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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 최호적시광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연연풍진> 리뷰 - 소년은 어른이 되고 노인은 늙어갈 것이다

소년은 어른이 되고 노인은 늙어갈 것이다

- <연연풍진>




<연연풍진>은 밝은 점처럼 보이는 빛을 향해 다가가는 터널의 어두움에서 시작한다. 네 번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굽이치고 곧게 뻗은 철길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철길을 둘러싼 산등성이가 보이고 기차 안에 서서 책을 읽는 소년에게 “수학 시험을 망쳤다.”고 소녀가 투정 부리듯이 말한다. 이어지는 기차 차단기의 붉은 등과 기차의 도착, 철길을 따라 걸어오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로 향하는 길에 사람들이 오가고 아이들이 뛰어논다. 영화를 상영하기 위한 하얀 천이 바람에 나부끼고 마을이 어둠에 잠길 때쯤 집에 도착한 소년은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다. 영화의 도입부인 이 장면들은 여러 번의 변주된 형태로 등장해서 그가 소년기를 통과하고 청년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한 것을 되비쳐보는 역할을 한다. 광산에서 다친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역, 명절을 맞아 귀향한 소년과 소녀가 건너는 마을의 다리, 군 입대를 위해 할아버지와 걷는 철길, 타이페이에 먼저 도착한 소년이 소녀를 기다리는 복잡한 플랫폼은 떠남과 돌아옴의 원형을 제시한다. 소년의 성장과 좌절의 시기마다 등장하는 기차와 마을의 연결은 고향으로 향하는 걸음과 도시에서 겪어야 할 실패와 성장통을 관통함과 동시에 대만의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농촌과 도시, 대가족의 안온함과 도시의 냉혹함, 소박하고 복닥거리는 마을 공동체와 도시의 복잡함과 고립을 드러내고 있다.



노사 간의 갈등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푸념, 태풍 때문에 감자 농사를 망칠까봐 염려하는 할아버지, 가사노동으로 쉴 틈 없는 어머니는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고 중국 본토에게 복속되는 역사적 격동기를 그들의 시간과 속에 놓아둠과 동시에 개인의 육체에 새겨진 노동과 더불어 지탱되는 대만의 현재를 드러낸다. 소년들이 사장의 매몰찬 구박을 들으면서도 서서 밥을 먹고 오토바이를 도난당하거나 손가락이 절단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노동하는 이유는 고향에 돈을 보내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가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소년들은 영장을 받거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가고 소년들의 육체는 고된 노동으로 인해 상처를 입게 된다. 소년들이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서로를 걱정해주던 영사실 뒤의 허름한 방이 떠나온 가족을 대체한 공간이라면, 소녀의 좁은 재봉공장은 와해될 소년기의 공동체를 예감하는 공간이 된다. 인쇄소에서 일하는 소년과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가 처음 대화하는 장면은 좁은 계단을 사이에 둔 공장의 창살이 안과 바깥 모두를 가두기 때문에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을 나누는 형태가 된다. 늘 함께였던 소년과 소녀는 처음으로 각자의 일터와 삶의 터전으로 분리되고 고향에서의 긴밀한 유대감은 서서히 사라진다. 그들은 함께 소년기를 보냈고 서로 사랑했지만, 대도시의 삶은 고향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근원적 외로움과 고립감을 채워주지 못한다. 소년은 군대에 갈 것이고 소녀는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면서 울음을 터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익스트림롱쇼트와 롱 테이크가 빚어내는 느슨한 리듬과 정적인 구도는 역사와 개인의 삶을 착실하게 관찰하는 샤오시엔의 태도를 드러낸다. 그는 카메라 안에 담기는 인물에 대해 속단하지 않으며 그들의 행동이 완결되기 전에 미리 시선을 옮기지 않는다. 복잡한 사건이나 갈등을 만들기보다 산으로 넘어가는 구름의 그림자, 대도시의 새벽 공기를 맞이하는 소녀의 모습, 난파된 본토인 가족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군인들의 온정, 입대하는 손자를 위해 폭죽을 터뜨리면서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느린 걸음을 통해 삶의 풍경 속으로 시간이 흘러가고 역사의 순간에 새겨진 육체와 노동, 성장과 늙어감을 바라볼 뿐이다.

박인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