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역사적 맥락으로 살펴본 비스콘티 영화의 매혹성

지난 13일 비스콘티 독일3부작의 첫 번째 영화인 <저주받은 자들> 상영 후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는 비스콘티 영화의 매혹성이라는 문제를 흔히 많이 거론되는 데카당스적 미학보다는 영화사적 문맥이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펴보았다. 흥미진진했던 그 시간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오늘은 비스콘티 영화의 매혹성이라는 문제를 미학적 성격보다는 역사적 맥락을 통해 다루어 보려고 한다. 비스콘티의 데카당스적 미학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영화 자체의 강렬함 때문인지 영화사적 문맥이나 역사적 문맥들이 덜 얘기되는 것 같다. <저주받은 자들>의 내러티브는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크게 보자면 마틴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더 넓게는 마틴이 에센벡 가문 전체를 궤멸시키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개인적 살해와 대학살의 범죄가 면책되었던 시기가 나치즘의 태동기로,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마틴의 가계 살해와 나치의 대량 학살은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1933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종결되고, 비스콘티의 표현을 빌자면 살인국가가 시작되는 시기이며, 중산층이 몰락하고 귀족과 자본가들이 나치에 협력하기 시작하고, 영화에서 보자면 도착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크게 4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막에서는 에센벡 가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당시 독일의 실제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막에 해당하는 요아힘의 생일파티에서는 1933년에 있었던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언급되며, 3막에서는 나치 친위대원들이 돌격대원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인 '장검의 밤'이 묘사되고 있다. 4막에서는 다시 돌아온 헤르베르트의 이야기에서 다카우 수용소가 환기되는데, 이는 히틀러 집권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수용소로, 처음에는 반나치 정치인들을 수감하는 곳이었다가 나중에는 유대인들을 수감하는 수용소로 변했다. 결국 이 영화는 2년 정도의 시기에 걸쳐 나치즘의 발현과 가계 내의 권력적 이동의 여러 양상들을 같은 맥락으로 다루고 있다.

4막 가운데 가장 흥미롭게 보게 되는 곳이 1막과 4막이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저택에서의 저녁식사라는 가족의례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가족의례는 비스콘티의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동시에 1막은 장례식으로, 4막은 결혼식으로 끝나고 있다. 하지만 소피와 프레드리히의 결혼식 역시 죽음으로 치닫게 된다는 점에서 둘 모두 죽음의 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스콘티는 귀족들의 양식화되고 의례적인, 제의적인 행사들을 영화에 담아내는 것을 좋아했다. <레오파드>가 그러한데, 그런 장면들이 비스콘티 영화를 보는 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저주받은 자들>에서의 의식은 여전히 우아하고 세련되고 화려하지만, 그 안의 부패나 죽음, 타락이라는 면이 훨씬 더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비스콘티의 다른 작품들에서 그런 의례들이 이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일종의 향취를 의미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의례 자체가 내부에서 부패하고 썩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귀족사회의 몰락과 죽음으로 연결되는데, 어떤 점에서 이런 몰락이 재촉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이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첫 번째로 보자면 외부적인 침입이 있다. 1막에서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소개되는데, 그 가운데 프레드리히와 아센바흐는 차를 타고 저택의 외부로부터 들어오는데, 그들이 차안에서 나누는 대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둘의 결탁을 표현하는 것으로, 후에 벌어지는 '장검의 밤' 시퀀스에서도 둘은 함께 등장한다. 즉, 이들은 에센벡 가와 구 돌격대(SA)를 궤멸시키는 사건에 동시에 연루되어있다. 결국 둘의 연대가 외부적 침입의 궁극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외부적 침입보다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내부적인 부패와 궤멸의 지점이다. 침입이 진행되기 이전부터 이미 내부에서는 타락과 부패가 진행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가계나 귀족 계급의 몰락은 구시대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세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사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의 시간성이 내부적 부식과 부패로 이어지기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간의 필연적인 부패는 그 집단이 밀실처럼 폐쇄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부패나 쇠락은 비스콘티 영화의 내적 공간성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공간의 밀폐가 시간의 부패를 초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스콘티 영화의 대부분은 밀실적인 폐쇄적 공간이 주를 이룬다. 후기 작품들로 가면 갈수록 내부 공간과 바깥을 연결하는 통로가 없어진다. 밀실의 공간, 완전히 닫힌 세계에서 시간은 부패하고 쇠락한다. 이런 점이 관객들에게 강한 매혹을 주고 있다. 인물들은 결국 쇠락의 길로 빠져들겠지만, 폐쇄된 공간 안에서 과거의 추억과 이미지와 기억들이 인물의 몸에 거주하고, 이를 통해 그 인물의 고고함과 귀족성이 아름답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주받은 자들>에서 그것은 굉장히 비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마틴이라는 인물의 행태를 주목하게 된다.

요아힘의 생일파티에서, 어린 아이들은 시를 낭송하고 귄터는 바흐의 사라방드를 연주하는 가운데 마틴은 마를린 디트리히를 흉내 내는 드랙쇼를 벌인다. 이 공연 장면은 몇 가지 층위로 읽어낼 수 있다. 첫 번째는 마틴이 에센벡가 안에서 굉장히 반항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성적 도착을 보여주는데, 이는 1930년대 독일 사회의 변화라는 맥락내에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공연은 애매한 구석들을 갖고 있다. 마틴이 가게 되는 경로와 귀결점을 보았을 때 비스콘티는 마틴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고만은 볼 수 없다. 마틴의 모습이 주는 관능성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종종 이런 류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처하는 자가당착적 문제가 있는데, 어떤 인물의 폭력이나 도착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들이 지닌 폭력과 도착에의 관능성을 함께 담아낸다는 점이다. 압도적인 존재감과 관능성을 가진 헬무트 베르거 같은 인물이 아니라, 조금 더 거리두기가 가능한 배우를 설정했다면 손쉽게 비판적 층위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대체로 그가 지닌 관능성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자가당착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위험한 시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후에 만들어진 밥 포시의 <캬바레>를 들 수 있다.

마틴의 쇼에는 다른 뉘앙스도 있다. 고전적인 귀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첼로의 고귀한 선율에 비해 바로 이어지는 마틴의 쇼는 굉장히 쾌락적이고 쇼비즈니스적이다. 그것이 가문에서 거부당할 때, 그가 취하는 또 다른 방식이 나치즘과의 결탁이며 그것은 결국 가계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모호한 것은 그래서 비스콘티가 정치적 변절과 성적 변화를 이상한 방식으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공연에서 드러나는 마틴의 성적 변화는 나중에 발생하게 될 그의 정치적 변질의 징조와 의미로 표현된다. 처음에는 여장을 하고 마를린 디트리히를 흉내내는 드랙쇼를 벌이지만, 나중에는 나치즘의 제복을 입고 또 다른 의미의 쇼를 벌인다. 이 둘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정치사회적 부분과 성적 도착을 연결시키는 맥락에서 이 영화는 기묘한 역설을 보여준다. 병적이라 할 만한 정치적인 힘 아래서 인간성의 영역이 도리어 성적인 변질을 겪는 인물들에 의해서만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3막에서 벌어지는 '장검의 밤'에 등장하는 돌격대원들도 마찬가지다. 마틴과 이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에 비해 아센바흐라는 인물은 한 치의 변형성도 없는 냉철한 인물로 묘사되며 나치의 악과 미, 그리고 그것이 갖고 있는 굳건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정말로 무서운 것은 마틴의 성적 도착이라기보다는 굳건하게 이 영화를 장악하고 있는 아센바흐의 존재감일 것이다. 이 인물은 사실상 프레드리히가 요아힘을 죽이게 만들고, 이어 마틴이 프레드리히를 죽이게 만든다. 두 아버지의 살해에 이어, 그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 또 다른 아버지의 초상, 즉 히틀러가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루드비히>와 <순수한 사람들>로 이어지는 독일 3부작의 시작을 이루고 있다.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필연적으로 상실된 것, 그리고 상실 이후에 이해될 수 있는 과거의 시간, 그 과거의 시간을 되찾는 수단으로서의 예술이 보다 부각된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애매한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동시에 1970년대에 등장하는 유럽의 역사 영화들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치 정권의 도래와 나치즘, 그것의 가장 극악한 표현으로서의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이후의 역사 영화들이 고민했던 근본적인 문제들에 화두를 던졌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나치 집권 사회 안에서의 인간, 다시 말해서 인간 내부의 문제 등이 간과되는 면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런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정신분열증이라고 할 수 있는 병리학적 부분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동시에 독일 파시즘이 갖고 있었던 매혹을 어떻게 내부의 시선에서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회피하지 않고 그것과 마주할 수 있는지의 고민이 이 영화에서부터 촉발됐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 이후에 만들어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 같은 영화는 매혹이나 섹스, 죽음, 폭력, 멜로드라마와 같은 소재로 파시즘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로부터의 적, 위장된 형태로서의 자아의 병리적인 현상에 근거해 파시즘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파시즘이 갖고 있는 내부적 매혹이라는 문제도 이 영화를 기점으로 본격화되는데,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이나 파스빈더의 <릴리 마를린>, <절망> 등의 영화들이 그 계보를 따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저주받은 자들>은 새로운 방식의 역사영화, 새로운 방식의 파시즘에 대한 미학적 표상을 이루어낸 선구적인 영화라 말할 수 있다. (정리: 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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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데카당스라는 비스콘티의 낙인

루키노 비스콘티 특별전이 한창이던 지난 12일, 그동안 여러 차례 비스콘티의 영화세계에 들려줬던 한창호 영화평론가가 다시 한 번 서울아트시네마를 방문했다. 그는 비스콘티의 유작 <순수한 사람들> 상영 후 이어진 강연에서, 비스콘티의 미학적 유산에 대해 풍부한 그림 자료들을 곁들이며 들려주었다.


한창호(영화평론가):
<순수한 사람들>이 비스콘티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마지막 미학적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맡게 됐다. 먼저 <순수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 나중에 그림 자료들을 보면서 데카당스라는 비스콘티의 낙인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이 영화는 비스콘티가 만 70세가 좀 안 됐을 때 발표된 작품이다. 영화를 찍을 때 몸이 굉장히 안 좋았다. 결국 3월 정도에 세상을 뜨고 말았고, 5월에 칸에서 최초로 소개가 됐다. 칸이 많이 사랑했던 감독이었고 유럽 사람들에게 많이 사랑받던 감독이었으니, 많은 대접을 받는 분위기였다. 영화가 비관적이고 우울한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 흥행 8위를 했다. 죽기 직전까지 영화를 만들고 어느 정도 흥행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된다. 영화가 시작할 때 책을 넘기는 손은 비스콘티의 오른손이다. 이때 왼쪽 반신은 마비된 상태였다. 3년 전에 <루드비히>를 찍다가 무리해서 쓰려졌고 반신이 마비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후에 재활을 통해 어느 정도 회복하여 <가족의 초상>을 만든 후, 불행하게도 다시 쓰러져서 이 영화는 휠체어에서 연출을 했다. 비스콘티는 1차 편집본을 보고 대단히 실망하여 대대적으로 수정을 하겠다고 말한 후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 이후 각본과 촬영감독이 합심하여 수정해서 만든 작품이 지금의 버전이다. 원작 소설의 작가 가브리엘 단누치오는 이탈리아 데카당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기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초인에 대한 세속적 욕망이 컸다. 보편적인 평범함에 대해 경멸이 있었고, 여성편력이 대단했다. 소설의 주제는 주로 쾌락과 죽음에 집중되어 있었다. 죄의식을 자극하거나 자기 파멸적인 쾌락과 자기 자신을 스스로 몰락시켜가는 죽음 등 금지의 선을 넘어서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범죄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그 당시 세기말적 유럽의 정후와 맞아서 그런지 몰라도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비스콘티 본인이 갖고 있는 데카당스, 부패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끌림 같은 게 단누치오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게 된 것이다.

비스콘티는 툴리오라는 캐릭터에 매혹을 느꼈다. 대표적인 상층 부르주아 계급인데, 이 남자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것이다.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 있고, 누구도 자기를 심판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기적인 존재다. 그는 인간관계에서 자기가 일방적으로 버림받는 부분에 대해 견뎌내지 못하고 광기에 빠져서 아이를 죽이게 된다. 그 남자에 대해 비스콘티가 동병상련이나 자기 연민을 느낀 것 같다. 비스콘티 전공자들은, 이 작품 또한 상층 부르주아 남자를 통해 그 당시 이탈리아 상층부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반사회성이나 윤리적인 부분을 데카당스라는 방법을 통해 표현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에는 <베니스에서의 죽음> 이후의 작품에 그런 사회적인 부분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코뮤니스트였던 비스콘티가 <센소>를 내놨을 때 사람들이 많이 실망했는데, 공격한 것도 옹호한 것도 좌파 비평가였다. 비스콘티를 옹호한 사람들은 루카치의 리얼리즘에 대한 옹호자들이었다. 루카치의 리얼리즘은 외관과는 상관없이 세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진실을 담고 있다면 오히려 더 리얼리즘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례로 든 것이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다. <센소>가 루카치적인 리얼리즘의 영화적인 모범이며, 제대로 된 리얼리즘의 사례를 보여준 것이 비스콘티라는 주장이다.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이후의 영화들에는 패배주의와 개인주의자들이 체념 등이 드러나 있으며 필멸의 존재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운명에 대한 성찰이 있다. 데카당스의 정수를 보여준다. 리얼리즘이나 사회적인 맥락에 대한 해석에는 크게 동의하지 않는다.

<순수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인형의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치게 장식된 공간과 의상, 마리오네트처럼 의례화 된 행동만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어떻게 보면 반쯤 죽은 존재들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을 준다. 활기가 없고 느릿느릿하게 움직인다. 데카당스의 멜로드라마 표현법이 더 멜랑콜리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프린트 상태가 좀 안 좋고 컬러가 탈색돼 있어서 좀 아쉬웠다. 덧붙이자면 툴리오를 연기한 남자배우 지안카를로 지안니니는 당시에 코미디 배우였다. 능청스럽고 여성스럽게 빈대 붙는 남자 역할을 굉장히 잘했다. 여기에서 단누치오와 병든 비스콘티의 분신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줄리아나를 연기한 여자배우 로라 안토넬리는 70년대에 주로 벗는 역할을 했었다. 비스콘티는 육체적 외양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비스콘티가 데카당스 멜로드라마를 표현하는 방식은 대단히 회화적이다. 그림자료를 보면서 비스콘티의 회화적으로 표현된 데카당스의 멜로드라마 미학에 대해 알아보자. 비스콘티는 데카당스의 가장 중요한 테마인 죽음을 회화적인 도상을 통해 표현한다. <강박관념>의 남자주인공 지노는 대단히 어두운 집 내부에서 살인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유령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히스테릭하게 나온다. 어둠이라는 자극을 도상적으로 잘 보여줬다. 남자가 불안감에 빠져있으니 여자주인공 죠반나가 남자를 달래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파티를 한다. 파티 준비를 할 때, 멕베스와 멕베스 부인이 살인을 공모하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사자를 상징하는 여자가 낫을 가지고 등장한다. 데카당스 시절의 독일권 화가인 뵈클린의 <페스트>(1898)의 그림과 유사하다.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죽음을 표현한 그림이다. 데카당스라는 테마가 미술을 통해 표현됐다. 또한 죠반나가 영화의 도입부에서 지노를 만나자마자 사랑을 나눈 후 돈만 많은 남자랑 사는 것에 대해 의자에 앉에 몸을 비비 꼬면서 한탄하는 장면은 모딜리아니의 <장 에뷔테른>(1918)을 참조했다. 눈동자가 없는, 데스마스크. 체념, 자극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태를 표현했다.


<센소>는 그림자, 육신이 없는 것, 유령에 대한 영화다. 오페라 시퀀스가 지나고 나서 베니스의 밤에 데이트를 하는 장면에서, "나를 당신의 그림자로 받아주면 되지 않겠느냐" 라는 남자의 대사가 나온다. 농담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여자는 발이 안 보이고, 남자는 흰 망토를 두르고 있어서 두 사람 모두 유령처럼 보인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죽음이라는 운명에 다가가 있는 모습을 밤에 길거리를 방황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거대한 무덤 속을 걷고 있는 두 그림자처럼 영화가 시작된다. 이 때부터 데카당스라는 테마가 비스콘티의 영화에 들어온 것이라고 본다. <레오파드>는 죽음과 소녀의 테마를 다룬다. 영화 마지막의 가장 아름다운 춤 장면에서, 비스콘티는 죽음과 소녀라는 서양 미술사의 오래된 테마를 변주한다. 검은 옷을 입은 버트 랭커스터가 죽음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이고,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순결한 소녀를 상징하는 것처럼 대조시켜놨다. 한스 발둥의 <죽음과 소녀>(1517)의 메멘토 모리, 비어츠의 <죽음과 소녀>(1848)를 참조했다. 낭만주의 시기에는 죽음이 센슈얼하게 그려진다. 뭉크의 <죽음과 소녀>(1893)에서는 소녀가 죽음을 끌어안고 적극적으로 사랑의 행위를 표현한다. 죽음을 사랑의 대상으로, 죽음에 더 방점이 찍힌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레오파드>에서는 랭커스터에 방점이 있으며, 죽음을 상징하는 그 남자가 더 아름답게 나온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는 질병의 멜랑콜리와 염을 다룬다. 마지막 시퀀스 바로 전에 아센바흐가 이발소에서 화장을 하고 거울을 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다음날 그 복장 그대로 해변에 나갔다가 타치오를 보며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화장은 자신을 꾸미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죽은 자가 하는 의례로서의 염과 동일한 기능을 한다. 또한 이 장면에서는 말러의 교양곡 5번 2악장 아다지에토 장송곡이 나온다. <루드비히>는 밤의 찬가다. 푸른색의 영화다. 비스콘티는 컬러에 대한 해석이 참 섬세한 사람이다. 루드비히라는 달의 왕에 관련된 이야기다. 비스콘티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루드비히는 예술가로 태어나야할 사람이 왕으로 태어난 것이다. 첫사랑에의 실패를 위무하기 위해 바그너의 음악에 빠지며, 중간에 동성애자로 변하는 상황을 운명의 저주처럼 받아들인다. 그런 부분에 비스콘티의 삶이 들어가 있다. 병든 사람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루드비히가 자기 왕궁 안에 인조 호수를 만들어 놓고 백조의 왕자처럼 거기에서 놀고 있는 장면이 있다. 건물 내부의 컴컴한 물이 있는 공간은 일종의 자궁이다. 차라리 엄마 뱃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 본능적으로 죽음으로 돌아가려는 심경이 드러난다. 비통함과 우울함을 증폭시키는 장면이다. <센소>를 만들 때 주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을 것을 스스로 알았을 텐데, 그런 점을 이겨낸 것은 멋진 행동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천성과, 그것이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한 천성을 계속해서 표현해 낸 것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낭만주의 시기의 예술가의 초상에 맞도록 자기 자신이 살아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리: 박영석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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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오페라 연출가이기도 했던 비스콘티는 거의 평생 동안 멜로드라마에 탐닉했다. 유작인 <순수한 사람들>에서 그는 19세기 이탈리아 상류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륜과 정조의 문제를 다루며 다시 한 번 멜로드라마로 돌아온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공간은 사교계의 살롱과 귀족들의 저택인 실내 공간들로, 소품들의 화려함과 다채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주인공들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의 의상 또한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고 아름답다. 장면이 바뀔 때, 동일한 공간이나 의상이 다시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으며, 사물들은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정점에 달한 영화미술, 숏 하나하나가 회화 작품과도 같은 프레이밍으로 이뤄진 미장센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극 전체의 분위기와 상황, 인물들의 감정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정열적인 애정, 격정적 질투의 감정을 발현하는 주인공들의 얼굴과 눈빛을 보여주는 클로즈업은 그 자체가 최고의 미장센이기도 하다.

영화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식의 4막 구성을 따라 진행된다. 훤칠한 미남 주인공 툴리오(지안카를로 지안니니)가 정숙하고 순진한 아내 줄리아나(로라 안토넬리)를 버려두고, 치명적인 매력을 내뿜으며 사교계의 여왕처럼 군림하는 테레사(제니퍼 오닐)와 정분을 나누는 격정과 질투의 이야기가 영화의 1막이다. 테레사와 줄리아나를 연기한 두 배우의 외모가 무척 닮았는데,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캐스팅으로 보인다. 많은 남자와 정분을 뿌리고 다니는 테레사와 정숙한 아내인 줄리아나는 툴리오에게 욕정과 순수라는 두 가지 형태의 사랑을 대변한다. 그러나 줄리아나의 순수함이 깨어져나가면서 두 여인 사이의 간격은 점점 좁혀지며, 그들의 외모 또한 더욱 더 닮아간다.


툴리오가 줄리아나에게 돌아오면서 부부는 행복을 되찾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처럼 밝은 분위기의 2막은 싱그러운 자연의 실외 공간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평화는 너무도 짧다. 줄리아나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일순간에 바뀐다. 그리고 줄리아나의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제 영화는 파멸과 죽음의 4막으로 치닫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툴리오와 테레사는 검은 옷을 입고 있다. 이 검은색은 줄리아나의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실은 툴리오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함이었음이 곧 밝혀진다. 그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보인다. 비스콘티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과 데카당스의 미학에 매혹된 사람이었다. (박영석 시네마테크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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