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엘리아 카잔의 <에덴의 동쪽>


<에덴의 동쪽>(1955)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 영화에서도 등장인물인 보안관 샘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카인은 아벨을 죽인 뒤 여호와를 떠나 에덴의 동쪽에 있는 놋으로 갔다고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자막을 통해 이 작품의 지리적 배경이 사리나스와 몬터레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그렇다면 아담 트라스크(레이먼드 매시)의 농장은 에덴이고 아담을 떠난 케이트(조 반 플리트)가 바를 운영하면서 타락한 삶을 살아가는 몬터레이는 놋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착한 아론(리처드 다바로스)은 아벨, 비뚤어진 칼(제임스 딘)은 카인이라고 봐도 될까? 아마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에서는 케이트와 아담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좀 더 상세하게 다뤄진 것 같은데 영화에서는 아론과 칼 형제의 성장 이후가 시간적 배경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런 까닭으로 영화만 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가령 케이트의 자신의 손에 대한 콤플렉스 같은 것.

영화의 초반을 보면 분위기를 굉장히 잘 잡아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케이트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지 의심하는 칼이 그녀를 미행하고 있는데, 칼이 어떤 이유로 그녀를 쫓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살아나는 것은 단순히 칼이 그녀를 쫓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위의 미장센 또한 이에 일조한다. 마치 그녀를 포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녀의 화려한 초록색 옷차림과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평범한 옷차림 및 색상의 대비,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주위의 시선들. 이 시선들 가운데로 칼이 파고들어온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적대당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타락한 술집여자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남편을 버리고 달아났기 때문인가? 이후 영화는 가족 사이의 애증이 폭발하는 드라마로 전개된다. 영화 초반부의 미행 장면뿐만 아니라 애브라(줄리 해리스)와 어울리지 말라는 아론의 비난을 듣고 나무 뒤에서 걸어 나오는 그림자에 뒤덮인 칼의 모습, 그로부터 시작해서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를 대면하게 되는 바 장면은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미스터리한 분위기와 내용, 영화의 톤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에덴의 동쪽>을 이야기할 때 제임스 딘을 빼놓을 수 없는데, 영화 초반에 그는 항상 화면의 주변부에서 주위 사람들 곁을 얼쩡거린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주위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지만 자신은 너무도 어둡고 초라한 데 비해 주위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기 때문에 그들을 보고 있으면 그렇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는 사람들. 관심을 주고 사랑을 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냥 달라고 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과장하거나 내심 바라는 것과는 반대로 엇나가게 된다. 영화 초반부에서 제임스 딘은 그런 인물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특히 기차 위에서 자신의 옷을 구속복 삼아 몸을 옥죄는 그의 연기는 그런 인물의 내면의 고통을 탁월하게 육화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성이 아니라 그 느낌을 정확하게 이해할 순 없지만 확실히 그의 연기는 모성을 불러일으키는 면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이유없는 반항>에서도 그랬다고 생각되는데 제임스 딘은 불량하고 반항적인 소년이지만 진심으로 비뚤어진 인물이 아닌 것으로 그려진다. 오히려 내면에서는 순수하고 선함을 간직하고 있는데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제임스 딘이 연기하는 인물이 일관되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입버릇처럼 자신은 불량하고 나쁜 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알고 보면 우등생에다 발명가인 자기 형제보다 더 창의적이고 더 똑똑하며 수완도 있고 배짱도 좋으며 ‘입에 발린 소리에 속지 않을’ 그런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아버지도 언젠가 진정한 자식이 누구인지 알게 될 거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하면 지금까지 보아온 저 인물의 모든 것은 사실은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게 된다. 인내할 줄 알고 원하는 것을 얻어가는 현명함과 미숙함에서 나오는 내면적인 고통은 서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드는 것은 영화에서 케이트와 아론을 취급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마치 영화로부터 버려진 것처럼 여겨진다. 케이트는 등을 떠밀린 아론이 자신의 몸 위로 넘어질 때 그의 곁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영화에서 퇴장하며 아론은 창문을 머리로 들이받아 깨버리는 극적인 몸짓을 보여주고, 현명하고 잘난 사랑받는 아들에서 우둔하고 이기적이며 위선적인 인물로 추락한 채 전장으로 떠난다. 영화는 두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그들의 목소리,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는 칼의 행동 하나로 거의 살해당하다시피 한 희생자처럼 그려놓는다. 그런데 그들의 극적인 추락은 칼의 고양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칼이 아버지와 화해하고 숭고해지기 위해서 두 사람이 제물로 바쳐진 것 같은 그런 기분까지 든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 느껴지는 것은, 과연 두 사람의 평생에 걸친 갈등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 누군가의 간절한 부탁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다. 칼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아담도 그러했는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가능한가? 모르겠다. 이 부분만은 앞으로도 질문으로 남을 것 같다. (홍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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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엘리아 카잔의 <초원의 빛>

터키 이민자 출신으로 자신의 영화작업을 지속시키기 위해 ‘밀고자’라는 낙인이 찍힌 엘리아 카잔은 자신을 옹호한 영화 <워터프론트>(1954) 이후 끊임없이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듯하다. 젊은 날의 초상, 청춘은 아름다웠다고 회고하는 것처럼 말이다. <워터프론트> 직후인 1955년에 만든 <에덴의 동쪽>이 그렇고, 1961년 작 <초원의 빛> 역시 그러하다. 두 영화 모두 당시의 시대가 아닌 1930년대 이전의 시기를 다루고 있고, 풋풋한 젊은이들의 방황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편에서 제목을 따온 <초원의 빛>은 대공황기 직전인 1928년 미국 캔사스의 작은 마을과 고등학교를 무대로 펼쳐지는 비운의 사랑 이야기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 많은 부잣집 도련님인 버드(이 영화로 데뷔한 워렌 비티)와 가난하지만 아름답고 모범적인 디니(나탈리 우드)는 서로 좋아하지만, 주변 시선과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혈기왕성한 버드는 디니의 육체적 관계를 원하지만, 순결교육을 엄하게 받은 디니는 이를 두려워한다. 성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버드는 다른 여학생과 관계를 갖고, 사랑하는 버드를 뺏길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떠는 디니는 심한 히스테리와 우울증을 앓게 되며, 급기야 자살을 기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은 짧은 재회를 하지만, 환경은 변해있고 결국 작별을 고하며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아름다운 청춘 남녀의 사랑이 환경에 의해 변형되는 과정을 담은 영화 <초원의 빛>은 일종의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라 불릴법한 수작이다.

영화는 버드와 디니가 마을 인근 폭포 옆에 세워둔 차 안에서 키스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이 첫 장면은 두 사람이 겪게 될 고민과 갈등적 요소를 압축적이고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개인의 열정, 호기심과는 별개로 어쩔 수 없이 지켜야만 하는 사회적, 도덕적 질서와 통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젊은이의 초상. 남자는 자신의 이상과는 상관없이 명문대에 들어가 성공에 이르길 강요받고, 여자는 자신의 처녀성을 지켜내지 못하면 창녀로 전락하고 마는 선택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비난 받지 않고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남자답게, 여자답게 살아가려면 이를 지켜야만 한다. 영화는 두 사람 주변 도처에 존재하는 사회적 억압을 드러내며, 두 사람이 감정이 우선되는 사랑조차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경제적인 문제와도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사회에 의해 억압된 열정은 강렬한 색채와 사운드와 몸짓의 형태로 폭발하듯 표현된다. 가령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힐난을 받은 디니가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워즈워드의 시를 낭독하다 말고 교실을 뛰쳐나가는 장면이나 새해 기념 파티에서 버드가 술에 취한 그의 누나 지니(바바라 로든)를 찾다 동네 사내들에게 농락당한 지니를 위해 싸우고 울부짖는 장면, 혹은 디니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스스로 자르거나, 물에 몸을 던지며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특히 첫 장면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폭포는 이러한 인물들이 처한 곤경과 그들의 열정을 한층 극화시키는 장소로 기능한다. 내러티브는 식상하리만치 전통적인 서사형식을 따르고 있는 반면, 인물들의 개성어린 연기와 그들의 몸짓은 생생한 박진감을 가지고 있다. 엘리아 카잔은 탄탄하게 구축된 내러티브 속 인물의 상호 반작용을 통해 성적 억압을 비롯한 계층과 재산, 가족과 학교, 산업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사회적 모순을 집중적이고 명료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 속에서 인물들은 때론 비뚤어지고 왜곡된 모습을 보인다. 이혼녀라는 상흔을 안고 모든 이에게 무시당하지만 시종일관 비전통적이고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지니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카잔은 그러한 왜곡된 인간상은 이미 결정되어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더 이상 살아 갈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지니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을 보면, 사회란 필연적으로 그러한 모순을 담보하고 있고 완벽한 자유를 원한다면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단연 라스트 씬이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디니가 버드를 찾아가 그의 아내와 그를 닮은 아이를 만나고,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라는 한 마디로 어색한 짧은 재회와 작별을 고하는 그 장면. 버드를 만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직도 버드를 사랑하냐”고 묻는 친구에게 디니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워즈워드의 시를 읊조린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 말아라. 그 속에 간직된 오묘한 힘을 찾을지어다.” 이 장면을 반추해서 생각해보면, 영화 <초원의 빛>은 여주인공 디니의 자기 형성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의 변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랑의 시련을 겪는 여주인공이 어떻게 상처 입고, 견뎌내고, 치유했는지를 그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이는 지금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 우리네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어느 사회, 어느 가정에서 누구나 한번쯤 겪는 고민이며 현실 그 자체다. 현실을 벗어나지, 떠나지 못할 거라면 살면서 입은 상흔은 성숙한 인생 태도로 받아들이고, 길을 계속 가야만 한다. 아름다운 기억, 추억이란 이름으로 저 편에 묻어둔 채. 마지막 장면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며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는 연유는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신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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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6~18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엘리아 카잔 특별전

엘리아 카잔(1909~2003)에 대한 언급 가운데 아마도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연기 스타일을 스크린에 도입한 영화감독이라는 평가일 것이다. 배우가 극중 인물에 몰입할 것을 요구하는 메소드 연기를 중심 원리로 삼아 배우들로부터 뛰어난 연기를 끌어낸 그와 함께 본격적인 리얼리즘 연기가 미국 영화사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카잔이 영화 카메라를 단순히 자연주의적인 ‘기록’의 도구로 간주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카메라는 오히려 현미경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의 외양 너머로 더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카잔의 영화 속에 포착된 인물들은 내면에서 타오르는 어떤 ‘불꽃’을 보여주었다. 대개 그들은 그 원인이 내적인 불안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사회적 억압에 의한 것이든 여하튼 고뇌에 찬 이들이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나 <워터프론트>(1954)가 예증하듯, 그런 인물들을 그린 카잔의 영화들은 진지하고 어른스러운 면을 갖추면서 당대 영화의 한계를 넓히는 것들이었다. 그런 면에서 마틴 스코세지 같은 이는 카잔을 두고 이후의 우상파괴주의자들을 위한 길을 닦아놓은 영화감독이라고 평가하기까지 한다. 4월 6일부터 1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엘리아 카잔 특별전’은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이 대가의 작품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자리이다.

상영작 가운데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것은 카잔의 대표작인 <워터프론트>이다. 영화는 폭력과 배신이 난무하는 뉴욕의 한 부두를 배경으로 조합을 지배하는 불량배들 밑에서 일하던 테리 말로이의 도덕적 각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탄탄하게 짜여 있는 극적 구조 안에서 앙상블 메소드 연기가 빛을 발하며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한 단호한 시선마저 돋보인다는 점에서 <워터프론트>는 빼어난 작품임에 틀림없다. 이에 동의하는 많은 평자들도 한낱 ‘밀고자’가 고통 받는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로 격상되는 후반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했다. 누군가는 극적 논리의 허술함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파시스트적 구실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사실 많은 이들은 후반부에서 테리의 울부짖음은 카잔 자신의 외침이라고 보았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영화를 만들기 전 카잔이 반미활동위원회의 청문회에 참석해 공산주의에 동조한 동료들의 이름을 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워터프론트>는 ‘밀고자’ 카잔 자신에 대한 영화적 변명처럼 들린다(시나리오를 쓴 버드 슐버그 역시 카잔과 같은 행동을 한 인물이었다). 여하튼 카잔의 이런 전력은 그의 경력 내내 따라다녔고, 특히 1999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할 때 많은 논란을 낳았다. 이 ‘우호적’ 증언의 행위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은, 카잔은 오히려 그 일 이후에 좀 더 뛰어나게 된 유일한 영화감독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영화가 만들어진 당시의 사정을 무시하고 영화를 보면 말론 브랜도가 연기한 테리는 빼어나게 그려진 반항아로 보일 수도 있다. <에덴의 동쪽>(1955)은 또 다른 스크린의 반항아 제임스 딘의 존재가 그야말로 불타오르는 영화이다. 현대판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그는 사랑을 갈구하는 젊은이를 특유의 무너질 듯 과민한 모습 안에 담아 당대 젊은이들에게 거대한 반향을 일으켰다. 다른 한편으로 <에덴의 동쪽>은 와이드 스크린 화면 안에다가 인물들의 심리와 관계를 표현하려는 카잔의 시도가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 데이비드 톰슨은 이 영화를 카잔의 최고작으로 꼽은 바 있다. 그 자리를 조너던 로젠봄은 <대하를 삼키는 여인>(1960)에 넘겨줬다. 영화는 댐이 건설되면 침수될 지역에 남아 있길 원하는 완고한 부인에게 땅을 팔라고 설득하러 온 정부 관계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제 전통과 발전, 완고한 개인주의와 공공을 위한 선(善), 낭만주의와 실용주의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여기서 카잔은 어느 한편에 편향된 시선을 주지 않는 사려 깊음을 보여준다. 물론 미묘하게 그려진 러브 스토리도 주목을 요한다. ‘엘리아 카잔 특별전’에서는 언급한 작품들 외에 <신사협정>(1947), <거리의 공황>(1950),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초원의 빛>(1961) 같은 영화들이 카잔의 세계를 조망할 기회를 줄 예정이다. (홍성남_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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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4월 첫 프로그램으로 배우들의 영화감독이라 불리는 엘리아 카잔(1909~2003)을 조명하는 특별전을 연다.

오는 6일부터 1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이번 '엘리아 카잔 특별전'에서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를 비롯해 '냉정한 리얼리즘'을 반유대주의를 소재로 하여 보여준 <신사협정>(1947)
, 노동자와 자본 계급 간의 대립을 그린 <워터프론트>(1954), 제임스 딘의 고독한 눈빛이 인상적인 <에덴의 동쪽>(1955) 등 총 7편을 상영한다.

엘리아 카잔은 1950년대 이후 할리우드에서 사회·정치적 이슈 뿐 아니라 인종·가족 등 다양한 소재를 아우른 작품을 연출했다. 1945년 <브루클린에서 자라는 나무>로 데뷔한 후 예리하고 사실적인 시선을 작품에 반영한 주옥같은 할리우드의 명작을 만들어 미국영화의 특징을 대표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는 제임스 딘, 말론 브랜도, 나탈리 우드 등을 배출한 메소드 연기법의 효시인 연기학교 ‘액터즈 스튜디오’를 설립하는 등 할리우드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이번 특별전에는 엘리아 카잔의 작품세계를 보다 폭넓게 돌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두 차례의 강연도 진행된다. 8일 7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상영 후에는 ‘엘리아 카잔의 아메리카’란 주제로 서울아트시네마의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강연을 하고, 11일 오후 4시 <워터프론트> 상영 후에는 명지대 교수인 김영진 영화평론가가 ‘배우의 감독, 엘리아 카잔'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 행사 문의나 자세한 상영일정은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www.cinematheque.seoul.kr)를 참고하면 된다. (신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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