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 개막작 소개: 영화를 사랑한 영화

-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

 

 

 

 

 

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개막작은 관객들의 선택작이기도 한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이다. ‘영화를 사랑한 영화들’이란 주제의 10편의 작품들 가운데 관객들이 최종 선택한 작품이기도 하다. 고다르의 <경멸>, 버스터 키튼의 <카메라맨>, 페데리코 펠리니의 <8 1/2>을 제치고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다. 영화 관람이 대중적인 오락거리이자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영화관을 가던 1930년대 대공황기를 배경으로 한 유쾌하면서도 통렬한 사랑이야기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떠오를 때 우리 귀에 들려오는 것은 뮤지컬 영화 <톱 햇>(1935)에서 프레드 아스테어가 부르는 노래 “칙 투 칙(Cheek to Cheek)”이다. “천국에, 나는 천국에 있어요”라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이 노랫말은 아마도 <카이로의 붉은 장미>의 여주인공 세실리아(미아 패로)가 영화를 볼 때의 기분과 같을 것이다.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콤비가 출연했던 <톱 햇>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얼어붙은 관객들의 마음을 달래주었고, 세실리아 역시 그런 관객들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1930년대 뉴저지에서 시작한다.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세실리아는 실직한 남편의 구타와 음주, 외도에 못 견디고 집을 나선다. 그런데 직장에서의 잦은 실수 때문에 결국 해고당하고 만다. 앞길이 막막해진 세실리아는 눈물을 훔치며 늘 그랬듯 극장으로 향해 영화 속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관람한다. 그때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난다. 세실리아가 좋아하는 영화 속 캐릭터인 톰 벡스터(제프 대니얼스)가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와 말을 걸고,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감독 우디 앨런은 영화 속 허구의 인물이 현실세계로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긴급한 상황에서 닥치는 대로 잡아탄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고, 조명은 로맨틱한 순간에 알아서 꺼져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는 영화와 현실이 같은 세계에서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하지만 영화와 현실의 양립불가능성이 현실 앞에서 영화가 쓸모없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정을 불어넣어 현실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세실리아는 남편에게 얻어맞는 벡스터를 보고 소극적이었던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대항한다.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해지는 건 영화와 현실의 중간 단계, 즉 톰 벡스터를 연기한 배우 길 셰퍼드가 개입하면서부터다. 그는 자신의 복제인간이 영화 밖으로 튀어나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할리우드에서 곧장 뉴저지로 달려온다. 셰퍼드는 세실리아에게 사랑 고백을 하면서 벡스터와 자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요구한다. 세실리아는 벡스터가 아닌 현실에서 살아가는 셰퍼드를 택한다. 허구와 현실 가운데 허구를 선택하는 일은 우디 앨런의 말을 빌자면 ‘정신 나간 짓’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을 선택한다는 것은 ‘상처를 받는 것’이기도 하다. 셰퍼드는 혼자 할리우드로 떠나버리고 세실리아는 버림받는다. 그녀는 다시금 허구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즉 극장으로 향한다. 우디 앨런은 영화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낙관도,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냉소도 하지 않는다. 다만 스크린을 응시하는 세실리아의 얼굴을 우리로 하여금 마주하게 만든다.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세실리아의 표정은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보는 우리의 표정과 닮았다. 영화와 현실이 서로를 거울처럼 마주보는 통렬한 순간이다.

 

송은경 /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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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의 영화 중 제대로 본 것은 지난 해 시네마테크의 <와이드스크린영화특별전>에서 본 <맨하탄>이 유일하다. TV에서 간혹 방영해 준 우디 앨런의 영화는 집중해서 본 적이 없는 것 같고, 그의 영화에 대해서는 오며가며 들은 얘기들을 통해 알고 있는 게 전부였다. 우디 앨런 영화는 내게 약간은 유머러스하고 지성에 대해 조롱하는 태도를 보여주며 영화 속에 나오는 우디 앨런이 수다스럽다는 정도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올해 시네바캉스 개막작이었던 <또다른 여인>을 상영하기에 앞서 프로그래머는 “영화가 다소 ‘시리어스’할 테니 준비된 맥주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 드시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 속에 점점 몰입해가면서 내가 생각했던 우디 앨런 영화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진지하고 사려 깊은 영화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난 후 극장로비에서 만난 친구들은 하나같이 영화가 너무 좋다고 말했다. 감흥에 젖은 채로 그들과 영화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혼자서만 더 흥분한 채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수다를 떨었던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아려왔다. 생각 외로 진지하면서도 감동적인 영화는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해서 마음을 흔들어놓기도 했다.


베르히만의 <산딸기>에 오마주를 바쳤다고 하며, 혹은 <페르소나>의 우디 앨런식 버전이라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서 베르히만의 영화와 이 영화의 다른 느낌들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다. 성공한 인물의 이면과 과거의 아픔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산딸기>와 <또 다른 여인>의 이야기 구도는 비슷하다. 또한 인물의 다른 이면을 ‘또 다른 자아’를 등장시켜 보여준다는 점에서 <페르소나>와의 유사성이 보인다. 하지만 <산딸기>나 <페르소나>는 약간은 무거운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인간관계나 자아의 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인물들의 대사나 표정은 차갑고 때론 공포스러운 측면이 있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있는 영화 속 이미지들은 상징적이고 모호하다. 이에 비해 <또다른 여인>은 심각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세심하고 따뜻한 배려가 느껴지는 영화다. 인물에 얽힌 과거와 숨겨진 이면은 모호하거나 상징적이지 않고 대사나 내레이션을 통해 직접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강약과 밀도를 적당히 잘 조정해서 과거와 숨겨진 이면에 차근차근 조심스레 접근해가고 있다. 그 과정은 그녀의 분신과 같은 ‘또 다른 여인(미아 패로 분)’이 정신분석 상담의에게 털어놓는 삶의 고통에 그녀가 깊이 귀 기울이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 무엇보다도 지나 롤랜즈의 빛나는 표정연기는 그녀가 관계의 진실과 자신의 상처에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충격과 고통을 절절하고 실감나게 보여준다. 매끄럽고 담담하면서도 밀도와 강도를 더해가는 영화의 전개방식은 그녀의 감정의 변화와 조응해가면서 지켜보는 관객도 그녀의 삶을 돌아보는 데 함께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듯하다.

<또다른 여인>의 첫 장면은 <산딸기>의 첫 장면에 대한 오마주로 시작된다. 마리온 포스트의 내레이션을 통해 보이는 사진 속에 있는 인물인 현재의 남편, 남동생, 아버지, 그리고 현재의 남편의 딸과의 관계에서 숨겨진 진실들이 드러난다.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또 다른 여인’의 등장은 그녀가 관계의 진실과 마주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의 숨겨진 내면을 살피면서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 있게 한다. 과거의 단짝이었던 친구 클레어와의 만남과 오랜 전 이혼한 첫 번째 남편과의 기억은 그녀의 잊힌 과거와 상처를 돌아보게 한다. 마리온을 둘러싼 이러한 인물들과의 관계가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그녀의 사회적 자아의 가면(페르소나)도 한 꺼풀씩 벗겨진다. 속마음을 숨기고 감정이 메마른 채로 오래도록 살아온 마리온의 삶은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기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하게 된다. 마리온 포스트(지나 롤랜즈 분)는 50세의 성공한 여대 철학과 학과장으로 재혼한 남편의 딸과도 잘 지내는 등 별 다른 문제없이 평온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것은 책을 집필하기 위해 얻었던 집의 벽 너머로 들려오는 한 여인의 고통스럽고 애절한 목소리였다. 벽에서 맨 처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을 때의 지나 롤랜즈의 표정은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여성의 두렵고도 고통스런 모습을 절절히 보여준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가운데 촉촉이 젖어 들어간 두 눈, 입술에 일어나는 경련, 목 근육의 움직임, 떨구어진 고개 등 그녀의 표정과 제스처는 보는 이의 가슴을 흔들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다. 카메라는 그녀의 모습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는 듯하다. 결혼생활에 대해 회의하며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는 바로 마리온 자신의 심경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마리온이 문틈으로 엿본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30대쯤 되어 보이는 임산부였다. 이때부터 마리온은 ‘또 다른 여인’의 삶 속으로, 동시에 자신의 숨겨진 또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날 저녁 파티에서 이제 막 50줄에 접어든 마리온과 그녀의 친구들이 주고받는 말들은 마리온을 비롯한 그들의 현재 삶의 허망함을 엿보게 한다. 특히나 섹스에 관한 농담들은 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점잖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벽 너머에서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를 들은 그 날 이후 그녀가 잘 몰랐던 관계의 진실들이 하나 둘 드러난다. 남동생인 폴과 이혼하려는 올케는 남동생이 마리온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녀에게 전한다. 우디 앨런은 그녀를 둘러싼 관계의 진실과 그녀의 감춰진 내면을 보여주는 방식을 다양하게 시도하는데, 마리온의 회상을 통해, 앨범 속 과거로 들어가서, 옛 친구를 등장시켜서, 그리고 꿈속에서의 연극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우선 그녀의 회상장면. 옆방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더 한층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는 결혼 전에 남편 집에서 했던 파티를 떠올린다. 그날 남편 친구인 래리 루이스는 그녀에게 끈질기게 구애를 해 왔지만 거절했다. 래리는 그녀가 머리로만 사랑하려 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남편의 전 부인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 켄이 보여준 위선적인 태도를 비난하기도 했었다. 현재 남편의 딸과 함께 아버지의 집을 방문한 마리온은 앨범을 들여다보다가 또 다른 자신의 과거와 대면한다. 앨범 사진을 통해 과거로 들어간 카메라는 동생인 폴과 아버지가 다투는 장면을 보여주며, 마리온은 그 과거로 들어가 폴에게 말을 걸고 있다. 거기서 드러나는 진실은 그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아버지가 폴에게 취직을 강요했다는 점이다. 이 장면은 그녀가 회상한 장면은 아닌 듯한데, 그녀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장면인 듯 보인다. 폴과 아버지가 다투는 장면을 그녀가 실제로 본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도 무의식중에 그것을 은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집으로 돌아온 마리온은 ‘또 다른 여인’을 발견하고 무작정 그녀를 쫓아간다. 그녀가 사라지고 없는 자리에 그날 앨범을 보며 떠올렸던 친구인 클레어가 우연히 나타난다. 클레어는 자신의 남편이 마리온과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를 비난한다. 그녀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유혹하려 했기에 그녀와 절교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단짝친구라 여겼던 클레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심란해진 마리온은 어머니가 읽던 릴케 시집을 읽는다. 그녀는 16세 때 릴케의 <표범>이란 시를 읽고 죽음의 이미지에 관해 글을 썼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눈물자국이 남겨진 페이지에서 인상깊은 한 구절을 읽는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을 때 삶은 변화해야만 한다.”

다음 날도 그녀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그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음이 심란해진 그녀에게 세 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녀의 관계의 진실과 내면에 숨겨진 비밀의 열쇠가 되는 이미지들이다. 하나는 우리에 갇힌 검은 표범의 이미지, 또 하나는 라 지오콘다의 가면, 또 다른 하나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희망1>이라는 그림이다. 이어 그녀는 그동안의 그녀의 삶, 혹은 사회적 자아의 가면을 쓴 그녀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현재 남편의 딸이 그녀에 대해 했던 말을 떠올린다. 로라는 남자친구와 집에서 정사를 벌이다가 들켰고, 마리온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면서 남자친구에게 말한다. “그녀가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만 매사에 사람을 판단하며 사람을 내려다본다. 남동생에 대해 하는 말도 그렇다. 내 자신이 마치 싸구려로 취급받게 될 것 같다.”고 말한다. 매사에 도덕적이고 지성적이며 점잖은 마리온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 길로 마리온이 남동생을 찾아가 알게 되는 진실은 자신이 남동생이 쓴 글에 대해 너무나 정직하게 비판함으로써 그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이다. 한편, 마리온은 레스토랑에서 만난 과거의 제자였던 한 여성에게는 그녀의 삶을 변화시켜 주었던, ‘윤리와 도덕적 책임의식’에 대해 너무나도 멋진 강의를 했던 철학과 교수로 기억되고 있다.

하나둘씩 관계와 자신의 이면을 확인하게 된 그녀는 꿈속에서 관계와 과거에 대해 보다 직접적이고 선명한 진실과 마주친다. 꿈에서 그녀는 옆방 정신과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정신분석 상담의는 ‘또 다른 여인’에게 그녀가 인류애, 도덕 등 추상적인 가치에만 관심이 있고, 정작 자신의 삶을 돌볼 줄 모른다고 말해준다. 상담을 받으러 등장한 아버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살았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게다가 남동생 폴에게 잘해주지 못하고 마리온에게는 너무 몰아 부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꿈 장면에서 마리온은 친구인 클레어, 지금의 남편 켄, 래리 루이스, 그리고 오래 전에 이혼했던 첫 남편 샘이 등장하는 연극을 지켜보고 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그 모든 장면을 ‘또 다른 여인’이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래리와의 대화를 통해서는 놓쳐버린 사랑에 대한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녀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가장 끔찍한 진실이 드러난다. 전남편은 마리온 때문에 숨이 막혀서 ‘질식사’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학창시절에 교수였던 샘의 학식을 존경하고 흠모하여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그가 떠올린 기억 속에서 마리온은 샘에게 라 지오콘다 가면을 선물했고, 마리온은 그 가면을 쓴 채로 남편과 키스를 했다. 마리온은 이 과거를 떠올리며 사회적 자아로서 성공하기 위한 자신의 욕망이 반영된 그 가면의 상징적 의미를 찾아냈을 것 같다. 그때부터 그녀는 이미 가면을 쓰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다음날 남편의 결혼선물을 고르려다 들어간 골동품가게에서 ‘또 다른 여인’이 구스타프 클림트의 <희망1>을 바라보면서 울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울고 있는 그녀를 달래며 그 그림이 낙관적인 내용이라고 말하다가 그녀와 식사자리를 갖게 된다.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부터 그녀에게 이끌렸던 마리온은 자신의 마음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전 남편 샘과의 결혼생활에서 아이를 유산한 일을 이야기한다. 샘은 그녀에게 감정이 메말랐다며 비난하고 고통스러워했었다. 그녀는 자신의 학문연구를 위해 아이를 유산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그녀는 집필실에 갔다가 옆방에서 들려오는 그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는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이지만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사는 여인. 그 여자 나이가 돼서 텅빈 내 인생을 보고 싶지 않다”고 그녀는 말한다. 게다가 그녀는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그녀의 지금 남편이 바람피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말을 전한다. 그녀의 나레이션이 들리는 가운데 그 장면이 스크린 속에 보인다. 마리온은 가슴이 찢어질 듯한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무너져 내린다. 그녀의 과거와 관계의 진실이 한꺼풀씩 벗겨지다가 마지막에 들은 충격적인 이 말을 끝으로 그녀는 지금의 남편과의 관계도 정리하며 남동생 폴을 찾아가 화해하고 남편의 딸에게도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고 말한다. 정신과 상담소를 찾아가 그 여인을 찾지만 그녀는 주소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집필실에서 마음을 진정하고 글을 써내려가던 마리온은 자신을 사랑해 준 래리가 쓴 소설에서 헬렌카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담긴 부분을 읽어내려간다. 거기에는 그녀와 래리의 한 때의 열정적이고 아름다웠던 사랑의 순간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녀는 소설을 읽고 나서 추억을 정리하며 처음으로 평온한 마음을 느꼈다고 말한다. ‘우리 속에 갇힌 검은 표범’과도 같았던 그녀가 사회적 자아의 가면을 벗고 비로소 잃어버린 ‘감정’을 되찾았다. 영화 내내 심각한 표정으로 상처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아프게 파헤쳐가던 지나 롤랜즈의 표정이 처음으로 평안해진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러닝타임이 비교적 길지 않았다는 데 적잖이 놀랐다. 짧은 시간에 지나 롤랜즈를 지켜보면서 그녀와 함께 아파하면서 내면의 여행을 함께 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지나 롤랜즈가 짧은 시간에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도 놀라웠다. 아마도 그녀가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 있었기 때문이라 짐작해 본다. 자신의 내면을 대변하는 듯한 그 여인의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꿰뚫지 않았다면, 그녀가 그 상처에 반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영혼에 비수를 꽂는 강렬한 상처로 마음이 할퀴어진 듯한 여인의 표정을 지나 롤랜즈만큼 잘 표현할 수 있는 여배우가 있을까 싶었다. 그녀의 제스처와 표정은 그 너머의 영혼을 통해 가면 뒤에 감춰진 삶이 드러나는 순간의 깊은 상처와 고뇌를 엿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비교적 길지 않은 상영시간 동안 한 여성의 삶의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은 영화만이 가진 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유달리 <또 다른 여인>을 보면서 과거와 현재, 꿈의 세계, 얽힌 관계들, 그리고 인물의 이면들을 동시에 펼쳐 보여주는 영화만이 지닌 힘이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지나 롤랜즈가 한 때의 아름다운 사랑의 순간을 추억하며 평온한 마음을 되찾게 해 준 감독의 배려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비록 그녀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지만,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고 난 뒤에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표현하고 나누는 일이 쉽지 않은 현실의 부박한 삶에서 영화가 그 현실을 대신해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관계와 사랑의 문제에 마음이 허덕일 때 이 한 편의 영화는 가끔씩 읽게 되는 심리치유 에세이보다 더 마음을 위로해줄 것 같다. 우디 앨런이 사려 깊은 연출로 내면 여행을 안내하고 있고, 지나 롤랜즈의 표정연기가 마음을 울리기 때문이다.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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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호 2010.08.05 23: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