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감독이 선택한 영화 <로제타>는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거의 빈자리 없이 관객들이 꽉찬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매서운 한파보다 더 무서운 취업 한파의 아픔을 더욱 실감하게 해준 다르덴 형제 감독의 <로제타>에 대해 정지우 감독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과 이 영화를 함께 볼 수 있음에 다시 한 번 기쁨을 표시했다. 그의 찬사대로 시네마테크를 찾은 친구들은 거의 쇼크에 가까운 감정의 동조를 경험할 수 있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로제타>는 비평가들에게는 영화 미학과 윤리학의 결합이 가장 잘 구현된 시금석 같은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고 들었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로제타>와 다르덴 형제의 영화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정지우: 먼저 여러분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게 된 데 일조한 것이 자랑스럽다. 볼 때마다 숨차다. 몇 번을 봤는데도 마지막에 숨이 차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연약하고 부패하기 쉽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 일하려는 마음을 끝까지 고수하는 주인공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연민을 느낀다. 마지막에 새로 받아가는 가스통을 들고 가는 로제타의 모습은 너무 무겁다. 두 감독의 시선과 견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고개 숙이게 된다.


김성욱:
마지막 장면에서 로제타는 자살을 시도하는 듯한데, 그것도 모르는 남자는 오토바이를 몰고 와 로제타를 훼방을 놓는다. 그 느낌이 영화의 여운을 주는 것 같다. 사람들의 마음과 감정을 몰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다르덴 형제가 특별히 주목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정지우: 사회적 주제, 즉 일할 기회가 없는 상황에 놓인 젊은이들에 대한 언급을 이런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게 경이롭다. 환경 때문에 인간이 어디까지 삐뚤어질 수 있는지를 형상화한 작품들은 많았지만, 다르덴 형제는 인물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고 변치 않을 것을 확신한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할 수 있을까? 픽션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저만큼 버틸 수 있다는 것은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어떻게 저기까지 인물을 믿을 수 있을까? 자신을 도와 준 남자를 고발해서 기회를 갖게 된 것까지의 처절한 과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자신의 그릇만큼 인간을 그리는데, 이 두 분은 참 경이롭다고 생각한다. 계속 봐도 그렇다.


김성욱:
감독이 믿고 있는 것을 표현했기 보다는 인물이 갖고 있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 작가의 특별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지우: 영화라는 게 전지전능한 감독의 역할로 모든 것을 허구로 만들 수 있지만 어느 순간에 영화를 만들다보면 내가 믿을 수 없어서 장면을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배우가 되묻는 경우에 거짓말을 자신 있게 할 것인가, 말을 안 하거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순간이 닥치는데, 이 영화는 내가 감독이었다면 자신 없었을 거다. 밀가루 부대를 안고 놓지 않으려는 장면을 찍을 때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텐데, 카메라 뒤에서 버텨내고 있는 감독이 무시무시하다. 사회의 이런 일말의 단서들이 계기가 되어 내가 믿는 수준과 한계의 무의식이 영화에 반영 된다. 사람을 믿고 있는 감독의 끈기가 대단하다.


김성욱:
감독이 어떤 것을 이해했다기보다 소녀를 이해했다고 보이는데, 가령 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물에 빠지는 순간 카메라는 그녀가 손을 놓았는지 아니면 미끄러졌는지 분명하게 그리지 않는다.

정지우: 이 영화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다큐 같은 느낌을 주지만 아주 정교한 미스터리 영화처럼 계산된 움직임이 자로 잰 듯 수행되고 있다. 남자가 물에 빠지는 순간 카메라가 손을 정확하게 안 보여주는데, 만약 카메라가 손을 클로즈업으로 잡고 악마적 눈빛을 보여줬다면 서스펜스가 돼서, 이 남자를 어떻게 곤경에 빠지게 할까 기대했을 것이다. 사장의 아들도 아주 잠시 보이는데 이런 방식으로 정보가 매우 정교하게 제공된다. 편집과 사운드의 창조적 활용도 탁월하다. 엄마의 캐릭터도 모성이 없고 짐이 되어 딸을 죽고 싶게 만든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희생적인 엄마에 의해 보호받고 자란 느낌이다.


김성욱:
로제타라는 소녀는 보호받을 여지가 전혀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다. 제대로된 부모도 따를 수 있는 인물이 없는 수직적 관계의 부족과, 다른 동료가 한 명 해고되어야 자기가 일할 수 있는 수평적 상황의 한계도 있다. 그 어느 쪽으로도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상태인데, 그런 관점에서 카메라가 인물을 따라가는 것은 적절하다. 그것은 이 소녀의 고립무원의 상태를 보여주면서 그녀가 관계해 가질 수 있을수 있는 공동성을 탐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르덴 형제의 전매특허처럼 보이는 카메라의 위치와 인물을 따라가는 방식, 움직임의 존재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정지우: 다르덴 형제가 사용했던 같은 종류의 16미리 카메라로 찍을 기회가 있었는데, 다르덴 형제의 작품과 비교될까봐 포기한 경험이 있다.(웃음). <로제타>는 계획되어 있고 찍기 어려운 방식으로 찍혀있다. 심도가 얕아서 포커스를 맞추기 힘든데도 정확하고 계획적으로 카메라를 운용해 완벽하게 연출자의 의도대로 화면을 통제하고 있다. 할리우드 문법인 시선과 그 대상으로 구성되는 방식에서 자유롭다. 무엇을 보는지 어디로 가는지 정보가 소개되지 않는데도 큰 틀에서 보면 정서적으로 이해가 간다.


김성욱:
마지막 장면의 카메라 느낌은 볼 때마다 큰 울림이 있다. 그 전까지는 여자가 바라보거나 카메라만 있고 인물은 없다는 느낌이 드는데, 마지막 장면의 로제타의 시선에 바깥에는 그나마 남자가 있다.

정지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남자가 일으켜줄 걸로 생각되는데 위로가 된 건지, 친구가 생긴 건지 죽기로 짐작되는 걸 멈출지, 아무튼 그 남자가 조금 위로는 될 것 같은 느낌이긴 하다. 위대한 영화의 어떤 단계는 아무리 참혹하게 밀어붙여도 어떤 방식으로든 보는 사람에게 위로가 된다.


김성욱:
어떤 구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보다는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려는 느낌이다. 이런 영화를 봤을 때 카메라의 시선은 알겠지만, 인물의 심리는 알기 힘들다.

정지우: <아들>이란 영화의 끝은 더 혹독하다. 갑자기 블랙이 되면 모든 관객이 일어나야 할지 머쓱해하며 감정의 동조가 된다. 예술은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순간적인 이동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자리를 흔들기 때문에 불쾌하고 당혹스러울 수 있지만 예술적 경험으로써 훌륭할 수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전주 영화제에서 허우 샤오시엔의 <해상화>를 보았는데 단체로 온 고등학생들이 내내 졸다가 엔딩에서 박수를 쳤다.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이 느낀 영화적 경험을 분명 어떤 순간에 회고할 수 있을 것이다. 자다가 나가도 다음에 또 와서 보게 되는 소중함이 바로 그것이다.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영화라도 보게 만드는 시네마테크의 위대함이 아닌가.(웃음)



관객1: 영화 상영 전에 이해영 감독과 신하균씨가 추천한 <부기 나이트>가 매진되었다. <로제타>도 거의 매진이었다. 감독님의 승리라고 본다.(웃음) 다르덴 형제의 인터뷰 중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현실에 참여하기 위함이라 했다. 그들은 본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영화를 만들고 흥행에도 성공하는 것 같다. 흥행을 무시할 수 없는데 어떤 타협을 하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박해일씨와의 비화도 듣고 싶다.

정지우: 난 박해일을 사랑한다. 부부동반으로 만날 때도 그렇게 말한다.

김성욱: 왜 사랑하나? 물론 사랑엔 이유가 없겠지만.(웃음) 박해일이란 배우는 뭔가 평평하고 매끈한 마스크의 미묘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얼굴의 표면 아래 무엇이 있을지가 궁금하다. 감독으로서의 느낌은 어떤가.

정지우: 소년 안에 있는 범죄자의 느낌에 매혹 당했다. 좋은 배우들은 예민함과 성숙함을 모두 갖고 있다. <은교>라는 작품에서 분장을 하는데 8시간이 넘고, 지우는데만 2시간이 걸려도 그걸 버틴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상업적 타협은 어수룩한 나는 하기 힘들다. 마케팅 팀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관객들은 잘 속지 않는다. 타협을 통해 혹은 관객을 속여 가며 돈을 쓰게 할 수는 없다. 그냥 죽도록 좋고 이걸 꼭 해야겠고 이게 아니면 안 된다는 방식으로 접근할 뿐이다. 관객의 마음을 미루어 안다는 것은 거짓이다. 내 영화 세 편중 한 편만 수익을 거뒀고, 나머지는 손실을 보았다. 그래도 네 번째 영화를 찍는다. 잘 될 것 같아서가 아니라 로제타가 밀가루 부대를 잡고 있듯이 그렇게 버티고 하는 거다.


관객2:
‘은교’라는 소설을 봤는데 내러티브가 명확하거나 줄거리를 따라가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매력으로 영화화하기로 한 건지, 많은 사람들이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 궁금하다.

정지우: 대중적이지 않을 것 같은데 투자를 받은 것 같다.(웃음) 소설은 늙어가는 기분이 슬프다는 생각을 하는 도중 접하게 됐고, 영화까지 만들게 됐다. 사람 마음 밑바닥까지 가는 감정들에 대해 매료되는 것 같다. 로제타처럼 사람 마음의 끝까지 가면 어떤 기분인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느끼며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넉넉하게 촬영을 마쳤다.


관객3:
로베르 브레송의 <무세트>가 떠올랐다. 소외된 여자와 숲과 호수, 그리고 물에 빠져 자살하는 장면까지 다르덴 형제가 의식한 것은 아닌가.

정지우: 다르덴 형제가 브레송 영화를 봤을 것으로 생각된다. 브레송의 연기 연출 방식과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배우에게 인과나 실제 감정의 요구가 아니라 전체적 맥락의 공감만 있고 정확한 디렉션 없이 많은 반복을 통해 의식적인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영화의 새로운 미학과 움직임을 만들고 새로운 감정을 환기시킨다. 다르덴 형제는 지금 벨기에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보다 주목했다고 본다.

김성욱: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 하지만, 브레송의 <무세트>는 몸의 무게와 영혼적인 은총, 개인과 실존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로제타>는 사회성과 공동성의 추구에 훨씬 무게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르덴 형제는 원래 다큐를 만들었고 픽션으로 넘어올 때 현실의 개입을 증가시키고자 했다. 자신들의 동네에서 공장은 폐쇄되고 파업은 실패했고 노동자는 공동체는 상실되고 파괴되었다. 자연스럽게 공동체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로제타 같은 이들을 보호해 줄 노조나 전 세대가 없어진 것이다. 불가피하게 픽션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정지우: 영화를 보고 많은 분들이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는 게 위안이 되고 정말 훌륭하다. 이렇게 사시면 행복해진다.(웃음) 나도 얼른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고 싶다.





정리: 김준완(관객에디터) 

사진: 최용혁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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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세상을 향해 단 한순간도 표정을 풀지 않는 한 소녀가 있다. 소녀의 소원은 단 하나, 빼앗긴 일자리를 되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다시는 누구에게도 결코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가난한 캠프촌의 트레일러에 사는 소녀는 알콜에 찌든 엄마를 보살펴야 하고, 가스와 수도비와 월세를 내야 한다. 모든 것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 소녀의 일상은 언제나 벼랑 끝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다. 그런 소녀에게도 어느 날 자신을 다정하게 쳐다봐주는 남자친구가 생긴다. 지긋지긋한 엄마를 피해 남자친구의 집에서 처음으로 일상의 굴레를 잠시 벗어두던 밤, 소녀는 혼자 속삭인다. “넌 친구가 생겼어. 난 친구가 생겼어. 넌 정상적인 삶을 산다. 난 정상적인 삶을 산다. 넌 시궁창을 벗어난다. 난 시궁창을 벗어난다.” 이 작은 기대, 이 간절한 다짐은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다시 반복되는 현실 앞에서 산산조각이 난다. 소녀는 살기 위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주던 남자친구마저 배신해야 한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소녀에게 망설임은 사치다.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형제는 언젠가 자신들의 영화 속 인물들이 계급에서조차 빗겨난 이 시대의 “탈계급화된” 존재들이라고 말한 적 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온 이주민들이거나, 노동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빈민층이거나, 그리하여 자신의 아이마저 팔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자들이다. 다르덴 형제가 이 무력한 존재들이 헤쳐가야 할 시간을 찍는 방식은 (이제는 ‘다르덴 스타일’이라고 일컬어지는) 핸드 헬드로 인물들의 등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가는 것이다. 그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건 궁지에 몰려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힘겹게 나아가야만 하는 육체, 위태로워질수록 더욱 날 것 그대로 드러나는 빈곤한 육신뿐이다. 다르덴 형제는 인물들에게 카메라를 밀착시킴으로서 상황을 전환시킬 드라마틱한 사건도, 지옥 같은 현실을 위로해줄 그 어떤 환상도 개입할 여지를 두지 않는다. 그 흔한 음악도 없으며 인물들의 가파른 숨소리와 그 절박함에 무심한 세계의 소음들만 있다. 그런데 이 집요한 스타일만큼 주목할 것은 다르덴의 영화들이 이후, 다르덴 미학을 매너리즘적으로 취하는 여타의 다른 작품들과 갈라지는 지점이다. 인물들을 좁은 프레임 안에 가두고 끊임없이 밀고 가던 다르덴의 영화적 형식이 결국 도달한 곳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그 곳은 선택의 자리다. 다르덴의 인물들은 스스로를 내버리지 않기 위한 마지막 안간힘으로 결단의 순간과 마주하곤 하는데, 그 순간은 비록 뒤늦게일지라도 타인의 눈을 비로소 마주하고, 타인의 손을 잡는 자리다.

<로제타> 역시 그러하다. 죽는 것조차 물질적 조건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저 희극적이어서 너무도 비극적인 상황에서, 로제타는 처음으로 부당한 현실이 아닌, 초라한 자신을 향해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이 가여운 소녀를 어찌하시렵니까. 그 때 무너진 소녀를 일으켜 세우는 자는 다름 아닌 그녀에게 무참하게 일자리를 빼앗긴 남자친구다. 이 가난하고 질긴 밑바닥의 작은 새들. 그러니 이 작은 새들은 어찌되었든 다시 살아나갈 것이다.

by 남다은_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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