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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해빙기 러시아의 전쟁영화

지난 2일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엘렘 클리모프 감독의 <고뇌> 상영 후, '해빙기 러시아의 전쟁영화'란 테마로 경상대 러시아학과 홍상우 교수의 강연이 열렸다. 스탈린 사후의 '해빙기'에 러시아에서는 새로운 미학을 선보인 전쟁영화가 풍성하게 만들어졌는데, <고뇌>도 그 중 하나다. 이번 강연은 러시아의 역사, 정치와도 무관하지 않은 해빙기 러시아의 전쟁영화를 살펴보며 전쟁을 다시금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홍상우(경상대 러시아학과 교수): <고뇌>는 볼세비키 혁명 50주년 기념으로 만든 작품으로 60년대 완료가 되어야 했으나, 여러 차례 검열에 걸리게 됨으로써 뒤늦게 완성된 작품이다. 80년대에 완료되었는데, 자료마다 완성된 시기가 좀 다르게 표기되기도 한다.

러시아의 전쟁영화는 소재가 다양하고, 완성도나 사유의 깊이는 계속 진전되어 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직 다루지 않는 소재들이 있다. 자신들이 가해자였던 체코침공이나 폴란드침공에 대해서는 다룬 적이 없는 것 같다. 러시아 전쟁영화에서는 가상의 적들이 등장한다. 제정러시아 시대에는 일본인이, 2차 대전 시기에는 유대인과 독일인이 적으로 등장한다.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서면 자본가나, 귀족계급, 로마노프 왕조를 안 좋게 묘사한다. 전후에는 전쟁에서 돌아온 죄수들을 스파이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러시아는 2차 대전을 ‘대조국전쟁’이라 부르면서 자신들이 영웅적으로 싸워서 승리했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2차 대전으로 부른 것은 최근의 일이다. 공식적으로는 전쟁이 끝났으나 아직도 이러저러한 내전은 진행 중이라 할 수 있다. 빨치산을 다룬 영화를 포함한 러시아의 다양한 전쟁영화는 역사에 대한 해석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역사가들이 공식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기존의 숨겨진 역사들을 전쟁영화를 통해 많이 다룬다. 역사적 해석에 있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준 셈이다. 최근에 잘 만들어진 전쟁영화들은 기록에 남아 있던 사실들을 모티브로 삼아서 만드는 경우들이 있다. <어떤 전쟁>과 <즈베즈다>는 러시아 감찰부대에 관한 영화들이다.

러시아의 전쟁영화는 소비에트 영화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소재나 주제가 다양한 만큼 서구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다. 러시아 전쟁영화의 특별한 위치는 소련의 탄생 배경과 해체 배경과도 관련이 깊다. 또한 실제이야기든 가공한 이야기든지 중앙집권화된 군국주의적 성격이 있는 국가한테는 체제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토대가 되기도 한다. 전쟁영화는 오락이나 예술의 형태로 공식적인 역사를 전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제작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소재가 되는 것이다.

러시아 전쟁영화는 몇 가지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우선, 1932년까지 러시아는 러일전쟁, 1차 대전, 내전, 그리고 혁명 등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겪었다. 이 시기는 소련영화의 황금시기였는데 전쟁영화가 가장 중요한 장르는 아니었고 주변부 역할에 머물렀다. 스탈린주의 시기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도입되었는데, 대량숙청이 이루어지는 등 국가에 의한 테러가 빈번하던 시기다. 스탈린은 문화예술 작품에 관심이 높아서 자신이 직접 작품들을 살피기도 하고, 또 심한 검열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를 소비에트 영화 전체의 암흑기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통치체제를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기는 했지만, 전쟁시기라는 점이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전쟁 중에 만들어진 이러한 영화들의 중요한 진보는 영화가 여성화되고 탈계급적 성격이 보인다는 점이다.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여성이나 대중인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이 많다.

그 다음 시기는 여성화 및 인간화가 더욱 두드러진 2차 대전 시기다. 이른바 대조국전쟁 동안 제작된 영화들은 적에 대항해서 싸우는 여성들, 인민들, 정규군 외에 빨치산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졌다. 종전이 다가올 무렵에는 여성이나 비정규부대가 전면에서 물러나고 장군이나 높은 계급의 인물을 다룬 판에 박힌 스토리의 지루한 영화들이 상당기간 등장했다. 전후의 피폐된 현실에서 전쟁에서 싸운 전체 인물들을 다루기보다는 스탈린 본인을 영웅시하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바로 그 다음 시기가 가장 많이 얘기되는 해빙기다. 64년 이전까지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대조국전쟁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는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이반의 어린시절>, <학이 난다>, <병사의 발라드> 등은 탈스탈린화의 덕택으로 만들어진 영화들로, 그 중 <병사의 발라드>, <학이 난다> 그리고, <인간의 운명>(세르게이 본다르추크) 등은 대중성도 상당히 고려해서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로 인해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이 60년대 후반의 브레즈네프시대 때인데, 2차 대전을 기념비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고, <해방>이 시기의 유일한 전쟁영화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이 1970년대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전쟁영화의 질이 높았다곤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오르기 추흐라이, 알렉세이 게르만, 라리사 셰피트코 같은 재능 있는 감독들이 도전적인 영화를 만든 시기이다. 80년대 중반에 고르바초프의 개혁시도 이후, 85년에서 86년에는 영화산업이 거의 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승 40주년을 기념해 만든 <컴 앤 씨>가 이 시기의 유일한 걸작이다. 90년대 들어서면서는 전쟁영화의 제작은 거의 빈사상태에 빠졌다. 그러다가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들어서서 러시아의 경제가 회복되었고 영화산업도 활발해졌다. 여기에는 푸친이 러시아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는 의도도 작용했다. 2001년에서 2005년 동안에는 러시아 문화에 관한 계획이 세워지면서 영화산업에도 많은 돈이 투자되었다.

러시아 영화 전체를 볼 때, 전쟁에서의 승리를 다루는 영화들은 스토리상에서 몇몇 공통점을 가진다. 나치는 야만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그로 인해 소비에트 인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았으나 스탈린의 영도 아래 마침내 승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계급적 영웅주의와 보편적인 고통, 이 두 가지가 대개는 전쟁영화의 내러티브를 구성한다고 이야기된다. 아무리 혁신적인 영화들이라도 이런 자취는 남아 있다. 검열이 언제나 있어왔고, 그런 검열이 오랜 세월 지속됨으로써 자기검열도 또한 있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단순한 스토리가 약간 복잡해진 것은 전후에 적군에의 협력 여부를 다루는 내부감찰기관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즈베즈다>가 이러한 영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서구영화에서의 전쟁영화의 공식은 행복하고 긍정적인 결말로 이루어지는 반면 러시아 영화는 죽음을 강조한다. 이는 전쟁에서 순교임무를 완수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해빙기 영화의 대표적인 세 작품에서도 주인공들은 전부 다 죽게 된다. 러시아 전쟁영화는 이야기가 굉장히 명쾌하고 메시지도 간파하기가 쉽다. 이는 소비에트 체제가 유지되는 한에서 영화가 수행해야 할 임무중의 하나가 선전선동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리: 김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