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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핍박받는 자들을 위무하는 재즈의 선율

[리뷰] 로버트 알트먼의 ‘캔자스 시티’


<캔자스 시티 Kansas City>(1996)는 1934년에 미국 동부의 캔자스 시티에서 일어난 며칠 동안의 사건을 중심으로, 그 시대의 공기를 사실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이 사실성은 무엇보다도 1925년생인 로버트 알트먼이 캔자스 시티에서 태어나 십대를 보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가 포착해낸 그 시대는 부정선거, 살인, 절도, 마약 등이 판치는 어두운 세계다. 아무래도 그 배경은 경제 대공황이 가중시킨 총체적 사회 모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뉴딜 정책을 내세운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새롭게 대통령이 된 해가 1932년이었고, 1934년에 열린 선거는 그 중간 평가와도 같았다. 서민들은 뉴딜 정책을 지지했고, 대자본가들은 비판했다. 그들 간의 분리는 더욱 양극화되었으며, 힘없는 자들은 여전히 핍박받고 희생당하고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가죽 자켓을 걸치고 입을 씰룩거리며 내뱉듯 말하는 블론디(제니퍼 제퍼슨 리)라는 여성이, 총을 겨누는 것만으로 기절 직전까지 이르는 심약한 상류층 여성인 캐롤린(미란다 리차드슨)을 납치한다. 남편이 갱단의 보스인 셀덤 신(해리 벨라폰테)을 잘못 건드렸다가 붙잡혀 있기에, 블론디는 루스벨트 대통령 보좌관의 아내인 캐롤린을 납치함으로써, 정치인들의 힘을 이용하여 남편을 구해내려 한 것이다. 범죄영화의 여주인공을 흉내 내며, 정치인과 갱단을 대립시켜 곤경을 벗어나고자 한 블론디의 생각은 일견 참신해 보이지만, 실상 현실은 더욱 냉혹하다. 그 납치는 대상을 잘못 찾은, 무언가 어긋난 행위가 되고, 두 여성의 동행의 여정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와 함께 영화 자체의 전개도 미묘하게 흐른다. 무언가 느슨한 가운데 뒤틀린 시선을 품고 다층적 함의들로 구축된 영화의 구성은, 알트먼이 왜 할리우드의 이단아라고 불리는 지 충분히 느끼게 한다.

이 시대에 서민을 핍박하는 악의 축들은 정치가 및 자본가들, 그리고 갱단이다. 선거 유세를 벌이는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외치는 가운데, 그 뒤편에서는 부정 선거가 자행된다. 부랑자들을 트럭에 태워와 투표를 시키며, 이에 저항하는 시민을 아무렇지 않게 쏴 죽이는 장면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모든 이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은 너무 깊숙한 곳에 뿌리박혀 있어서, 심지어 흑인들 자신조차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흑인 갱스터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었던 흑인 택시기사를 무차별한 칼질로 죽이고 짐승의 시체처럼 내버려둔 후, 마치 그 행위를 잘 즐겼다는 듯이 웃으며 손수건으로 손과 칼의 피를 닦아낸다. 마약을 입에 달고 사는 그들은, 약에 취한 듯 무감각하게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저지른다.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무가치하고 비루하다.


이 어두운 시대의 어두운 도시에서, 가장 핍박받는 대상인 힘없는 흑인들이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은 재즈 음악이다. '캔자스 시티 재즈'는 블루스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한 빅 밴드와 블루스 보컬 위주의 재즈 스타일로서, 193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바 있다. 알트먼은 영화의 내러티브 부분을 다 찍은 후, 유명한 재즈 뮤지션들을 다수 불러들여 그 시절의 '캔자스 시티 재즈' 연주를 온전히 재연하려 했다. 재즈 연주 장면들은 영화 전체 걸쳐 내러티브의 틈에 파고들면서, 미묘한 정서를 자아낸다. '캔자스 시티 재즈'의 뜨거운 열기와 감미로운 선율만이 이 시대의 상처를 감싸준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재즈의 선율 바로 뒤에 위치하는 것 또한 범죄 조직의 폭력과 자본의 힘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박영석_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