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의 문학 세계

모스필름 특별전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러시아의 최대 제작사 모스필름의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다. 이번에는 특별히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작가 겸 소설가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다섯 편 <결혼> <베짱이> <철 지난 꽃> <갈매기> <6호실>을 소개한다. 이에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의 오원교 HK연구교수가 안톤 체호프의 문학세계에 대한 소개 글을 보내왔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1904)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단편 소설가이자 새로운 드라마 형식을 창조한 극작가이다. 체호프는 1960년 1월 17일, 러시아 남부 아조프 해의 작은 항구도시 타간로그에서 파벨 예고로비치(Павел Егорович)와 예브게니야 야코블레브나(Евгения Яковлевна) 사이의 5남 1녀 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규모 잡화상을 운영했던 아버지는 예술과 사회활동에 관심이 많은 개성이 강하고 다소 전제적이고 보수적인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충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현모양처였다. 체호프는 후에 “재능은 아버지로부터, 정신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라고 술회하였다. 1876년 아버지의 경제적 파산으로 가족이 모스크바로 이주한 후, 체호프는 고향에 혼자 남아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고학으로 중학교를 마쳤다. 어린 시절 타간로그에서 다양한 경험과 기억들은 작가의 세계관과 자연관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체호프 문학이 자라나는 자양분이 되었다. 1879년 작가는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의 입학을 계기로 가족들과 재회하게 되지만, 궁핍한 가정 형편 때문에 고단한 대학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체호프는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순수한 예술적 동기라기보다는 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였다. 1880년 3월 잡지 <잠자리>에 실린 첫 작품을 시작으로 ‘안토샤 체혼테’, ‘환자 없는 의사’, ‘쓸게 빠진 인간’ 등의 필명으로 다양한 신문과 잡지에 수많은 단편소설, 콩트, 단막극, 만평을 썼다. 이 시기에는 출판사의 요구로 대부분 짤막한 작품들을 썼는데, 이러한 극도의 간결성에 대한 추구 — “간결함은 재능의 누이이다” —는 장차 단편작가 체호프의 고유한 시학적 원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1884년에 의학 수업을 마친 체호프는 이후 수년간 간헐적으로 의술 활동에 종사하면서 작품 활동을 병행해 나갔다. 의학을 비롯한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서 강하게 지속되었으며, 특히 의학 수업과 의술 경험은 그의 작품들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의술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세밀하고 직접적인 관찰을 가능하게 했다. 체호프는 그의 작품들 속에서 삶의 중대한 고비에 선 인간의 깊은 심리를 파고들면서 공감을 표하되 감상에 젖지 않고 냉혹하리만큼 명징한 객관성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훌륭한 의사와도 같은 작가의 냉철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술가로서의 체호프는 과학자로서의 신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작가는 화학자와도 같이 객관적이어야만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1885년 원로 작가 그리고로비치(Д.В. Григорович)의 충고와 격려, 당대의 유력 신문 <신시대>의 발행인 수보린(А.С. Суворин)과의 만남을 계기로 작가로서의 사명감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체호프는 점차 초기의 희극적이고 풍자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보다 진지한 문학성을 지향하게 된다. 1886년 단편 <추도식>에서 처음으로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체호프는 <우수>, <아뉴따>, <반까>, <자고 싶어> 등에서 일상의 외적 희극성을 넘어 존재의 복잡한 심연으로 천착해 들어가 당대 러시아인들의 삶의 본질적 측면들을 예리하게 반추한다. 그는 자신의 인물들을 결코 치장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짓누르는 온갖 삶의 고뇌와 인간적 실상을 들추어냈다.



1888년 체호프는 러시아 남부 돈 강지역의 여행에 기초해서 자신의 서정적 산문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인 중편소설 <초원>을 집필하면서 확연히 문학적 전환을 이뤄냈고, 마침내 단편집 <황혼녘에>로 러시아 학술원에서 푸슈낀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서 문단의 기대와 주목을 본격적으로 받게 된다. 이시기에 체호프는 산문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극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바노프>, <숲의 정령> 등의 작품은 절제된 체호프적 드라마 기법에 완전히 이르지는 못했지만, 주위의 일면적 이해와 부당한 평가와는 별도로 극작가로서의 면모를 이미 적지 않게 드러내었다. 하지만 문학적 성공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체호프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심각한 고뇌에 빠지고 근본적인 자기 성찰에 몰입하게 된다. 1880년대 말은 체호프에게 문학 세계의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긴장어린 정신적, 예술적 추구의 시기였다. 그는 이제 인간의 불행, 행복, 사랑 등의 보편적 문제를 넘어 당대 러시아 지성인들의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었던 구체적이고 예민한 사회적 물음들, 특히 이른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시대적 과제에 다가서게 되는데, 톨스토이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그 대표적 예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와중에 그는 1890년 4월 강제노역과 유형의 땅, 사할린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길에서 체호프는 <시베리아에서>를 집필하였고, 유형지의 실태를 직접 체험하고 그 해 12월 모스크바로 돌아온 후 <사할린 섬>, <구세프>, <아낙네들>, <유형지에서> 등의 작품을 통해 커다란 문학적,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참을 수 없는 고행의 땅이자 악마의 섬’에 대한 자발적 순례였던 사할린 섬 여행은 체호프의 삶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라는 현실에 대한 인간적 각성과 참회뿐만 아니라, 이제 “문제는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이다”라는 문학에 관한 획기적 인식을 낳는다.

체호프는 이듬해 수보린과 함께 유럽을 여행한 후, 1892년 모스크바 남쪽의 멜리호보 마을에 작은 영지를 구입하여 가족과 함께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체호프는 창작 활동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등의 사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체호프는 레비탄((И.И. Левитан)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가, 학자, 미술가, 음악가 등과의 활발한 교류를 지속하였는데, 1895년에는 야스나야 폴랴나를 방문하여 처음으로 톨스토이(Л.Н. Толстой)와 조우했다. 멜리호보에서 작가 체호프는 문학의 절정기를 맞게 되는 데, 1892~1898년 사이에 <결투>, <6호실>, <신학생>, <3년>, <농부들>, <나의 삶>, <상자 속의 인간>, <나무딸기>, <사랑에 대하여>, <이오니치> 등과 같은 주옥같은 단편들을 집필하였다. 이 작품들은 러시아의 삶의 다양한 영역에 대한 예술적 탐색의 심연과 작가의 인본주의적 신념의 강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1890년대 체호프의 작품들에서는 개인적, 사회적 삶의 차원에서 진리, 미(美),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는데, 인간의 사회적-역사적 임무 혹은 사명이라는 문제가 가장 결정적인 의의를 지니게 되고, 이는 인간적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종래의 이해에 대한 본질적 재고로 나아간다. 예컨대, 체호프는 인간의 행복 추구를 본성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권리로 간주하면서도 인간 존재의 고귀한 목적에 상응하는 행복만을 옹호하였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아르쉰의 땅이나 저택이 아니라 광활함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모든 본성과 특성을 펼칠 수 있는 지구 전체, 자연 전부이다.” 또한 1890년대 말 체호프는 다시 희곡으로 관심을 돌렸는데, 1896년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초연에 실패하여 작가에게 충격을 주었던 <갈매기>는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МХАТ)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뒤이어 <바냐 아저씨>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97년에 체호프는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해야 했으며, 의사의 권유로 1898년 흑해 연안의 휴양도시 얄타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요양을 하면서 체호프는 ‘하얀 별장’을 짓고, 육체적 쇠약에도 불구하고 문학 창작과 지인들과의 만남을 활발하게 펼쳤다. 1900년 체호프는 희곡, <세 자매>를 탈고하고, 이 작품으로 1902년 그리보예도프 상을 수상하였으며, 1898년에 처음 만났던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Ольга Книппер)와 1901년 5월 25일 결혼하였다. 한편 1900년 초 러시아 학술원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던 체호프는 고리키(М. Горький)의 제명에 항의하여 회원 자격을 스스로 반납하기도 하였다. 1903년에는 마지막 단편 <약혼녀>와 희곡 <벚꽃 동산>을 탈고하였다. 말년에 체호프의 문학에서는 인간 내면에 대한 면밀한 숙고와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더욱 깊어지는 가운데 만연한 상투성과 산문성에 대한 예리한 질타와 지양의 모색이 두드러진다. 1904년 6월 체호프는 아내, 올가 크니페르와 함께 독일 남부의 유명한 요양지인 바덴바일러로 갔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1904년 7월 2일 새벽 3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청했던 마지막 샴페인 한 잔을 다 비우지 못한 채, “나는 죽는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다. 그의 유해는 모스크바로 운구 되어 수많은 군중이 애도하는 가운데 7월 9일 노보제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일찍이 톨스토이가 ‘새로운, 온 세상에서 완전히 새로운 글쓰기’라고 일갈한 체호프 문학의 요체는 다름 아닌 ‘문제의 올바른 제기’이라는 독특한 ‘객관성의 시학’이다. 체호프에 따르면 예술가(작가)는 재판관이 아니라 ‘불편부당한 목격자’이고, 따라서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그것의 ‘올바른 제기’이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레르몬토프(М. Лермонтов)적 전통의 혁신으로 읽혀지고 체호프 문학의 새로움과 고유성을 가장 본질적으로 표현해주는 시학적 원리인 ‘문제의 올바른 제기’는 고리키의 진단처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드높은 사고에 기초한다. 체호프의 객관성의 시학은 무엇보다도 현실의 절대적 총체성 앞에서 인간적 인식의 상대성이라는 예술-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문제의 올바른 제기는 당대 비평가들의 힐난과는 달리 세계와 인간에 대한 불가지론적 허무주의나 상대주의의 표출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을 독단적이거나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행동하면서 문제 해결을 시도했던 19세기와 당대의 러시아 문학의 지배적 조류에 맞서는 작가의 반성적 인식의 표출이자, 대상에 대한 대화적 관계를 견지하며 양심적 진리를 끝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예술가 정신의 표현이다. 체호프 문학에서 문제 제기의 올바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서 문제 자체의 합리성과 함께 서사 대상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서사 주체, 즉 작가 자신과의 관계에서 작가적 입장을 원칙적으로 규정한다. 체호프에 따르면 문학가는 화학자처럼 객관적이어야 하며, 일상의 주관성으로부터 절연됨으로써 일체의 강요, 허위 그리고 선입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요컨대 문제 제기의 올바름은 ‘불편부당성’, ‘합리성’, ‘객관성’, ‘냉정함’, ‘냉담함’ 그리고 ‘정의’의 총체이며, 이것은 체호프에게서 양심적 진리를 사명으로 하는 문학의 예술성을 재는 척도이자 강한 인상의 기초이다. ‘산문 속의 푸슈킨’이라고 일컬어진 체호프 문학을 관통하고 있는 이른바 간결성과 절제성은 바로 이러한 시학적 원리의 구현이다.

말하자면 체호프 문학에서 문제 제기의 올바름 내지 객관성은 결코 삶에 대한 자신의 기존 지식의 주장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고 타자의 지식, 견해, 진리에 대한 가치평가, 상이한 진리들의 대조, 진리들의 자질과 조건들에 대한 탐구를 전제한다. 또한 진정한 진리의 끝없는 추구 과정에서 어떠한 대답도 유일한 것으로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제기된 물음에 대한 가능한 답의 추구 노력 속에서 표현된다. 이처럼 문제의 올바른 제기라는 체호프의 문학 창작의 원리는 현실에 대한 불편부당한 인식에 근거해서 그것을 고유의 복합성과 충만함 속에서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서, 섣불리 문제의 해결만을 추구하는 주관성의 시학에 맞서는 객관성의 시학의 본체인 것이다. 한마디로 체호프의 객관성의 시학은 해체와 회색빛 좌절, 산문적인 질서가 지배하는 파편화된 당대 현실에 대한 체호프의 작가적 대응이며, 구원의 가능성이 모호하고, 거대 서사의 황금시대가 종말을 고하며, 부정과 모색이라는 문학의 툰드라 시대에 맞선 작가의 진실하고 냉정한 문학적 형식이다. 바로 이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모든 본성이 만개하고 인간 속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되는 드넓은 세상에 대한 체호프의 인본주의적 갈구가 샘솟는다.

글/ 오원교(모스크바 국립대학 박사,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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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특별 섹션

예술을 통해 교감했던 아름다운 부부,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는 60년대 소비에트 영화계의 해빙기(1957~67년 사이를 말하며 소비에트 예술계에 자유가 꽃핀 시기)에 뉴웨이브를 주도하던 매우 주목받는 부부 영화인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거장 감독인 알렉산더 도브첸코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은 라리사 셰피트코는 장편 데뷔작 <날개>(1966)로 단숨에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녀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떠올리게 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구축했고, 풍경과 인간의 얼굴을 담아내는데 있어 그 누구보다 특별했다. 그러나 4편의 장편영화만을 남긴 채, 그녀는 1979년에 비극적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남편 클리모프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전해지며, 러시아 영화계에 있어서도 더 없이 큰 손실이었다. 이후 엘렘 클리모프는 아내를 추모하는 단편 <라리사>(1980)를 만들고, 아내가 마지막으로 기획했던 영화를 이어받아 <안녕>(1983)을 완성한다. 그의 대표작 <컴 앤 씨>(1985)는 분명 아내의 영화 <고양>(1977)의 세계와 공유하는 지점, 그녀의 영화를 떠올리면서 만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이와 같이 사별 후에도 그들의 교감은 예술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클리모프의 영화는 형이상학적 세계와 리얼리티에 대한 관심이 혼재되어 있고, 이 점 때문에 그는 시적리얼리즘의 거장이라 불렸다. 1980년대 중반 클리모프는 67년 이후로 강한 검열로 억압받던 영화계의 개방을 주도했고, 그동안의 금지작들이 공개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황제에 대한 동정적 묘사 때문에 금지되었던 클리모프의 <아고니>(1981)도 그의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뒤늦게 대중에게 공개된 사례다. 이 영화는 198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슬픔의 기억을 승화시키고 다시 날아오르는 그녀의 비행, <날개>


라리사 셰피트코의 <날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중년 여성(학교 교장)인 나쟈가 느끼는 삶의 무상감과 고독을 그린다. 영화의 첫 장면은 매우 이채롭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포커스 아웃된 형태로 보여주는 듯하지만, 곧 카메라가 뒤로 물러서면 그것이 실내에서 창을 통해 바라본 창밖의 풍경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는 숏은 사실은 여주인공 나쟈가 처한 심리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외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부에 갇혀있듯이, 그녀의 삶도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무언가에 의해 갇혀있는 것이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친구인 박물관 원장도, 딸과의 소통 불능도, 학교의 문제아 소년과의 충돌도 그녀의 삶에 커다란 파동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그녀는 일상의 공허함을 느끼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그녀가 거리를 걸을 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거리가 갑자기 확 비워지는 순간이 있다. 그녀의 시점으로 구성된 숏은 보도바닥을 비추다가 서서히 상승해 하늘로 향하고, 전쟁 당시 영웅적인 파일럿이었던 나쟈와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미챠와의 추억의 단편들을 담은 장면으로 연결된다. 이제야 알게 된다. 그녀의 모든 슬픔은 그 남자의 부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움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이제 그녀는 프로펠러를 작동시키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그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사랑했던 사람에의 기억과 그 사람을 상실했던 슬픔과 온전히 조우하고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시 한 번 하늘로 날아올라야만 했던 것이다.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 슬픔을 승화시키는 비행. 분출하는 삶의 열망. 영화는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그 열망을 보여준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성에 대한 성찰, <고양>과 <컴 앤 씨>

라리사 셰피트코의 <고양>과 엘렘 클리모프의 <컴 앤 씨>는 독일에게 점령당한 러시아의 작은 마을의 저항군과 민중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극한의 상황을 그린다. 영화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어디까지 버텨낼 수 있는가, 어디까지 버티는 것이 윤리적인가에 대해 사고한다.

<고양>의 세계는 하얀 눈으로 가득 차 있다. 산 속의 저항군들이 겪는 가장 큰 고충은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는다는 것이다. 신체로 다가오는 즉각적인 고통, 먹을 것이 없는 사태.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계는 또한 경계가 무화된 세계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특정 지역 벨로루시라는 장소는 하얀 눈과 함께 비워지고, ‘어떤 공간’으로 남는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인간에 대한, 인간성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차원의 성찰로 확장된다. 또한 눈 덮인 대지는 무언가 영적인 것이 깃든, 앙드레 바쟁이 칼 드레이어의 영화를 일컬었던 말을 빌리자면, ‘백색의 형이상학’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곳에 내던져진 인물들은 미묘한 삼각형을 이룬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자,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어 밀고자가 되는 자,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대독협력자인 러시아 고문기술자. 영화는 그들의 얼굴을, 눈동자를 보여준다. 모든 감정은 눈동자에 응축되어 있다. 이들이 처한 극한적 상황은 순교가 더 인간적인지 밀고가 더 인간적인지에 대한 판단 자체를 시도할 수 없게 만든다. 하얀 대지는 신음한다. 이 고통은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컴 앤 씨>는 <고양>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이어받아, 거기에 역사적 리얼리티를 가미한다. 이 영화는 ‘비엘로 러시아’ 마을의 민간인 628명이 독일군에 의해 불에 타 죽은 실제 역사를 재현한다. 저항군에 가입하려다가 쫓겨난 어린 소년은 마을 주변을 떠돌며 이 모든 사건들을 본다. 카메라는 소년을 따라다니며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들을 탐사하고 바라보는 증인의 눈처럼 움직여간다. 영화의 배경은 리얼리티에 입각해 있지만, 동시에 초현실적인 기묘한 느낌이 배어있다. 영화의 후반부는 마을 사람 전체를 밀폐된 창고에 몰아넣고 불태워 죽이는 독일군들의 모습을 오랜 시간동안 보여준다. 카메라는 창고 내부에서 타죽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는 대신, 창고를 둘러싸고 하나의 축제처럼 즐기고 있는 독일군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그들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끔찍하다. 어쩌면 희생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끔찍할지도 모른다. 소년은 이 모든 것을 바라본다. 동시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과 눈동자를 본다. 소년이 겪는 극도의 공포감과 충격은 얼굴의 손상을 통해 드러난다. 그 학살의 축제가 끝날 때쯤이면 소년의 얼굴은 마치 노인처럼 보인다. 그 어떤 것으로도 씻어낼 수 없을 법한 극한의 고통의 흔적이 소년의 얼굴에 새겨져 있다. 인간의 얼굴을 통해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는 감정을 놀랍게 묘사하는 면에서 셰피트코의 <고양>의 경지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소년은 물가에 잠긴 히틀러의 포스터에 총을 쏘기 시작한다. 총이 발사될 때마다 거꾸로 돌아가는 뉴스릴의 영상이 몽타주 된다. 마치 역사를 되돌리고 싶다는 듯이. 역행하던 독일의 역사는 종국에는 히틀러라고 생각되는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사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자 소년은 아이의 얼굴을 향해서는 더 이상 총을 발사하지 못하고 대신 눈물을 흘린다. 앞서 독일의 파시스트는 “아이들이 있으면 다시 되살아난다. 너희들은 존재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고, 소년은 이 말을 들었다. 아이를 향해서는 차마 총을 쏘지 못하는 것, 이것이 그 소년의 내면이 선택한 최후의 인간성일까. 이는 소년이 한 명의 개인으로서 역사를 홀로 마주했던 순간이다. 소년은 군대의 행렬에 합류하면서 다시 집단의 일원으로 사라진다. 카메라는 그 행렬에서 벗어나 숲을 가로질렀다가 다시 행렬을 비추고 멈춰 선다. 그렇게 그 고통의 기억을, 오욕의 역사를 떠나보낸다.

러시아 역사의 중대한 순간을 재현하는 <아고니>

엘렘 클리모프의 <아고니>는 러시아 황실이 무너지면서 제정정치가 끝나는, 20세기 러시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순간을 보여준다. 영화는 일촉즉발 위기의 임계점에 처한 러시아의 상황을 보여주는 뉴스릴 필름을 활용하며,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자막을 통해 이름과 직책을 소개하는 등 역사적 사실을 매우 정밀하게 표현한다. 황실의 무너짐의 중심에는 로마노프 왕족의 최후의 짜르인 니콜라이 2세의 유약함과 황실 깊숙이 침투해 사실상 국정운영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남자 라스퓨틴의 광기가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각료들로부터 혁명의 경과에 대해 보고받던 황제가 현실에서 도피하듯 회의실을 벗어나 비밀 통로로 보이는 복도를 지나 황후의 내실로 들어가는 부분이다. 그곳에서 라스퓨틴은 종교적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고 황후는 그를 숭배하듯 떠받든다. 황제는 거기서도 도피하여 사진현상실로 들어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라스퓨틴은 성자이자 예언자로서의 모습, 광인으로서의 모습, 현명한 책략가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의 중심성은 점점 그가 성인인가 광인인가에서, 그를 둘러싼 인간들과 사회가 벌이는 행동과 인간성의 문제로 옮겨간다.

황실과 민중간의 간극은 도저히 매워질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클리모프는 이 거대한 틈새를 흑백의 기록용 뉴스릴 영상과 컬러로 재현된 영상(픽션)의 몽타주를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러시아의 비극적 역사(전쟁, 폭동, 기아로 비롯된 고통)가 기록된 영상과 황실 내부의 동화적 공간에서 라스퓨틴이 이상한 향락의 쇼들을 벌이는 장면이 충돌하면서, 러시아 황실이 왜 무너졌으며, 왜 무너져야만 했는지를 비판적 시선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역사적 리얼리티와 라스퓨틴이라는 인물 자체가 내포한 영적인 면모에 대한 흥미 모두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황실과 라스퓨틴이 무너져 내릴수록, 흑백으로 표현되는 초현실적인 재현된 이미지가 다수 등장하면서, 컬러와 흑백의 이분법적인 경계가 무너지고 뒤섞이기 시작한다. 기록된 영상과 재현된 영상이 혼재되면서, 황실과 민중간의 간극의 틈새도 좁혀진다. 즉 황실이 무너지고, 나라는 민중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변혁을 표상하는 영화적인 방식의 하나의 훌륭한 사례로 남아있다.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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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오는 27일부터 5월 9일까지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을 연다.

세계 2차 대전 종전 65주년을 맞아 여는 이번 행사에는 미하일 칼라토초프 감독의 <학이 난다>(1957), 게오르기 추흐라이 감독의 <병사의 발라드>(1960) 등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러시아 영화계에 찾아온 일명 '해빙기'를 대표하는 전쟁 영화 10편을 상영한다. 해빙기 이후에 러시아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당시 스탈린 시대의 가혹한 사회, 정치적인 상황을 벗어나 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러시아뿐 아니라, 유럽 전역의 문화 예술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특히 이번 상영작에는 특별 섹션으로 1960년대 후반에 뛰어난 미학과 독특한 시각으로 러시아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유명한 부부영화인 라리사 셰피트코와 엘렘 클리모프의 대표작 6편도 포함되어 눈길을 모은다. 그리고 회고전 기간에는 '해빙기 러시아의 전쟁영화', '러시아 전쟁영화의 서정성'을 주제로 한 경상대 러시아학과 홍상우 교수의 특별강연도 마련되어 있다. 자세한 상영 스케줄과 강연 일정은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www.cinematheque.seoul.kr)를 참고하면 된다.

한편 1923년에 설립돼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필름은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거대하고 생산적인 스튜디오로 약 3천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오늘날까지 중요한 영화기관으로 남아 있다. (신선자)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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