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밍량의 행자혹은 만주장정연작에 대하여

 

차이밍량의 행자연작은 현재진행형이다. 붉은 법의를 입은 맨발의 승려가 침사추이, 타이페이, 마르세유, 동경 등 도심을 아주 느린 걸음으로 가로지르는 여정을 변주한 연작이다. 차이밍량은 현장 법사의 천축국 순례를 영화화하는 시대극을 염두에 뒀었지만 이 계획을 변경해 2012년부터 꾸준히 연작을 발표하고 있다. 차이밍량은 행자보다 慢走長征(만주장정)”이란 표현을 사용한다고 한다. 영화에만 머물지 않고 행위예술로 발을 내디딘 행자연작은 지금까지 다섯 편이 국내에 소개 및 상영, 공연이 이뤄졌다. 전시, 연극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차이밍량의 도전을 자극하고 있는 행자연작을 구성하는 총 8편의 중, 단편영화 그리고 무대극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무색(無色)>, <행자(行者)>, <금강경(金剛經)>, <몽유(夢遊)>(2012)

 

행자연작의 문을 연 <행자>(27)는 중국의 동영상 공유 사이트 ‘YOUKU’가 제작한 옴니버스 영화 <뷰티풀 2012>를 구성하는 4편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다. 이 영화에서 홍콩의 침사추이를 배경으로 붉은 법의의 승려로 분한 이강생은 고개를 수그린 채 양손에 각각 빵과 다른 먹거리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걸어간다. 맨발이 땅으로부터 떨어져 온전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데 20초 이상이 소요되는 승려의 도보는 그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빠르게 보일 정도로 비교된다. 한편, 사람들은 멈춰 서서 승려를 둘러싸고 그의 도보를 구경하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외진 공간에 이르러서야 승려는 비로소 빵을 한 입 베어 문다.

<행자>보다 앞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무색>(2012, 20)에서 승려는 두 개의 공간을 넘나든다. 그는 대만의 도심에서 군중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한편, 미로에 가까운 순백의 공간을 걸어 다닌다. 2012년은 행자연작의 작업이 양적으로 가장 활발한 시기이기도 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상영된 바 없는 <금강경>(2012, 20)<몽유>(2012, 20)<행자>와 함께 僧人行走三部曲(승인행주삼부곡)’으로 불리기도 했다. 두 단편은 201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한 대만관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으며, 대만관이 조성한 “Architect/Geographer: Le Foyer de Taiwan” 전시를 중심으로 극 중 붉은 법의의 승려가 전시 공간을 걸어 다니면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켜 대만의 풍경과 지리를 예찬한다.

 

<무색><천교는 보이지 않는다>(2002) 상영 후 차이밍량과의 대화

https://www.youtube.com/watch?v=m-7Jt4-1i_c

 

<물 위 걷기(行在水上)>(2013)

 

미얀마,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에서 태어난 6명의 감독들이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 <남쪽에서 온 편지>(2013)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물 위 걷기>(2013, 30)는 차이밍량의 고향, 말레이시아 쿠칭을 조명한다. 붉은 법의의 승려는 차이밍량이 태어나고 자란 쿠칭의 주택가를 중심으로 복도와 계단을 느리게 걷는다. 카메라는 승려의 발밑에 놓인 웅덩이에 고인 물에 비친 이미지를 주목한다. <물 위 걷기>는 홍콩과 대만의 도심과 다른, 원시와 도시 문명이 공존하는 쿠칭의 풍경과 더불어 차이밍량의 유년을 공유할 수 있는 가장 사적인 단상이자 명상이다.




 

<서유(西游)>(2014)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승려의 느리게 걷기는 계속 된다. “행자연작의 주된 모티브가 서쪽으로 여행을 떠나는 승려의 순례라는 점을 상기하면 <서유>(2014, 56)행자연작 가운데 가장 큰 변화를 보여주면서도 하나의 방점이 되는 영화다. 단지 아시아에서 서구로 수행의 무대가 되는 지역의 성격이 변화를 겪을 뿐만 아니라 전작에서 오롯이 붉은 법의의 승려만이 집중했던 느리게 걷기를 지켜보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강생이 연기하는 승려가 아닌, 드니 라방의 얼굴에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동굴에 가까운 지하 공간으로부터 마르세유의 거리로 향하는 승려의 발걸음과 화면 절반을 차지하는 드니 라방의 측면 얼굴을 번갈아 보여준다. 두 인물과 무관해 보이는 장면에서 거울에 비치거나 창 밖 너머로 승려는 계속 걷고 있다.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롱 샷으로 현저한 대비를 이루며 분리돼 있던 두 인물의 시공간은 마르세유 투어 버스가 지나가면서 하나가 된다. 드니 라방은 승려의 보행을 단지 지켜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움직임을 모방한다.

 



 

<노 노 슬립(無無眠)>(2015)

 

2012년에 이어 다시 기획된 <뷰티풀 2015>을 통해 발표된 <노 노 슬립>(2015, 35)에서 붉은 법의의 승려는 아시아로 돌아와 동경에 도착한다. 하지만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이 영화는 그 동안 행자연작에서 집중했던 승려의 보행으로부터 눈을 돌려 승려가 화면에 없는 도심의 인파, 지하철 유리창 밖 야경,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있는 젊은 남성의 나신 등에 초점을 맞춘다. 수많은 군중 사이에서 느린 걸음걸이가 구경거리가 되거나 비교가 되던 승려는 지하철 근교의 외진 육교 위를 홀로 걸으며, 목욕탕에 이르러 수행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낯선 모습을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이로 인해 이목을 끄는 대상은 안노 마사노부의 육체다.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사우나를 들어갔다가 목욕을 마치고 나선 분주한 젊은 남성의 움직임과 비교했을 때, 붉은 법의를 벗어놓은 승려는 망중한을 즐긴다. 캡슐 호텔에서 온 몸을 뒤척이며 한참을 잠들지 못하는 젊은 남성의 불면 뒤에 등장하는 승려의 숙면은 달콤해 보인다. 이는 <행자>의 마지막 장면을 상기시킨다.

 



 

<당나라 승려(玄奘)>(2014)

 

<행자>를 시작으로 매년 꾸준히 행자연작이 발표되는 가운데 작년 가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공개된 <당나라 승려>(2014)는 스크린을 벗어나 무대극으로 진행됐다. 붉은 법의를 착용한 승려는 이 공연에서 불경을 찾아 천축으로 향했던 당나라 승려, ‘현장법사의 이름을 부여 받는다. <무색>의 백색 공간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도화지 위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현장은 그가 잠든 사이, 검은 옷의 화가 카오 준혼이 목탄으로 그려 넣은 선들을 따라 전작에서 보여준 느린 걸음으로 도화지 위를 慢行(만행)’한다. 스크린에 국한되지 않는 행자연작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지난 2015,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과 두산아트센터의 공동 기획으로 마련된 컨템포퍼리 토크에 참여한 차이밍량은 예술가의 동시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아래 정성일 평론가와 나눈 대담에서 "행자" 연작을 언급했다. 아래 첨부한 동영상에서 위 연작의 작업을 추동하는 느림에 대한 차이밍량의 생각을 그의 유려한 화법과 함께 들어볼 것을 권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전히 끝나지 않은 "행자"의 여정은 앞으로 어떤 시도와 변화로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그 전에 이번 "2016 대만 영화제"에서 행자의 궤적을 경험하거나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참고

아시아예술극장 & 두산아트센터 기획 컨템포러리 토크:

차이밍량, 정성일 대담 중 느림, 만행” https://www.youtube.com/watch?v=t20Ign2cxlA

 

아시아예술극장 & 두산아트센터 기획 컨템포러리 토크: 차이밍량, 정성일 대담(풀 버전)

https://www.youtube.com/watch?v=extoc7iLv10

 


권세미(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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