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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마이클 파웰&에머릭 프레스버거 특별전

파웰이 완성한 자기만의 방 - <피핑 톰>

[마이클 파웰 & 에머릭 프레스버거 특별전]


파웰이 완성한 자기만의 방 - <피핑 톰>

마이클 파웰의 <피핑 톰>의 마지막 시퀀스는 아무리 봐도 꺼림칙하다. 카메라 뒤에 숨어 충동적인 살인을 일삼던 주인공은 좋아하는 여자와의 새로운 삶을 꿈꾸지만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돌연 자살을 결심한다. 그리고 자신이 예상한 대로 경찰이 수사망을 좁혀오자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며 총검 달린 카메라를 향해 거침없이 몸을 던진다.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대목은 그가 자기 목에 총검을 찔러 넣기 직전, 카메라를 향해 죽기가 두렵다고 말하면서 두려워서 기쁘다고도 말하는 순간이다. 늘 얼마간 경직돼 있는 그의 얼굴에는 공포도 희열도 희미하게만 어른거린다. 이렇게 작정하고 작위적인 비극적 결말 앞에서는 안타까움도 안도감도 느끼기 어렵다.

1960년 개봉 당시 이 영화는 몰매를 맞았다. 개봉 전에 이미 많은 가위질을 당했고, 개봉 즉시 평자들에게 온갖 비난을 들었으며, 개봉된 지 5일 만에 모든 극장에서 상영이 중단되었고, 이후 파웰의 연출 경력을 강제 조기 종료시킨 작품으로 남았다. 파웰이 이 영화와 관련해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고 밝힌 바 있는 『옵저버』의 평 일부만 봐도 당시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이 얼마나 거셌는지 짐작이 간다. “<피핑 톰>을 내다버리는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방법은 이 작품을 쓰레받기에 쓸어담아 가장 가까운 하수구에 재빨리 씻어내리는 것이다. 그래도 악취는 남을 것이다.”

이 영화가 복권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이는 영화이론에서 정신분석학이 득세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어 이 영화는 시각적 쾌락의 기제를 폭로하는 영화로 상찬되었다. 로라 멀비도 “<피핑 톰>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명백히 관음증적 사디즘에 관한 영화”로서 “영화 보기의 작동 원리, 숨겨진 관찰자(남성)와 응시의 대상(여성) 간의 젠더 차이를 전면에 드러내는” 영화라고 평한 바 있다. 그녀를 포함한 이 영화의 새로운 지지자들은, 과거의 평자들이 이 영화를 끔찍이 싫어했던 이유가 영화의 관객성에 내재된 은밀한 욕망과 질서를 폭로함으로써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혐오감을 일으켰던 이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권될 가치가 있는 이유를 정신분석학적 해설에 맡겨버리는 건 탐탁지 않은 일이다. 그건 한편으로는 영화 보기의 쾌락이 단일하고 균질적이며, 불쾌와 배타적 관계에 있다고 단정해 버리는 일이다. <싸이코>와 함께 슬래셔 무비의 원조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이 영화에서 쾌와 불쾌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또한 이 영화에서 영화 보기의 쾌락의 기제에 대한 폭로는 위의 이론가들이 바란 만큼의 전복적 힘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주어져 있는 설정으로 이미 드러나 있을 뿐, 은폐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으로서 구사되고 있지 않다. 그러니 이 영화가 일찍이 많은 이의 격분을 샀으나 다시 생각해 볼 만한 텍스트가 된 이유는 약간 다르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아무것도 숨기려 하지 않는데도 관객은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는 영화다. 영화는 카메라 뒤의 살인자는 누구인지, 그에게 어떤 과거가 있는지,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다 알려주고 시작한다. 겉으로 보면 서스펜스로 충만한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서스펜스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오히려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서스펜스가 아니라 심리적 비약이다. 살인자와 관련된 사실들과 살인자가 행동하는 순간들 사이에 결코 설명될 수 없는 간극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로 관찰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는 사실과 그가 카메라를 든 살인마가 되는 순간 사이, 그가 카메라 관련 일을 한다는 사실과 그가 공포에 질린 여자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고는 참지 못하는 순간들 사이, 그가 아래층에 사는 여자를 흠모한다는 사실과 그녀와 함께할 수 없게 되자 자살을 계획하는 순간 사이, 거기에는 어떤 영화적 설명이나 해석 대신 인간의 심연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 영화에서 관객의 소외를 일으키는 요인은 또 있다. 이 영화가 관객과 세상을 향한 영화가 아니라 감독 자신을 위한 영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 ... 그 밖의 것들은 그 사람들 문제고.”라고 어디선가 말했던 파웰은 이 영화에서 관객의 쾌락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고 보여주는 자이자 보는 자로서의 영화 창작자의 이중적 욕망과 가학-피학성, 죄의식에 더 천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주인공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 장면들에서 본인이 아버지를 연기하고 자기 아들에게 주인공을 연기하게 하기도 했다.) 혹은 시각적 쾌락의 기제를 폭로하려고 하기보다 그것을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예술 표현 형식으로 밀어붙여 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관객의 쾌락을 해체하고 부정하는 데 열정을 쏟았던 이론가들이 이 영화의 구제에 앞장섰던 것은 당연한 일이면서도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던 일이다.

영화라는 예술의 궁극적 형태로 파웰이 택하는 것은 자살이다. 그리고 이 자살을 통해 완성되는 예술 앞에서 관객의 소외는 극에 달하게 된다. 특히 주인공이 총검이 달린 카메라를 향해 돌진하는 장면은 측면에서만 촬영돼 있다. 그가 최종적으로 이룩하고자 했던 작품, 절대적 공포의 맨 얼굴을 관객은 결코 볼 수 없다. 그건 그만을, 그만에 의한, 그만을 위한 작업이다. 그의 시점숏으로 시작했던 영화도 풀숏-바스트숏으로 물러나 있다. 그 순간 거기에는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어야 한다. 그가 자신의 예술적 열정을 버릴 각오로 좋아했던 여자조차 끼어들 수 없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 관객은 땅바닥으로 내팽개쳐진다. 오로지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한 예술가의 자위적 몸짓만이 존재하는 순간이다.

그러한 결말은 감독의 자유라고 해도,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어떤 영화가 영화라는 예술의 본질을 파헤치고 그것의 궁극적 형태를 현시하기 위해 죽음을 손쉽게 끌어들일 때, 그 살해와 자살은 은유라고 해서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 이와 관련해 파웰이 했던 인상적인 말이 있다. “지난 10년간 우린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나가 죽으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지만, 이제 전쟁은 끝났다. <분홍신>(1948)은 우리에게 대신 예술을 위해 나가 죽으라고 말해 주었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그는 ‘예술을 위한 죽음’을 영화의 본질에 대한 은유로 사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영화에서 죽음은 보는 사람에게 늘 은유를 넘어서는 효과를 가진다. 그건 무언가나 누군가를 위한 죽음이기 이전에 죽음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사실을 간과한 채 자기 예술의 완성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연출하는 파웰의 결단에 마음이 얼얼해진다.


이후경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