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중계] 김성욱 프로그래머 '마스무라 야스조의 미학' 강연

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이 한창인 21일 오후 <아내는 고백한다> 상영 후,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특별강연이 있었다. <아내는 고백한다>를 중심으로 마스무라 야스조가 일본영화사에서 갖는 의미와 그의 영화세계의 전반적인 미학에 대해 이야기한 자리였던 그 시간을 일부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전반적인 마스무라 야스조의 이야기와 방금 보신 영화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드리겠다. 오시마 나기사는 마스무라의 영화가 나왔을 때, “이것은 돌파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지금 시점에서 마스무라의 영화를 보는 것은 전혀 몰랐던 작가와 배우를 만난다는 의미와 함께, 이것이 일본영화사에서 어떤 돌파구로 작용했으며 현 시점에도 돌파구로 작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내포한다.

 

일본영화계의 하나의 전통은 욕망의 표출을 억제했던 경향이다. 마스무라는 이와 같은 상황

에서 개인을 그려내면서 일본 누벨바그에 직접적 영향을 줬다. 이때의 개인이란, 모든 것에서 떨어져 나온 한 개체가 아니라, 조직과 집단과 사회와 구조와 틀, 어떤 관계 안에 있는 개인이었다. <아내는 고백한다>에서도 이는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가령 로프와 매달린 사람의 수직적 구조가 그것이다. 중간에 매달린 여자를 중심으로, 위에는 기어 올라가서 만나야 할 젊은 남자가 있고, 아래는 남편이 있는 수직적인 선이 되는 로프는 동시에 여자에게는 하나의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로프에 매달린 것은 생명과 연관됨과 동시에 자신을 옭죄는 올가미인 셈이다. 마스무라가 주목한 것은 그 수직의 안에서 무언가를 끊어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마스무라는 인간의 외면적인 것, 신체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가령 이 영화의 비에 젖은 머리, 조금 까매진 양말, 진흙을 밟고 걸어온 듯한 여주인공의 모습, 손끝 연기나 얼굴 표정, “내 몸이 얼마나 야위었느냐”라고 말할 때의 반지와 시계의 헐거움. 그런 점에서 <눈먼 짐승>이란 작품은 마스무라의 세계를 응축해서 보여주는 영화라 하겠다. 촉각적이고 표피적인 것에 몰두하는 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예술가의 눈은 멀게 되고, 이는 맹목적인 여성의 형상과 닮아있다. 눈 멈과 맹목성. 표피적이고 표면적이고 촉각적임, 그것과 눈이 멈의 상태. 눈이 먼 상태에 빠진 인물들의 사랑에의 맹목성. 이런 것들은 단순히 이야기의 구조 내에서 형성되는 것만이 아니라 보다 물리적이고 촉각적으로 진행된다.

 

마스무라의 영화는 심플한 점이 매력적이다. 가령 <아내는 고백한다>에서는 “사랑 한다면 죽일 수도 있다. 죽일 수 없다면, 죽을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단순한 테마가 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가? 사람을 죽이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이율배반적인 것인가?” 이 테마 하나에 몰두해 영화 전체가 흘러가는 구조다. 핵심이 무언인지 정확하게 느낄 수가 있고, 이 하나를 맹렬한 속도로 파고 들어간다.

 

사랑과 죽음이 분리 불가능한 상태가 펼쳐진다. 이는 일종의 질문인데, 이 질문이 제기되는 지점이 어디인가에 그 중요성이 있다. 이 영화에서 자일을 끊게 되는 지점에서 이 여자가 느낀 것은 진정으로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죽이는 것과 사랑을 깨닫는 것이 같은 순간에 벌어진다. 뭉개지고 절단 난 남편의 시체를 바라보는 것. 그것과 함께 삶과 생으로 충만한 젊은 남자에의 열망이 대조된다. 시체, 죽음과 마주한 이후에 남아있는 여자의 삶에의 데카당스적 열망. 이는 전후의 영화라는 환경에서, 시체들과 마주한 인간의 에너지에 대한 탐구이다. 그 에너지는 곧 사랑, 욕망과 열망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가장 에로틱한 것이다. 에로틱한 것은 작은 죽음이다. 일종의 오르가즘. 작은 죽음의 경험을 얻는 것은 영화를 볼 때의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하다. 영화와 에로티시즘은 떼어낼 수 없다. 그것을 영화적 형식과 본성과 연결시켜나가는 마스무라 영화의 매혹성이 있다. 즉 단순한 센세이션을 넘어선 영화의 본질을 담아내는 것이다.

마스무라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 안에서 충돌되는 힘의 역학관계를 대중영화가 갖고 있는 이항대립의 요소로서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충돌의 에너지는 유동적인 면이 있다. 원래 설정된 캐릭터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캐릭터들이 변이되는 모습에서 발생하는 충돌이기 때문이다. 인물의 변이라고 하는 것. 어떤 지점에서 만들어지고, 변이를 만드는 추동력이 무엇인가? 인물이 하나의 개인으로서 등장하게 되는 지점까지 영화가 끌고 가, 어느 순간 내부의 에너지가 분출되어 나갈 때, 개인성이 탄생한다. 그러한 변이 지점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섹스 체크>이다. 힘과 에너지를 갖게 되는 몸, 성차의 문제, 그 변이의 과정들이 하나의 주제나 테마, 혹은 소재처럼 작동하는 영화이다. 마스무라는 그것을 가정 내의 공간까지 끌어온다는 점에서 선구적이다. 이런 에너지, 힘들의 격돌을 무엇보다도 영화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것이 마스무라의 역량이다.

 

마스무라의 영화가 현재 어떤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마스무라의 영화가 갖고 있는 현대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회성을 잃어가는 영화들, 어떤 관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터무니없는 개인을 다루는 영화들과는 달리, 마스무라의 영화는 사회적 밧줄에 얽혀 있는 자에게서 개인성이 출현하는 지점, 사랑의 탄생이자 열망의 탄생, 그것이 죽음과 쇠락을 경유하는 것을 보여준다. (정리: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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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영화를 선정해 상영하고, 상영 후 영화에 대한 강좌와 함께 관객들과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인 ‘시네클럽’ 행사를 하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모든 영화인들의 안타까움 속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에릭 로메르의 유작 <로맨스>를 상영하고, ‘에릭 로메르를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열띤 강연을 펼쳤다. 로메르의 유작을 통해 그의 작품이 남긴 의미와 가치를 관객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소중한 자리였다. 그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로메르가 타계한 다음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에릭 로메르의 밤'이라는 회고전을 했어요. 저희도 로메르 회고전을 열고 싶었는데, 한국에 수입된 영화가 <여름 이야기>하고 방금 보신 <로맨스>라는 영화하고 두 편밖에 없어서 회고전 개최가 쉽지 않은 사정이죠. 로메르 회고전은 아트선재 시절에 개관 프로그램으로 했던 적이 있었고, 국제 영화제 때문에 로장주 필름에서 배급담당을 하시던 분이 한국에 오시면서 또 한 번 연 적이 있었어요.

 

로메르는 대단한 절약의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박을 터트린 적은 없지만 적은 비용으로 만들어서 손해를 결코 보지 않는 방식의 작가예요. 촬영 당시에도 절대 두 번 이상 촬영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로메르는 ‘영화는 거절의 예술’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a라는 선택을 하느냐 b라는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에서 a를 선택했을 때 b를 버리게 되는 것을 말하는 거죠. a를 선택했을 때 b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으니까 여벌로 찍는 장면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거절의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영화는 끊임없는 반복과 변주로 이루어져 있어요. 모든 영화를 통틀어 연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연애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작가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하나의 스타일을 일관되게 자신의 전 작품에 담아냈어요. 모든 예술가들은 자신의 일관된 주제와 테마를 반복해서 보여주지만 매 작품마다 변주를 해서 보여 주는데 로메르도 이런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로메르 영화에 대해서 거의 언급이 안 되는 것 중 정말로 중요한 것은 공간에 관한 문제 같아요. 로메르는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 아니고 공간의 예술’이라고 말한 적도 있죠. 70년대에 로메르가 찍은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건축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요. 그건 공간과 장소에 대한 관심의 결과물인데, <내 친구의 남자친구>, <녹색광선>, <비행사의 아내> 같은 작품은 실제로 70년대 다큐를 찍었던 곳에서 촬영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일산 신도시처럼 공간 자체가 한정되어 있고 사람들이 밀집되어져 있으면 그곳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거죠. 우연히 만나고 우연성을 빙자해서 만나기도 하는 사건들이 전개가 되는 곳, 그런 공간성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일종의 거대한 아쿠아리움 같은 공간인거죠.

 

로메르는 우연성과 즉흥성을 즐겼던 감독이에요.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가 터무니없는 우연성을 내포하고 있죠. 예를 들어, <파리의 랑데부>은 우연을 가장한 부조리한 놀이들을 벌이는 영화입니다. 우연히 만나고 우연히 내가 거기에 있고 하는 식의, 즉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놀이나 게임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것들이 로메르 영화를 특징짓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로메르의 영화는 주제적인 측면에서 독특한 부분이 있죠. <로맨스>에 그런 게 집대성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데요, 몸과 영혼과 관련된 부분이 전체적인 테마, 자연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문제, 남녀의 사랑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 한 사람의 몸이 사라진 이후에 그 사람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 불멸성 등. 이런 것들이 영화 전체에 있는 테마예요. 그리고 이것들의 최종적 국면으로서 은총적 세계는 로메르가 평생을 걸쳐서 자기 영화를 통해서 담아냈던 부분이죠.

 

아이러니하게도 로메르의 명성이나 위상에 비해서 그의 영화가 가진 풍부함이 많이 담론화되어 있지 않아요. 인터뷰나 서적 등도 별로 없고요.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지만 풍부하게 언급되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정말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돌아가신 이후이긴 하지만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까지 확실히 다 모아놓고 전부 다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좀 더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다양한 지점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이후에도 또 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최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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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인터뷰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수첩에 적어 두었던 몇 가지들 중 일부;

"누구? 김성욱 프로그래머이자 영화평론가 개인을 인터뷰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시네마테크 공모제에 대한 인터뷰를 하는 것인가. 이미 일은 벌어졌다.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오늘의 질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이외에도 몇 가지 자잘한 것들을 정리했다. 개인적으론 이번 사태에 대해 마음이 그냥 단순하게 "무겁다"기 보다는 말로 할 수 없이 복잡 미묘하다. 원래 약속 되었던 인터뷰 일정은 친구들 영화제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잠시 연기가 되었고 다시, 인터뷰는 1월 27일 수요일로 결정 되었다. 그리고 그 날 오전, 영진위가 추진한 '영상미디어센터 사업자 공모 결과'가 발표 되었다. 원래 준비하고 있었던 질문과 질문의 흐름은 삭제되거나 수정되었다.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그러리라 생각했지만, 진짜로 그럴 것이라 생각지 못한' (혹은 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요즘 들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 '상식선'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상식선의 범주가 무한하게 확장, 변형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인터뷰 중에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언급 했듯이 '파기'가 될 수도 있다. 누군가는 '국어사전을 다시 써야 하는 시대'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인터뷰 내용은 녹취한 것을 정리 한 후, 다시 한 번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손을 거쳤다. 현재 공모제에 관한 이야기들 대부분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오갔던 이야기들 중 어떤 부분은 바꾸거나 조금 손을 보았다.



양 : 원래는 얌전한 질문부터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미디액트 사업자 공모 결과를 보면서 질문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질문이 될 수도 있지만, 사업자 공모 결과를 보신 소회가 궁금합니다. 어떤 기분이셨나요?

김 :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하지만 진짜로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속해 왔던 이들의 문화적인 활동에 대한 평가가 전혀 없는 결과다.



양 : 아트시네마를 운영하시는 분들, 그러니까 내부에서는 대략 어떤 이야기가 있으셨나요?

김 : 시네마테크 공모제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진위가 지난 8년간의 정책을 새롭게 바꾸려고 한다면 그 만큼의 충분한 평가와 논의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공모제와 관련해 그 어떤 투명하고 공개적인 입장을 영진위가 아직까지도 내비친 적이 없다. 영화문화 정책이라는 건 긴 시간을 두고 생각하는 문제다. 공모제는 정책적 방향도, 시네마테크에 대한 영진위의 입장이나 태도도 없는 졸속적인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영화와 관련되어 있는 기관에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을 보면, 지금 우리의 영화문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양 : 아트시네마는 지금 상영 공간인 허리우드 극장으로는 2005년도에 들어왔습니다. 공간적으로 좀 더 여유 있는 곳을 찾으면서, 친구들 영화제를 시작했습니다. 올해까지 5년차가 됩니다. 지금까지 5년 동안 친구들 영화제를 진행하면서 쌓아온 결과에 대해서 내부적인 평가랄지 그런 것이 궁금합니다.

김 : 어떤 것 같나?


양 : 개인적으론, 3회는 뭔가 좀 동어반복 같은 느낌이 있었고, 올해는 공모제라는 것이 걸려 있어서 그런지 정말 마지막으로 총력을 다했구나, 라는 느낌이었었죠. 프로그램을 봐도 그렇고, 상영작 수도 가장 많고, 참여한 감독들의 지원을 보아도 그런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김 : 어려울 때 더 많이 참여하는 법이다. 하지만 사회적 영역 안에서 전혀 여건들이 개선되지 않았다고 보는데, 물론 개선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어디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일 테고.



양 :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

김 : 언제나 두 가지일텐데, 그 하나는 관객들이고, 또 하나는 정책적인 부분들이다. 어느 나라나 시네마테크나 이런 문화 운동이 사회적 영역 안에서 자리를 잡는 것은 관객의 몫과 일정 부분은 정책결정자의 몫인데, 정책결정자의 몫이 지금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런데 아까 말한 동어 반복이라는 것이 어떤 부분에서 말한 것인지 궁금하다.


양 : 아트시네마에서 1년에 치루는 큰 행사 두 가지가 친구들 영화제와 시네 바캉스, 이렇게 두 가지가 있는데, 상영작도 좀 겹치는 부분도 있었고, 조금은 관성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었죠. 아트선재에서 허리우드로 옮기게 되면서 안정적인 상영 공간에 대한 필요성은 더 크게 대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년이라는 기간이 짧은 기간은 아니고, 그러한 필요성에 의해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만한 시간이 분명히 있었지만, 1년에 두 번의 큰 행사를 통해서 좀 더 환기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말씀하신 대로 관객의 몫도 분명히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일정 부분은 아트시네마가 선도적인 입장은 분명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 더 적극적인 피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이 있는 것이죠.

김 : 그런 부분이 지금의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양 : 일정부분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5년이란 기간은 충분할 수도 있는 기간이고, 실제로 전용관 건립에 대해서 정책입안자들과 논의가 진전이 된 적이 있었죠.

김 : 2007년 말에서 2008년까지.

양 : 서울시 측과 (전용관) 부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지만, 결과적으로 논의가 흐지부지 되어버렸죠. 왜 그렇게 되었는지.

김 : 사회적 합의가 그 정도 수준이 안 된다는 것인데, 전용관의 건립이 진행이 되다가 파기가 된 것에는 합의를 이루어냈던 것을 책임성을 갖고 진행을 제대로 못한 측에 문제가 있다. 그게 누구인가? 그건 당연 지금의 영진위의 문제다. 문화 영역은 어쨌든 보존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 손실되고 있는가와 무엇을 유지해 나갈 것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정책 결정자들이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이, 어떤 부분이 보완이 되어야 하는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고. 언제나 새롭게 판을 짜려는 생각만 했다.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해서도 최소한 충분한 논의와 시간이 필요하다. 뭔가 새로운 정책이 만들어진다던가, 기존의 해오던 것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른 방향으로 전환을 한다 해도, 그것 역시 충분한 근거가 있고, 충분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동어반복성에 관해서는, 뭔가 새로운, 획기적인 것을 자꾸 만들어가는 것이 아트시네마의 역할인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양 : 그렇지는 않습니다. 뭔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매년 새롭게 환기되는 질문, 그러니까 관객들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제시되는, 제시 되어야 하는 좀 더 적극적인 질문 같은 것이 아쉬웠다는 것입니다.

김 : 난 차라리 매년 동어반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매년 똑같은 영화 백 편을 계속 틀 수도 있고, 그런 반복 안에서 뭔가를 찾고 발견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계속 새로운 것만 찾는 것이라면, <아바타>를 상영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만, 그런 것이 새롭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시네마테크에 기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국제영화제들이 새로운 것을 늘 보여줄 수도 있다. 반면에 시네마테크에서까지 새로운 것을 요구한다면? 시네마테크는 어떤 반복과 지속 안에서의 새로움을 찾는 곳이다.


지속적인 반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화의 영역에서 지금의 문제가 있어온 것이다. 반복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가는 것이 관객의 몫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평가가 왜 필요하고, 영화에 대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 왜 필요한가. 그들은 지속적인 것 안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매번 '신상'만 찾아다니는 것을 이 공간에서 기대할 것인가? 누군가 그런 표현을 썼지만, 여기서 백화점의 물건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물건들을 전시하고, 금새 팔리지 않으면 폐기처분하고, 또 새로운 물건들을 내놓고 사람들을 계속 유혹하는 것이, 그것이 새롭다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소기의 목적을 이루어 내려는 것은 어떤 시간적 지속 안에서 영화의 충분한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선도적 역할도 있을 수 있다. 근래의 새로운 영화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하고 있지 않나.

 

 

 

시네필은 신상애호가들은 아니다. 그들은 더 오래된, 낡은 것에서 조차, 그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가치들을 발견하려는 자들이다. 그것이 쉽사리 버릴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간직하려 하는 이들이다. 물론, 다른 역할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를 상영한다. 물론 포인트는 이중적이다. 영화예술가, 작가, 그들의 작품을 보존하자는 것이고 동시에 관객을 유지하자는 것인데, 이것이 영업을 위한 개념은 아니다. 관객이 영화와 만날 수 있는 지점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 기회들을 충분히 제공해 주는 장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다. 우리가 더 나서서 관객들에게 요구할 수도 있고, 무언가를 해달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것은 분명 관객의 몫이었다. 관객들이 충분히, 그 만큼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느끼지 못했다면, 결과가 이렇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우리가 충분히 관객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관객을 영화로 설득하려는데, 그 이외의 나머지 이야기들은 보조적인 것이다. 그들이 후원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계속 반복적으로 요청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다. 정당한 관객이란 어떤 위기의 순간에 어떤 판단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만큼의 응답과 화답을 만들어 내기위해 더 전략적인 행동들을 했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니다. 시네마테크라는 영화를 사람들에게 스며들도록 하는 곳이다. 스며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설득하고 강요해서, 이것이 대단한 것이다, 아무리 포장을 한다 해도 그건 부차적이다. 그런 것은 지금의 모든 영화들이 다 하는 일들 아닌가. 스며들기 전에 일단 세뇌를 한다. <아바타>로 100분 토론을 하는 것처럼. 그게 더 중요한 주제인가? 시네마테크를 두고 왜 방송에서 토론을 할 수 없나? 아니, 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 보존과 관련해 논의를 할 수 도 있다.


물론 작품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그래서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다. 나 또한 한 작품에 스며들어가는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 작가도 있고, 이제야 이 작가가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그 정도의 지속을 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견뎌 줄 수 있는 느린 관객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관객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최적의 스며듬 이라는 것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아무런 선전도 없고, 그냥 그 사람이 영화와 맞닥뜨려서 적셔지면 그게 최적이다. 공부하기 싫은 사람에게 계속 아무리 강요를 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설명도 있고, 해설도 있고, 유명한 영화감독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해도 그것들 마저도 다 보조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관객들에게 시네마테크의 어려움과 문제에 대해서 알리지 않았다거나,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말하지 않은 것도 하나의 문제라면 문제일 수는 있다. 하지만 스며드는 존재로서의 관객이라면 그걸 간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간파하는 것이다. 거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동시에 영화가 놓여 있는 상황을 간파하는 것도 정당한 관객의 몫이다. 진정한 관객이 아니고 정당한 관객 말이다. 그런데 그런 부분은 우리가 아무리 호소한다고 해도 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양: 아침에 영상문화센터 관련한 보도 자료와 메일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아트시네마에도 자주 찾아오는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의 대사가 있죠.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꼭 당사자들의 기분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아트시네마도 그냥 강 건너 불처럼 볼 입장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전부터 전용관에 대한 요구는 있었고, 움직임도 있었지만, 올해 친구들 영화제를 하면서 전용관 건립위원회가 발족되었죠. 바꿔 말하면 정말로 때가 되었다는 위기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움직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관한 아이디어는 누가 먼저 내셨나요?

김: 그것은 이미 2007년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에서 제기 되었던 것이고, 그 해 전용관 건립을 위한 친구들 영화제를 표방했다.



양: 그런데 위원회는 따로 없었습니다. 그 당시엔.

김: 그때는 위원회를 따로 구성하지는 않았다. 영진위 내에서 위원회가 구성됐다. 그것이 4기, 5기로 가면서 위원회는 유명무실해졌다. 현재 전혀 진행상황이 없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좀 더 주체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는 판단은 작년부터 있었다. 공모제라는 사안이 불거지면서 영화인들도 나서야 되지 않겠냐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 전까지 전용관과 관련한 논의를 영진위 쪽에 양도해 왔지만, 양도받은 이들은 그걸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그것은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다.

양: 지금 뒤늦게라도 발족되었는데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가 논의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김: 구체적인 부분은 아직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시네마테크는 민간이 7을 대고, 영진위가 그동안 3을 대는 것으로 운영되어 왔다. 그 대부분도 전용관 임대료로 지불되어 왔다. 활동도 민간 영역에서 시작이 된 것이고, 시간의 진행 안에서 계속 확장이 되어왔다. 규모나 재정적 확장이 아니라,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많은 영화인들이 참여해 왔다. 추진위가 진행해 나가려는 것은 서울에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시가 지원해 나갈 수 있다면 훨씬 지속적인, 그 이상의 활동들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뉴욕의 현대미술관처럼 전용관이 그 곳에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일단 추진위 활동은 서울시와 관련해 2007년에서 2008년까지 진행되었던 사항을 복원하는 것이 급선무다.



양: 지금단계의 목적은 어쨌든 앞으로 아트시네마가 공간을 갖는 것이 목적이겠죠. 4회 친구들 영화제의 부제가 공간의 재발견 이었죠.

김: 공간을 '갖는‘것은 물론 진짜 목적은 아니다. 공간이 '전제' 되어야만 한다. 부산도 시네마테크를 시작할 때부터 전용관을 조성해 시작했다. 서울의 경우는 그럴 수 없었지만 그래도 시작했다. 모든 것을 갖추어지기를 기다리고 그 때에야 이 일을 진행한 것이 아니다. 8년간을 진행하면서 그 만큼의 성과로 전용관을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시네마테크의 활동이 안정적 공간 확보 정도의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에는, 그것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양: 문화학교 서울로 91년도에 사당동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상영공간을 갖추었던 것이 2002년도 아트선재라고 할 수 있죠.

김: 그 전에 영화제를 개최해왔었다. 문화학교서울을 포함해 다른 시네마테크 단체들이 아트선재센터를 일시적으로 대관해 필름 영화제를 개최했었다. 이들의 요구가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었는데, 영화상영이 증가해왔고 참여도도 높았다.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한 것은 1999년에 시네마테크부산이 설립된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자면 시네마테크부산이 하나의 모델이 된 것인데, 부족하지만 전용관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양: 공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시와 협의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는데. 전용관을 건립한다고 했을 때, 금액은 적은 금액이 아닐 것입니다. 차라리 관계 기관과의 협의가 아니라 일종의 기업의 문화 컨소시움 연합체와 이야기가 맞는다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논의는 없었는지요, 예를 들자면, 흥국생명이 시네큐브를 지원했던 것처럼 말이죠.

김: 어떤 사람들은 이 정도의 행사들을 하는데 어떻게 기업이나 다른 곳에서 큰 국제영화제처럼 스폰을 받지 못하냐고, 왜 이렇게 영리하지 못하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반문하고 싶다. 그렇게 영리해야하는가? 영리하게 하는 것이 과연 최선인가? 영악한 사람들은 많다. 돈도 쉽게 끌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단지 계획만으로, 그 어떤 사업도 실적도 없이 그렇게 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시네마테크에는 기업의 후원도 필요하고, 시의 후원도 필요하고, 영진위의 후원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따왔다고 뛰어난 것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돈을 최대한 끌어와 뭔가 거대한 영화 하나를 만든 것만으로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돈을 얼마나 끌어 왔냐가 아니라 어떤 작품을 만들었냐가 중요하다. 필립 가렐은 감독들이 흥행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는데, 마찬가지로 돈을 끌어온 것으로 그저 관객을 몇 명이나 동원 했나로 이 곳을 일을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양: 근본적으로 보아서는 그렇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들은 남습니다. 공간에 대한 불안이 제기되는 이런 문제들.

김: 매년 재계약을 하면서 활동의 안정성을 기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지금이 가장 기초적인 문제가 위기 상황에 빠져있다. 공모제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업계획만으로 공모에 되면 하고, 안 되면 안 한다는 것이 공모제 아닌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가를 관객들이 판단해야만 한다.



양: 관객에게 스며들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들여 기다릴 수 있는 공간에 대해 말하셨습니다. 문화학교 서울 91 년 부터 본다면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을 일을 해왔던 것인데,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시차원에서도 그렇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충분한 사회적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김: 아니,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합의가 있었던 것이 파기된 상황이다.

양: 그렇다면 아직 서울은 번듯한 시네마테크를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곳인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김: 누가 자격을 부여하는 가의 문제인 것 같다. 그 자격을 부여하고, 그 자격을 스스로 얻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 그 외에 그 누구도 자격을 부여할 수는 없다. 작년에 공모제 문제가 나왔을 때 홍상수 감독이 아주 간명하게 이렇게 말하더라. ‘영진위가 공모제를 할 권리가 있나요?’ 가장 단순하고도 명쾌한 표현이다. 누가 자격이 있고 권리가 있나? 영진위에 권한이 있다면 시네마테크에 지원을 할 건가, 말 건가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시네마테크를 공모할 권리는 없다. 이건 분명히 해야 한다.

 

 



 

양: 현재 헐리우드와의 재계약이 2월 시한입니다. 아트시네마에서는 1년 계획을 세워 놓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2월 이후의 진행이 요원한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라는 질문이 무의미 한 것 일 수도 있지만 결국 지금 영진위의 공모제가 가장 큰 현안이고, 재계약이라는 문제도 걸려 있습니다. 상황이 호전 되지 않을 경우의 복안 에 대한 내부적인 논의는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김: 공모제라는 것이 참 한심한 게, 그럼 우리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페데리코 펠리니 전작전이나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등의 행사를 그럼 공모제가 되고나면 그 때가서 한다는 것인가? 미술관과 박물관을 공모로 하나? 우리는 1년, 혹은 2년 정도의 준비기간을 갖고 외국의 아카이브와 시네마테크와 협의해 회고전과 특별전을 진행한다. 매년마다 공모제를 해서 되면 그 때마다 행사를 준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비상식적인 생각이 영진위에서 나왔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양: 이번 친구들 영화제의 개막작은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입니다. 그 영화가 물론 흡혈귀가 나오지 않는 영화이지만, 왜 개막식 영화로 선정 되었나를 생각해 보면, 뱀파이어는 끊임없이 새로운 육체를 찾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피를 취함으로서. 결국 영화도 언제나 매번 새로운 육체를 찾는 존재라고 생각하는데요, 과연 어떤 영화의 집, 영화의 육체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김: 어떻게 포장하는 것이 매력적일까?(웃음) 3D로 포장해서?(웃음).



양: 개인적으론 영화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 같은 것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영화 때문에가 아니라,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있음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관객이 감독이 된다든가, 꼭 감독이 되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개인적인 변화를 아주 더디더라도 일으키게 되는 그런 것들 말이죠. 마지막 질문입니다. 시네마테크 운동을 계속해서 해 오시면서 함께 일하는 구성원들과 그래도 우리가 이정도 일은 하고 싶다, 이정도 결과는 내고 싶다는 운동의 목적이랄까요, 그런 구상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김: 그렇다면 왜 영화저널에서 일을 하고 있나? 외국의 영화박물관 관계자가 말하길 결국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은 시네마테크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에,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방명록의 숫자. 혹은 어떤 경제적인 교환가치들뿐이니까. 영화의 가치를 발견하는 이들은 결국 관객들이다. 그러니 이 곳에 오는 관객들도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 시 차원에서 혹은 기업이 이 곳의 재정적 지원을 높여줄지언정 이러한 고유의 시네마테크의 역할을 훼손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상황은 파솔리니의 표현을 빌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위험에 처해 있다고.

양: 긴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년 이 자리에서는 '우리는 어떻게 위기를 기회로 만들 었나' 이런 주제를 두고 인터뷰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하면서 녹취된 내용을 곰곰히 들어보았다.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목소리가 좀 작은 편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노심초사하면서 신경을 쓰다 보니 놓쳤던 부분들이 다시 복기가 되었다. 어떤 이는 시네마테크 운동의 독자성을 근거로 영진위의 공모제는 힘을 잃을 것이라는 말도 한다. 한 마디로 대신 떠맡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날 유난히 그의 목소리에서는 피로감이 묻어났다. 그 피로감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그 근거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 인터뷰였어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떻게 본다면 그러한 피로감의 정체중 일부분이 이제 아주 명확하게 우리들 눈앞에 드러났다. 영진위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하고 효율적일 수는 있어도, 사태의 근본적 해답이 되지 않는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정당한 질문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정당한 질문이 있을 때, 정당한 행동이 일어난다.

 / 진행: 양석중, 사진.정리: 강민영 (영화비평웹진 '네오이마주' 에디터)


[출처] 영화비평웹진 '네오이마주' (http://www.neoimages.co.kr/news/view/2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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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령 2010.02.21 1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트시네마와 이제 겨우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해괴한 일이 터지니 이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친구를 빼앗긴다면 제 잘못도 크겠지요. 지켜야지요. 꼭 지킬 겁니다. 프로그래머님, 관객과 함께 끝까지 갑시다!

시네마테크의 선택, 찰스 로튼의 <사냥꾼의 밤> 시네토크

1월 26일 저녁,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시네마테크의 선택작인 찰스 로튼의 <사냥꾼의 밤>이 시네마테크의 필름 라이브러리로 직접 구매한 뉴 프린트로 선을 보였고, 이어 김성욱 프로그래머와 관객과의 대화가 마련되었다.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영화의 마지막에 아이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것처럼, 시네마테크 역시 있는 것 가운데서 조금 포장해 놓은 선물처럼 시네마테크의 선택이라고 내놓았다. 어찌 보면 민망할 수도 있다. 뭐, 저런 게 선택이야 싶지만 크고 대단한 것만이 선물이 아니라 있는 것 중에서 마음으로 전달하는 것이 릴리언 기시의 말대로 최고의 선물일 수 있다 생각한다”고 밝혔다. 현 시네마테크의 상황을 느낄 수 있는, 비장한 심정이 흐르던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시네토크를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아이들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아이들을 위한 영화이고, 크리스마스 때 틀면 적합하겠다 싶다.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여기서 아이란 예술의 아이들, 즉 예술의 유년성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영화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아이의 영화와 어른의 영화가 있습니다. 아주 초기의 영화는 유년기의 예술이자 아이의 영화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나중에 영화를 접한 우리들의 경우는 그것이 어른의 예술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50년대나 60년대 누벨바그리언들이 시네마테크에서 발견한 영화는 어른의 예술이었습니다. 하워드 혹스나 알프레드 히치콕과 같은. 하지만 어른의 예술 안에서도 예술의 유년성, 유년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세르주 다네가 시네필에 대해 언급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그는 아이들이 등장했던 영화들 몇 편을 거론하면서-프리츠 랑의 <문플리트>, 베르히만의 <파니와 알렉산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합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언제나 학교에는 이런 애들이 있었습니다. 활발하지도 않고, 두세 명 혹은 혼자 노는 애들말입니다. 그런 애들 중의 대부분이 나중에 시네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아이들은 어딘가 도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아이들입니다. 저 또한 그러한데, 별로 문제를 저지르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혼자 조용히 동네 재개봉관에 가서 영화를 보러 가곤 했습니다. 어디로 도피할 자신도 없었고, 도망갈 생각을 할 만큼 상상력이 풍부하지도 않았고, 그런 가운데 들어갈 법한 곳이 극장이었던 것입니다. 적은 돈으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곳. 그래서 어딘가 도망갈 순 없었던 사람들이 그 안에서 거주하게 되는데, 그 안에서 다른 세상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동시에 두 세계에 존재하는 경험을 하게 됐던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은 도피할 것인가의 문제에 처합니다. 릴리언 기시가 예수의 탄생과 아이들을 죽이려고 했던 해롯왕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도망가야만 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의 아이들은 도망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보호를 받았습니다. 오히려 도망가듯이 자꾸 빠져나가는 아이는 루비입니다. 다네가 지적한 것도 아마도 그런 부분일 것입니다. 어딘가 도피하지도 못하고, 혹은 더 나이가 든 루비처럼 어른들의 꼬드김에 현혹되기 전 단계의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감성 안에서 시작되고 형성된 것이 시네필이라는 사람들이 지닌 일종의 모럴리티인 것입니다. 도피하지 않으면서 대신 그 안에서 견뎌나가는 것, 그리고 동시에 두 세계에 거주하는 것. 그것이 시네필의 모럴리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에서 어린아이들의 세계와도 연결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아이들을 지키는 어머니역은 릴리언 기시로 그리피스 무성영화에 나왔던 불멸의 스타였던 배우입니다. 이 영화를 하나의 ‘영화에 대한 우화’로서 가정 했을 때, 아이들, 그리고 어른들의 세계, 그리고 루비로 표현되는 청소년기, 즉 무언가에 현혹되어 조금씩 바깥으로 빠져나가려는 그러한 시기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여자들은 다 저래. 다 속아 넘어가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낳은 아이들을 내가 데리고 있을 수밖에 없어”라고 자조적이며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어른에 현혹되어 빠져나가려는 루비가 동네에서 산 것은 '현대 영화'라는 잡지로, 이는 마치 당대의 현대영화 혹은 어른들의 영화라고 포장되어 미숙한 이들을 현혹하고 있었던 세계처럼 보입니다. 그런 어들들의 세계와 대항해나가며 존재하는 사람이 릴리언 기쉬로, 영화의 기원성에 존재했던 여배우입니다. 이 영화에서 매우 독특하다고 느꼈던 것은, 로버트 미첨이 “기대라. 기대라”하는 성가를 부를 때, 릴리언 기시가 총을 들고 지키면서 그 노래를 따라 부르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과 관련해서 마그리트 뒤라스가 언급했던 것처럼 로버트 미첨의 노래 소리는 세이렌의 노래 같은 것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반대로 릴리언 기시는 그 동일한 노래를 부르지만,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공간 내의 아이들을 보호해내는 노래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선택하면서 떠올렸던 것은, 시네필의 모럴리티입니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는 것. 환상적인 세계로 빠져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때가 때인만큼 문득 시네마테크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달콤한 목소리로 들어오는 로버트 미첨과 같은 존재가 있고, 그로 인해 떠돌아다니는 아이들처럼 8살 먹은 서울아트시네마는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표류하고 있는 것이지, 도망가는 것도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잘 견뎌내고 참아낸다”라고 이 영화에서 릴리언 기시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미첨을 때려죽이려고 하고, 교수형에 처하려는 어른들이 있는데, 그런 가운데 굳건히 릴리언 기시가 지켜나가려는 것은 그들과는 다른 모럴리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올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가장 돈 없이 시작이 되었지만, 우리 안에서 할 수 있는 하나의 선물들을 만들어나가려 했고, 즐겁게 받아들여 주는 관객들의 모습에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게 하나의 선물이었으면 합니다. 

관객1: 로버트 미첨을 보면, 노골적으로 늑대 연기를 하고 있는데, 그게 굉장히 재밌기도 하면서 너무 노골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미첨의 연기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

김성욱: 과장되어 있다는 것은 다들 느낄 것 같다.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전체가 하나의 동화 같은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고, 잔혹동화 같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과장성은 통용될 수 있고 재미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영화의 개봉 당시엔 대중들과 비평가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가 너무 한심하고, 톤이 맞지도 않고, 어디서는 다큐멘터리 같고 어디서는 세트에서 너무 과잉적으로 찍었기에 50년대에 만들었을법하지 않다는 거다. 그래서 컬트가 된 영화이기도 하다.

 

관객2: 영화를 보니 <엑소시스트>가 생각났다. 아이가 창문에서 가로등 밑에 서 있는 목사님 같은 장면이나, 아버지가 없는 집에 목사가 찾아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또 하나는 영화에 동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동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물과 어린 아이들의 유사성을 감독이 영상으로 재현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김성욱: 우화적, 우의적인 장면이 많다. 자연적 요소들을 어떻게 볼 건가와 관련해 이 영화가 어떤 시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의 전체적 시간 구조는 ‘옛날 옛적에’라는 동화적 시간인데, 그건 또 한편으로 보면 굉장히 고대적이거나 태원적, 시원적인 세계의 시간이다. 거기에 동물이나 자연적인 풍경이 어울리게 표현되어있다. 영화를 보는 자는 성인의 시간 안에 살고 있는데, 동시에 우리 안에 내재되어있는 아이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직설적인 표현이지만 잃어버린 시간 혹은 되찾은 시간의 느낌이 강하다. 찰스 로튼이 그리피스나 초기 미국 무성영화의 전통을 차용하려 했고, 그중 하나가 릴리언 기시의 등장인데, 그런 방식으로 좀 더 근원적인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는 점이 자연적인 세트의 장면들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 같다. 많은 영화들에 대한 이 영화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대단한 걸작보다도 오히려 이상한 컬트영화라는 점에서 테마와 특정 장면의 순간에 대한 모방이 매우 많았다고 생각된다.

 

관객3: 영화를 보면서, 종교나 기독교를 가지고 양쪽의 상반되는 것들, 반전, 극과 극의 이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다. 릴리언 기시가 총을 들고 흔들의자에 앉아 로버트 미첨과 똑같은 노래를 부를 때. 한쪽이 암전이면 한쪽이 불이 켜지는 등 동일한 것의 양면성이 드러나는 것 같다. 50년대 작품이니까 미국의 매카시 광풍과도 동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김성욱: 말씀하신 것은 시대의 흔적인 것 같다. 특히 미첨을 둘러싼 후반부의 에피소드에는 그런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릴리언 기시가 노래 부르는 장면은 유명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흥미롭다. 여기서 어둠이 있어야 바깥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응시할 수 있는 구조가 발생된다. 어두움의 조건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무언지를 볼 수 있는 시선들을 제공하는 거다. 너무 들떠 있는 밝음이라는 것은 자기 주변의 어둠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하는 현상을 만든다. 영화의 도처에 이런 표현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영화에는 시대를 은유하는 것이 많이 느껴진다. 동시에 이 영화가 놀랍게도 지금의 시대를 은유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현명한 게 어떤 건가. 보호 받지 못하는 이 세상 안에서 보호라는 게 도대체 뭔지. 보호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행동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든다. 
 

 

관객4: 위선적인 말을 하는 로버트 미첨에게서, 지금 현실을 생각하며 분노를 느낀다. 이 영화는 누아르의 요소도 있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성장 영화인 느낌이 든다. 50년대 미국 사회에 앞으로 닥쳐올 수 있는 균열 같은 것을 찰스 로튼이 예감한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도 있다. 시네마테크가 용기를 냈으면 좋겠고, 어린아이가 참고 견뎌내듯이 능히 우리도 견딜 수 있으리라 본다.

김성욱: 존 카사베츠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10대를 넘겨서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영화를 만든다고. 근데 10대를 넘기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세르주 다네가 시네필에 대해 한 얘기를 짧게 읽으며 자리를 마감하고자 합니다. 

“나는 도망가지 않았다. 우리가 청소년이 됐을 때는 많은 도주하는 방법들이 있다. 환상적인 세계, 공상과학 속으로, 더 나은 세계로 도주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그런 유토피아가 있었는데, 그런 것에 나는 관심이 없었다. 왜냐면 나는 어떤 상상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호감이 있는 좋은 세상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살도록 허락되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거기에서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생각은 이러했다. 우리는 이 세계를 가질 것이다. 이 세계에 있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결국은 살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시네필의 핵심이었다.” (정리: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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