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죽을 만큼 사랑할 수는 없다

-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이사쿠의 아내'

 

<세이사쿠의 아내>가 처음부터 세이사쿠의 아내였던 것은 아니다. 첫 장면, 언덕 위에서 전쟁 직전의 해군 기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오카네는 누구의 아내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여자다. 그녀를 돈 주고 산 늙은 홀아비도, 그녀를 어쩔 수 없이 돈 받고 판 병든 아버지도, 그녀의 들끓는 충동을 묶어두기엔 역부족인 듯 보인다. 이 ‘여자’가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거세하고 누군가의 ‘아내’의 자리에 정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과정이, 마스무라 야스조와 팜므 파탈의 일인자 와카오 아야코 짝패를 필두로 한 이 멜로드라마의 중심축이다.
사랑영화가 이토록 무서울 수 있을까. 마스무라 야스조는 다이에이 스튜디오에서 미조구치 겐지와 이치가와 곤의 조감독을 거치며 성장했으나 선배 세대의 ‘일본영화’가 지닌 유장함, 서정성을 거부했던 누벨바그 세대의 대표 감독이다. 그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도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대신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듯한 여자의 욕망의 깊이에 대한 엄혹한 관찰이 있다. 부모를 모두 잃고 고향에서 외톨이가 된 오카네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전역 군인 세이사쿠를 유혹한다. 그녀는 곧 그와 한 지붕 아래 살을 섞으며 지독한 외로움을 씻어낼 수 있게 되지만, 곧 전쟁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다. 하지만 세이사쿠의 육체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그녀의 욕망은 전쟁마저 자신 앞에 무릎 꿀릴 만큼 무시무시하다.
여자의 욕망. 그것은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에서 종종 치명적인 것이 된다. 죽음과의 인접성 때문이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에서 그녀들의 성애는 자주 자살 혹은 살해의 충동과 맞닿아있다. 오카네도 계속해서 죽음을 입에 올린다. “다시 혼자가 되느니 죽겠어요.” “오늘 밤 같이 죽어버리는 편이 더 행복할 것 같아요.” “후회는 없으니 날 죽여주세요.” 혹은 그녀는 자신을 창녀 취급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낫을 들기도 하고, 자신을 쫓아오는 마을 사람들에게 죽고 싶다며 발광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언뜻 그런 죽음에의 충동은 삶에의 의지를 가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실로 그녀가 구걸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자해적 퍼포먼스가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끔찍한 몸부림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다.
죽음을 삶의 우위에 두는 행위에는, 절정의 순간에 대한 맹신과 지속성에 대해 거대한 불신이 함께 자리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아내로 산다는 것은 반대로 순간에 대한 천착을 버리고 지속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오카네는 세이사쿠의 신체를 훼손한 뒤 자기징벌을 껴안음으로써 겨우 그 상태에 도달한다. 마지막 장면, 그녀를 앉혀놓고 밭을 갈던 세이사쿠 대신 그를 앉혀놓고 밭을 가는 오카네가 보인다. 온갖 ‘지랄’ 끝에 그녀는 비로소 세이사쿠의 아내의 자리에서 안정을 찾은 듯하다. 하지만 그 안정이 무엇을 도려낸 대가인지, 우리는 안다. ‘여자’라는 주어와 ‘살다’라는 동사의 만남이 이 영화에서 유독 절절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후경 /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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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멜로물이 지닌 가장 숭고한 아름다움만을 그대로 수학적으로 만든 영화 같다”

- 김태용 감독이 말하는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이사쿠의 아내’

 

지난 1월 26일,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김태용 감독이 추천한 <세이사쿠의 아내> 상영 후 시네토크가 열렸다. 김태용 감독은 필름으로 영화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며, 영화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보다는 영화가 자신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 관객으로서의 재미라고 말했다. 이 영화가 준 강렬함에 탄력을 받은 듯 영화와 사랑, 삶의 태도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가 오고 간 시네토크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김태용 감독이 친구들 영화제 때 처음으로 추천한 영화가 <우묵배미의 사랑>이다. 지난번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 이번에는 <세이사쿠의 아내>를 추천하고, <만추>도 만들었는데, 무언가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는 여성에 대한 정념이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영화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김태용(영화감독):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이 영화를 오랜만에 보고 싶었다. 영웅 이야기를 보고 싶었나 보다. 나이가 들면서 영웅 신화가 다 깨져가고, 멜로적인 감수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도 여전히 마스무라 야스조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나에게 ‘영웅’들이다. 멜로영화 안에서는 두 세계가 부딪친다. 사실은 살면서 약간 비겁하게 부딪칠 때가 많은데, 영웅들의 신화를 보다보면 얼마나 용기 있게 두 세계가 정면 돌파 하는가에 대해서 느끼지 않나. 그런데 사실 사랑은 두 세계가 맞부딪치는 그 용기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 두 세계를 하나처럼 만들어지게 하는 다른 외부의 부딪침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속성 자체가 두 사람 자체도 부딪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외부의 힘 때문에 하나처럼 되는 느낌이 있어야 ‘우리’가 유지된다고 본다. 사랑은 상대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아도 유지가 안 되고, 다른 세계의 공격이 없어도 유지가 안 되는 것 같다. 나는 <세이사쿠의 아내>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비극처럼, 멜로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가장 숭고한 아름다움을 액기스로 뽑아서 이 영화에서 그대로 수학적으로 만든 게 아닐까 싶다. 그만큼 얼마나 자기를 감정에 내던지고 우리 둘이 만들어낸 세계와 다른 세계가 맞부딪칠 때도 얼마나 용기 있게 싸우고 있는가에 대한 영화다. 그런 생각에서 이 아름다운 멜로영화를 다시 보고 싶었다.

 

김성욱: 이 영화에는 노출신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몸의 물리적인 특성이랄까, 정신적이거나 감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몸이 갖고 있는 물리성의 느낌이 굉장히 많이 느껴졌다. 인물에 대한 것과 사랑에 대한 감정을 물성으로 표현해내는 영화의 방식들이 와 닿았다.

김태용: 어떤 영화를 볼 때 첫 컷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 민감하게 보는 편인데, 이 영화는 얼굴 클로즈업으로 시작한다. 이 여배우는 일단은 위태로워 보이는데, 그 위태로움이 약함이 아니라 어떤 공격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기를 내던질 줄 아는 느낌도 있었다.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땐 여배우가 매력적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구조적으로 영화에 접근했기 때문에 인물이 와 닿지는 않았는데, 다시 봤을 때 여배우의 힘이 많이 느껴졌던 것 같다. 이 영화가 에로틱하다고 하는데, 마스무라 야스조의 다른 영화들, <문신>이라던가 <붉은 천사> 등을 보면 훨씬 더 노출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나도 이 영화가 가장 야하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웃음)

 

 

김성욱: 이 영화에서 사람의 눈을 찌르는 행위가 갖는 사랑의 정념의 표현과 전쟁에서 죽은 자에 대한 칭송, 이 두 가지를 극단적으로 대비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눈을 찌른 것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표현 자체가 사랑의 행위에서 나온 결과인데, 전쟁이라는 것은 의미 없이 사람들을 죽여 버리고 그에 대해서 칭찬을 한다. 오늘 다시 보니 전쟁에서 돌아오는 장면과 환영하는 의식을 치르는 장면들이 굉장히 길게 느껴지더라. 전체적으로 보면 이런 장면들과 남편의 눈을 찌르는 행위가 연결되고 대비되면서 (여배우의) 고립된 느낌이 많이 부각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김태용: 오늘 영화를 보면서 유난히 재미있게 봤던 지점들이 마을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마치 무성영화 변사처럼 계속 설명을 해준다. 그 지점이 '눈'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마라, 남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라 등의 대사에서 ‘시선’이라는 표현으로 타자라는 다른 존재에 대해서 의식하고 있다. 드라마 내적으로 본다면, 이 남자가 명예를 잃은 뒤에 여자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굉장히 감정적인 비약이 있다. 이 감정적인 비약을 이야기적으로 어떻게 풀어갈까 궁금해지는데, 영화 안에서는 ‘눈’이라고 하는 매개 자체가 이 남자를 비약적으로 확 발전시키는 계기를 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눈과 관계 되어 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 먼 짐승>이 촉각적인 사랑과 정념, 욕망의 본질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면, 이 영화는 욕망의 본질에 접근하기 보다는 욕망을 둘러싼 편견과의 싸움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오히려 욕망을 직접적으로 본다면 에로틱하지 않은데, 욕망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정서와 부딪칠 때 에로틱한 느낌이 더 드는 것 같다. 여배우가 더 많이 노출하고, 성적학대를 당해도 에로틱한 느낌이 없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여자의 정서와 의지가 맞닿아서, 더 에로틱한 느낌이 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관객1: 영화 속에서 세이사쿠는 전적인 피해자이다. 부인은 세이사쿠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다시 혼자되고 싶지 않다는 열망 때문에 일을 저질렀는데, 거기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세이사쿠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매도하고 백안시한다. 그런 소름끼치는 집단성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김태용: 말씀하신 대로 (집단의) 잔혹함이라고 하는 게 영화의 기본 베이스인데, 세이사쿠라는 남자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열망과 의지와 이성적인 결정에 대해 여자는 조롱을 하고 있다. 어떤 공동체에 위협을 느끼는 불편한 순간들이 있을 때 개인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들이 생기는데, 이 영화는 정확하게 그 폭력이 좋다, 나쁘다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하나의) 세상이다. 개인적으로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서 다루는 영화는 재미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것을 세상으로 보고 난 후에 개인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정확히 그 폭력의 무자비함, 무지몽매한 것으로 보이는 세상 앞에서 외롭게 서 있는 두 개인에 대한 사랑 이야기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폭력에 대해서 훨씬 윤리적으로 접근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관객2: 영화를 보는 도중 헤이스케(오카네의 사촌)가 마음에 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로맨스 중간에 껴 있는 제 3자의 역할, 즉 관객의 눈이 되어주는 캐릭터 같기도 하다. 이 감독의 다른 영화에 관객의 눈과 일치하는 변두리의 인물이 더 나타나는지 아니면 그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김태용: 굉장히 기능적인 인물이다. 그의 기능에 대해서 내가 받았던 느낌은 사회적인 약자나 사랑을 지켜봐주는 친구 같은 존재일 수도 있지만, 약속과 관계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공동체나 국가와의 이념과는 상관없이 개인과 개인이 맺는 약속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영화 내에서 밀도 높은 약속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한 국가 혹은 어떤 가치에 이르려는 개인의 약속에 대해서는 조롱하지만, 각각의 개인들이 해왔던 약속에 대해서는 지켜야하는 주인공들 같은 느낌이다. 어떤 가치와 개인 간 약속과의 대립 혹은 차이. 어떤 인간이 더 솔직한가, 더 용감한가, 어떤 것이 더 재미있는가. 이런 의문을 던져주게 했던 기능적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관객3: 작년에 <부운>을 추천하신 것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계속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영화들을 추천하셨다. 감독님도 사랑을 하는 캐릭터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실 텐데, 이와 같은 영화들을 보면서 개인적인 영감을 많이 얻으시는지.

김태용: 내가 관객으로서 영화를 좋아하는 건 어떤 장르영화든, 어떤 멜로영화를 통해서든 어릴 때 영화를 보고 나오면 달라진 나를 느끼는 게 좋았다. 왜소한 나에서 변화하는 느낌. 최초의 영화는 <킹콩>이었다. 홍콩 영화나 어떤 멜로 영화도 그렇고, <랜드 앤 프리덤> 같은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래, 세상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해"라는 감정이 들기도 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몸을 움직이게 하는 영화들을 개인적으로 관객으로서 좋아했다. 지금은 공교롭게도 멜로 영화들이 삶에 용기나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해준다.

 

관객4: 이 영화가 멜로라고 하기에는 두 남녀 간의 감정이 비약적으로 넘어간 부분이 있고, 기대했던 감정적인 수위보다 묘사가 덜 된 것 같다. 또, 두 세계의 충돌에 대해서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어떤 아름다운 충돌의 경험이 있으신지. 예를 들면 다른 직업이라던가, 다른 나라라던가. (웃음)

김태용: 멜로의 영역을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서 나와 다른 사람을 둘러싼 또다른 사람과 우리는 얼마나 닮아있는가 우리 둘은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에 집중하는 게 멜로영화라고 크게 개념을 정한다면 이 영화만큼 그걸 정면 돌파하고 있는 영화는 없다. 그래서 가장 강한 멜로 영화이다. 멜로적인 로맨스라는 개념으로 영화를 보면 아닐 수 있다. 두 세계의 충돌의 경험은 많이 가지고 있다. (웃음)

 

정리: 지유진(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김윤슬(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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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새로운 윤리를 예고하는 육체적 열망

-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이사쿠의 아내>

 

 

마스무라 야스조는 살아있는 동안 ‘작가’라는 직함을 얻지 못했다. 동시대 작가이던 오시마 나기사, 스승이던 이치가와 곤마저 스튜디오를 떠나던 때에 마스무라 야스조는 영화사 다이에이가 1971년에 도산하기 직전까지 스튜디오 제도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바뀌어 그의 영화들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죽은 지 15년이 지난 시점부터이다.

 

생전에 작가로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마스무라 야스조는 평생 동안 비교적 일관된 주제들을 다루어 왔다. 스크린 속에서 구현되는 육체, 그 육체를 감싸고도는 (지나친) 욕망, 공동체의 속박적인 윤리를 뚫고 나가려는 개인들의 공모 등이 이에 해당한다. 1965년 작 <세이사쿠의 아내>에서도 특유의 주제의식이 뚜렷하다. 오카네가 늙은 갑부의 정부였던 사연을 속전속결로 보여주는 도입부와 함께 오프닝 시퀀스가 맞물려 끝나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전쟁에서 돌아온 세이사쿠는 자진하여 아침마다 새벽종을 치는 마을의 ‘모범인’이 된다. 오카네만이 이 종소리에 따라 일과를 시작하지 않는 왕따가 되지만, 홀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오카네와 세이사쿠는 격렬한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다. 볏짚 위에서, 숲 속에서 일찌감치 육체의 합일을 이룬 둘의 관계는 서로의 몸을 파고들면서 점점 더 깊어진다. 이들에게 있어 사랑은 상대의 육체에 대한 욕망과 등가이다. 오카네의 “내가 유일하게 욕망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이다… 당신의 몸은 내 것이다”라는 대사는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를 관통한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인장은 ‘육체’라는 소재뿐 아니라 그것을 극한의 지점으로 끌고 가는 방식에 새겨져 있다. 그 방식이 <아내는 고백한다>에서는 생사를 건 이중택일의 문제로, <만지>에서는 세 남녀의 집단자살로서 나타났다면, <세이사쿠의 아내>에서는 직접적인 육체의 훼손으로 드러난다. 오카네가 세이사쿠를 또다시 전장에 보내지 않기 위해 못으로 눈을 찌르는 지점에서부터 애정의 대상이던 육체는 훼손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 마을 남자들은 도망가는 오카네를 붙잡아 사지를 붙들고 구타한다. 이에 마찬가지로 사지를 붙들린 채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세이사쿠의 모습이 연결된다. 세이사쿠는 눈을 잃음으로써 자의적으로, 타의적으로 자신을 옥죄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다. 명예도, 신념도, 사랑하는 이를 보는 쾌락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오카네는 여전히 관음적인 시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카메라의 시선이 버둥거리는 오카네의 하얀 맨 다리로 옮겨갈 때, 그 프레임 안에는 (마을 남자들의) 폭력으로 인한 쾌락과 성적인 쾌락이 동시에 점유하고 있다.

 

비극으로 곤두박질치던 두 사람의 운명은 밑바닥에서 다시 앞으로 기어나간다. 세이사쿠는 ‘시선’을 잃은 자리에 연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채우기 시작한다. 그는 고독과 타인의 괄시라는 이중구속이 얼마나 오카네를 힘들게 했는지를 깨닫는다. 눈은 세상을 향해 나 있는 마음의 창이라고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 많은 타인의 잣대가 기웃거리는 감시창이었던 것이다. 둘은 이 창문을 닫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온전히 ‘몸’으로만 한 사람을 껴안고 살아가기로 한다. 두 개인이 육체의 합일을 넘어 관념의 합일을 이루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예견하는 것은 반복되는 사회적 고독이 아니라, 이전 세계에는 없던 작은 유토피아의 생성이다.

 

지유진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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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섹스 체크>

 

방탕하게 살아가던 왕년의 천재 육상선수가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반항적이며 재능 있는 한 여공을 스프린터로 키워내 올림픽에 출전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가 올림픽에 출전하는 데는 한 가지 장애물이 있다.

 

이 짤막한 시놉시스만 보면 짐작하기가 쉽지 않지만 <섹스 체크>는 정말 괴악한 영화다. 이 영화의 뼈대는 스포츠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인데 숨은 재능을 가진 소녀가 세상으로부터 배척받는 명 코치를 만나고 정상에 서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인데, 영화 중반에 스포츠 영화의 틀을 깨는 양성인간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며, 양성인간의 성별을 바꾸기 위한 섹스 행각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괴이한 소재와 전개는 영화의 주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섹스 체크>는 스포츠물이라는 장르 안에 있되 그 어떤 스포츠물과 다르다. 특히 엽색 행각을 일삼는 최악의 인간 말종 미야지 코치의 존재는 영화에서 그 무엇보다 눈에 띤다.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영화 가운데 몇몇 작품들, 특히 <세이사쿠의 아내>, <아내는 고백한다> 등은 상투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과 사회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어떤 특별한 욕망을 가진 개인이 있고 사회는 그 욕망을 용납하지 않기에 필연적이고도 격렬한 대립이 발생한다. 그런데 영화 <섹스 체크>는 마스무라의 그런 자장 안에 있는 듯하지만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미야지 코치라는 인물을 통해 변주해서 보여준다.

 

영화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겠다는 미야지의 꿈이 좌절된 것은 중일 전쟁에 병사로서 참전하느라 올림픽에 출전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으로 풀이된다.그는 전쟁을 혐오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메달을 획득하고 일장기를 올린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사회적인 가치와 대립되지 않는다. 미야지는 친구의 아내를 강간하는 반사회적인 인물이지만 또한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가치, 즉 사회적 가치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사회적 가치란 이 영화에서는 국가주의적 가치와 동일한 것이다. <섹스 체크>는 그렇게 국가가 개인의 신체를 어떻게 사유화, 도구화하는지 보여준다. 가령 영화에서 미야지가 자신의 친구 미네, 그리고 미네의 부인과 함께 부르는 올림픽 노래의 가사에는 “너의 팔과 너의 다리는 자랑스러운 일본의 팔과 다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즉 개인의 팔과 다리는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미야지 역시 자신이 조련하는 히로코의 신체를 철저히 미야지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킨다. 미야지가 미네 앞에서 히로코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주무르며 육상 선수로서 타고난 신체라고 싱글벙글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 장면은 미야지 자신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일장기를 휘날려야 한다는 국가적 소명을 실현하는 자이며 히로코의 신체와 인격은 그 소명 앞에 종속된 것에 불과하다는 미야지의 내면적 가치이다. 이 장면에서 미야지는 마치 기수가 훌륭한 경주마를 보듯 히로코를 본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욕망은 미야지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기록 갱신이라든지)과 혼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영화의 현실성을 잘 살려주고 있다.

 

그러나 미야지는 그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것은 히로코를 여자로 대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끝내 무너지는 순간, 그리고 나중에 미쳐버린 미네의 부인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되는 장면에서 직관적으로 찾아온다. <섹스 체크>는 국가주의적 가치에 순응하는 개인의 좌절을 통해 국가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영화다. 이는 당시 일본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는데, 특히 미야지가 중일 전쟁에 참전해서 민간인 여성을 강간하고 포로를 살해하는 장면은 현재 일본에서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이만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제작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게 만들 정도로 사실적이고 냉정하다. (홍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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