력과도 연결된다. 길리언은 내가 보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에 눈을 감는 것이 두렵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본다는 것은 눈을 감음으로써 발생하는 어떤 비전의 과정이다. 눈을 감을 때 어떤 종류의 비전이 열리게 되는가, 이런 새로운 비전이 갖는 힘이 무엇인가를 이 영화는 알레고리처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젊은이들이 에너지를 분출했던 60년대라는 시기를 거친 이후에 영화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세대의 자각 능력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적 보기의 방식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을 두 눈을 감음으로써 바라보는 눈 먼 보기의 방식들, 증인적 보기의 방식들과 대단히 유사하다. 경우는 좀 다른지만 클로드 란츠만은 <쇼아>를 만들면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할 때 맹인의 눈처럼 그것을 지켜본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눈을 찌르거나 눈을 감는 것, 길리언이 로빈의 텅 빈 방을 보는 것과 같은 장면들, 그런 식의 맹인의 우화나 맹인적 보기의 방식은 역사적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새로운 보기의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굉장히 이상한 방식의 공포영화로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맹아적으로 표현되었고, 이는 이후 <드레스 투 킬>, <블로우 아웃>에서 보다 선명하게 표현된다.

 

 

이런 비슷한 시도를 근래 나왔던 영화들 중 토니 스콧의 <데자뷰>(2006)에서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는 감시적 기제를 통해 과거의 한 순간을 들여다보게되는 설정이 있다. 보기의 힘을 강조하고 그 능력을 이용해 테러라는 하나의 트라우마적 사건을 구제해 들어가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에서도 그런 부분을 보여주는데, 두 영화에서 공통적인 것은 인물이 거대한 하나의 거대한 스크린을 마주한다는 사태이다. <데자뷰>의 덴젤 워싱턴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과거의 트라우마를 보게 된다. 그는 언제나 늦게, 죽음 이후에야 도착해서 희생자를 구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과거의 시간 안으로 뛰어들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야기의 설정은 좀 다르지만 이 영화에서, 방대한 양의 기억의 아카이브에 접촉해서 과거의 순간에 뛰어들 수 있다는 것, 스크린을 통해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 생생하게 접촉해 들어가는 설정들은 길리언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안에 접촉해 하나의 비전을 열어가는 행위와 굉장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60년대의 넘쳐났던 에너지들이 서서히 소멸해가던 70년대 중후반에 그 에너지들이 창조적인 에너지로 전환되기 보다는 오히려 트라우마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영화에서 카사베츠가 연기한 칠드레스는 마지막 순간에 길리언에게 눈물을 흘릴 것을 권하고(이는 감정의 착취적 소비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서 자신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라고 말하지만 길리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잠재되어 있던 폭발적인 에너지의 창조적 전환의 실패와 추락, 그로 인한 고통과 비애에 내장되어 있는 에너지를 다시 파괴적인 힘으로 발휘해 들어가는 것이다. 길리언은 국가기관의 수장으로 존재하는 이 아버지의 몸을 완전히 박살내버리는데, 이것을 하나의 알레고리로 본다면 그런 식의 에너지를 영화적인 힘으로써 바꿔나가는 것은 비전의 힘이며 그러한 비전의 힘을 배양시켜나가는 것, 바로 여기에 드팔마라는 감독의 이후로의 방향과 그가 고심했던 바, 그리고 이 영화의 매력이 있다. 사유의 착취, 감정의 착취를 만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주류적인 것일 수 있고, 사회 안에서 보자면 시스템적으로 작동하는데, 새로운 보기의 방식들을 만들어가며 그러한 시스템들을 파열해가는 은유로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이 영화가 나로서는 흥미롭다.

 

정리: 장지혜(관객 에디터) | 사진: 황초희(자원 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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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드 팔마, 희생자의 비명

‘2011 시네바캉스 서울’이 한창인 지난 8월 14일 오후 브라이언 드 팔마의 <드레스드 투 킬> 상영 후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현대성’이란 제목의 영화사 강좌 세 번째 시간이 이어졌다. ‘브라이언 드 팔마, 희생자의 비명’을 주제로 열린 이 날 강좌에는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가 나섰다. 그는 드 팔마는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과감성과 저열함을 끝까지 끌고 온 감독으로 체질적으로 와닿는 부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드 팔마 영화와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현대성에 대한 흥미로운 지점들을 여기에 옮겨 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보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무엇인지를 따라가게 만들고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텔레비전으로 중학생 무렵에 봤었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과 <태양은 외로워>가 그런 작품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 보신 <드레스드 투 킬> 같은 류의 영화로, 고등학교때 보았다. 일종의 체질적으로 몸에 와닿았던 영화다. 영화의 리듬 자체가 몸에 딱 달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개인적으로 아메리칸 뉴 시네마 감독 중에 체질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콜세지 역시 뛰어나지만 체질적으로 몸에 달라붙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작가들보다 드 팔마를 좋아하는 건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일종의 B급스러운 저급함 때문인 것 같다. 오늘 이 영화를 보면서는 마지막에 리즈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때 했던 말들의 상당수가 드 팔마의 심중을 대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굉장히 더러운데 너는 내게 매력을 느끼냐’는 식의 말이다. 일종의 도발로, 드 팔마가 자신의 영화로 사람들에게 했던 도발과 비슷한 뉘앙스로 느껴졌다. 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감독들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정할지를 두고 고민하게 되는데, 이들은 주로 두 가지 경향을 보였다. 보통의 경우는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추구하는 제작방식을 따라가면서 스스로가 갖고 있던 60년대적인 모던한 경향들을 추가해가며, 일종의 고급화를 해가는 방식을 택한다. 드 팔마의 경우, 똑같이 상업적인 세계로 들어가려 했고 <캐리>나 <퓨리> 이후에 실제로 그런 세계로 진입하기도 했지만,당시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저열하게 평가되던 하위성들을 끌어당기며 나아갔다. 저급함과 하위성을 정치적 함의가 담긴 언더그라운드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팜므 파탈>을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과감성과 언더그라운드 성격을 이렇게 까지 끌고 온 사람은 드 팔마가 유일하다는 생각이다.

<드레스드 투 킬>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양산했으며 영화가 개봉했을 때 페미니스트들의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몇 가지 지점들이 있다. 드 팔마로서는 80년대에 들어 나름대로의 전략을 세웠던 첫 번째 작품이다. 전략이라는 건 이 영화가 왜 히치콕의 영화를 가져왔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드 팔마가 히치콕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할리우드 고전영화 세계 안에서 끌어올 가장 적절한 대상을 히치콕으로 설정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히치콕 정도의 작가를 자신의 영화 안에 가져오면 비판이나 비난을 받을 위험이 조금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히치콕을 완전히 패러디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령, 이 영화에서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살인 장면에서 볼 수 있다. 드 팔마 영화에는 언제나 살인이 등장하며 그 장면들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는데, 첫 번째는 특징적인 도구를 사용한 살인이라는 점이다. 총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를테면 <바디 더블>에서는 드릴이, <스카페이스>에서는 전기톱이, <자매들>에서는 식칼이, <드레스드 투 킬>에서는 면도칼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도구성, 어떤 것이 매개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도구들 때문에 살인의 시각적 표상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비교해보자면, 칼의 종류는 다르지만 <싸이코>의 살인 장면에서도 <드레스드 투 킬>과 마찬가지로 칼로 여자를 찔러서 살해한다. 그러나 <싸이코>에서는 실질적으로 몸에 상처를 만들지는 않는다. 직접적인 피부 손상을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60년대 무렵까지만 해도 미국영화에서 신체 손상이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드 팔마의 경우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몸에 대한 손상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살해되는 순간의 시각적 표상성의 변화들을 만들어 간다. 다시 말해 편집이나 미장센의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살인 시퀀스에서 면도날에 의한 손상은 몸의 상처뿐만 아니라 필름의 프로세스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또한, 드 팔마 영화의 살인 장면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언제나 살인에 증인이 입회한다는 점이다. 드 팔마의 모든 영화들, 특히 오늘 보신 <드레스드 투 킬>에서 살인과 관련된 모든 장면에는 살인자와 피해자 외의 제 3의 인물이 입회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일종의 꿈 시퀀스는 정신병자 같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 엘리베이터 살인 시퀀스에는 리즈가 입회해있고, 기차에서의 살인 시퀀스에도 여러 명의 흑인들이 있다. 이는 굉장히 흥미로운 점이다. 살인 장면을 살인자-희생자-관객의 3자 게임으로 구성하지 않는 것이다. 그랬을 경우에 발생하는 감각적인 쾌락을 증인을 경유해 비켜가고 있는데, 여기에는 드 팔마라는 감독에게 영화사적 영감을 준 역사적 건들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그가 언제나 스스로 이야기 하는, 드 팔마의 영화를 특징짓게 된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첫 번째는 베트남전이다. 드 팔마는 베트남전 반전 투쟁의 기운이 있었던 시기에 영화를 시작했던 베트남의 자식이다. 실제로 초기 드 팔마 영화는 굉장히 정치적이었으며, 그가 실질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작가는 고다르다. 물론 안토니오니나 혹스, 히치콕 등을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드 팔마와 고다르를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은 영화사적으로나 시기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정치적인 암살들, 특히 존 F 케네디의 암살이다. 특히 JFK의 암살이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단순히 사건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사건 자체가 미디어를 경유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JFK의 암살 순간은 소리도 없는 8mm 영상으로 촬영되었다. 나중에 파솔리니 역시 이 제프루더 필름에 대해 이야기한 바이지만, 사람의 죽음의 순간이 필름에 기록되었으며 그것은 심지어 한 테이크인 롱테이크이다. 그러나 그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컷들이 필요하게 된다. 이해하기 위해서 그 장면을 분석해야 하는데, 그 분석의 도구로서 영화적 도구들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은 몽타주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나중에 <블로우 아웃>에서 명백히 볼 수 있으며 동시에 <드레스드 투 킬>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고 있다.

<드레스드 투 킬>은 결국 드 팔마 자신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피터라는 인물은 드 팔마와 거의 동일 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인물을 통해 드 팔마가 이 영화를 만들 즈음의 정신사가 어떠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  피터는 일종의 발명가로, 드 팔마 역시 뭔가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창조하려 했던 사람이고, 스스로 명칭을 정할 수 없는 영화들을 만들어 내었다. 극 중에서도 피터가 기계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있자 어머니가 ‘이름은 붙여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는데, 그 때 피터는 그 기계에 피터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부분은 드 팔마의 자의식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드레스드 투 킬>은 드 팔마가 연출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전권을 구사한 첫 번째 영화였기 때문에 그의 자의식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피터는 자신의 발명품에 스스로의 이름을 붙여줌으로서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는데, 이를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더블로서 기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드 팔마는 영화에서 언제나 더블을 만들어 낸다. <바디 더블>, <캐리>, <퓨리> 모두가 그 예라고 볼 수 있는데, <드레스드 투 킬>에도 수많은 더블들이 존재한다. 피터와 리즈의 대화 장면에서 피터는 ‘컴퓨터 만드는 것을 중단하고 내 안에서 여자를 한 명 만들어야겠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여자를 창조한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 드 팔마가 보여주는 더블의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엘리엇과 바비 간의 더블 관계는 히치콕의 <싸이코>에서 빌어 온 것이기 때문에 드 팔마 스스로 창조한 부분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고로 그 둘 간의 더블 관계에 집중해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해석했을 때 <드레스드 투 킬>은 단순한 <싸이코>의 재탕이며 드 팔마는 뛰어나긴 하지만 결국 히치콕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메리칸 시네마의 작가 정도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안이하다. 이 영화에는 그외에도 수많은 더블들이 있으며, 이들을 다 연관 지어 전체적인 영화를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 해보면, 먼저 피터는 드 팔마의 구현체로서 더블을 이루고 있고, 극중에서 자신이 만든 기계와도 더블을 이루고 있다. 이는 영화를 만드는 작가의 무의식과 영화 이미지 간의 더블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드 팔마는 지속적으로 이런 관계를 영화에 등장시키곤 한다. 또한 케이트는 당연히 리즈와 더블을 이루고 있다. 이 점 또한 <싸이코>와 다른데, <싸이코>에서 마리온과 그 여동생이 일종의 짝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여동생의 존재성은 미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케이트에서 리즈로 전이되는 과정이 굉장히 중요하며, 이는 엘리베이터 시퀀스가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살해당하는 케이트가 내미는 손을 잡는 또 다른 손이라는 설정은 리즈가 단순히 하나의 목격자를 넘어서 케이트의 더블로 형성됨을 보여준다. 동시에 리즈 역시 더블을 갖고 있다. 이런 수많은 관계들을 통해 반복되는 장면들이 나타나며, 영화가 전체적으로 순환성을 갖게 되기도 한다. 결국 이 더블이라는 부분들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읽어나가는가, 또 더블의 관계가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된 피터라는 인물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부분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또한 <캐리>에서부터 기원한 영화들의 궤적에서 보자면 일종의 홈무비다. 즉, 가족에 관한 영화라는 말이다. 이 영화 바로 직전에 드 팔머는 <홈 무비>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리즈와 피터가 함께 하는 것, 이 둘의 결합은 중요하다. 리즈는 악몽 속에서 깨어나 비명을 지르는데, 그 순간 피터가 달려온다. 앞서 말했지만, 영화의 카메라는 소리를 담아내지 못한다. 거기에는 영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케네디의 죽음의 순간을 담아낸 영상도 마찬가지로 소리는 담겨있지 않다. 비명소리를 담아내는 것, 그것이야 말로 드 팔머가 추구했던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의 마지막 말은 이 영화와도 연결된다. '폐허를 보며 괴물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통의 절규에 귀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희생자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는 한 역사의 끔찍한 사건은 반복될 것이다. 드 팔머는 다음 영화로 <블로우 아웃>을 만들었고, 거기서 녹음기사인 존 트라블타는 희생자의 비명소리를 영상에 넣게 된다. 물론 그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미국의 초상이다.

(정리: 박예하)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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