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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켄 로치의 시대정신: 레드&블루

[특집]미래를 기대하려면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 켄 로치의 세계

미래를 기대하려면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 켄 로치의 세계



2007년에 만들어진 <자유로운 세계>는 켄 로치의 영화 중에서 드물게도 확실한 피착취자가 아닌, 피착취자와 착취자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이주노동자 직업소개소에서 일하던 싱글맘 앤지는 상사의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회사를 나와 진정 고달픈 생활인의 입장에서 정당한 이유와 목적을 갖고 사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점차 사회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있는 불법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을 악용하여 자기 배만 불리려 하는 악덕 고용주로 변해가고, 결국 자신에게 임금을 떼인 이주노동자들의 손에 처벌당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그녀는 회개는커녕 전보다 더 독해져 있다. 불법 이주노동자를 모집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간 그녀는 착취의 원리를 완전히 내면화하여 자신과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작정하고 이용해 먹는다. 오프닝 신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이 엔딩 신은 상황이 전보다 나아지기는커녕 훨씬 더 나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국내 개봉 당시, 켄 로치는 『씨네2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짧게는 낙관적이라고 보기 힘들겠지만 길게 보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미국 경제는 재정 위기로 붕괴 위험에 처해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란 불안정하며 불평등을 심화한다. 미래를 기대하려면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잘 조직되어 있고, 얼마나 잘 싸우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2014년, 그에게 같은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면 그는 무어라 대답할까. 어쩐지 이 초지일관의 사회주의자 감독은 여전히 똑같은 대답을 들려줄 것만 같다.


그의 말처럼, 그의 영화는 노동계급의 전망과 관련해 늘 단기적 비관과 장기적 낙관 사이 어디쯤에서 서성여왔다. 이는 홈리스 문제를 다룬 <캐시 컴 홈>부터 노동계급 여성의 삶을 들여다 본 <업 더 정션>, 리버풀 항만 노동자 파업을 소재로 한 <빅 플레임>, 탄광촌 소년의 운명의 그린 <케스>, 20세기 초 영국 노동계급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훑어본 <희망의 나날들>, 건설 노동자들의 정치적 각성 과정을 뒤쫓는 <하층민들>, 글래스고 청년들의 우울한 현실을 담아낸 <내 이름은 조>, 철도 노동자들의 변화한 조건을 살핀 <네비게이터>, 이주노동자 착취 구조를 정반대 관점에서 들여다 본 <자유로운 세계>, 나이 든 우체부의 곤경에서 출발한 <룩킹 포 에릭>, 그리고 백수 청년의 인생 반전을 꾀한 <앤젤스 셰어 : 천사를 위한 위스키>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서 감지돼온 바다. 대개 그의 작품들은 점점 나빠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불가피한 시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요약되는 실낱같은 희망 사이에서 멈춰선 채, 아직 도착하지 않은 밝은 미래를 기약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이후, 그의 영화에서 비관의 색채가 낙관의 색채보다 좀 더 짙어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노동자들과 하층민들 사이의 연대의식과 그들의 결속력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점점 더 희미해져 갔으며, 그러한 믿음과 기대는 역사극을 통해 재방문한 과거나 판타지적 장치를 통해 만들어낸 가상의 미래 속에서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렇지 않고 오로지 현재적 상황 속에 자리 잡은 그의 영화들은 종종 그의 가장 우울한 작품들로 인식됐다.



<자유로운 세계> 외에 <하층민들>과 <네비게이터>, <내 이름은 조>도 그런 계열에 속하는 영화들이다. 특히 <하층민들>과 <네비게이터>는 10년의 간격을 두고 만들어졌음에도 비슷한 내용을 다룸으로써, 현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전자가 건설 노동자로 일한 적 있는 빌 제시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막노동판 일꾼들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고발한다면, 후자는 영국 국유철도의 해체 이후 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된 철도 노동자들의 피폐한 처지를 낱낱이 파헤친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파국에 가까운 비극적 결말 속에서 마무리된다. 이런 현상유지, 혹은 악화일로의 상황은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내 이름은 조>와 <스위트 식스틴>에서 훨씬 심화된다. 20살 남짓한 젊은이들이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고 살아보려 노력하지만, 제대로 된 직업조차 구할 수 없는 그들은 마약과 고리대금에 발목을 붙잡혀 도망자 신세가 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계속해 이런 작품들이 나오다 보니 2000년대 말과 2010대 초, <룩킹 포 에릭>이나 <앤젤스 셰어 : 천사를 위한 위스키> 같은 코미디 영화들이 나오기까지 그의 영화에서 한 줌의 희망마저 증발해 버렸다고 느낀 평자들이 많았다.


무엇이 그의 영화를 그토록 어둡게 만들었는지 예상해 보기란 어렵지 않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 로치는 이전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던 텔레비전 영역에서도, 새롭게 나아갈 길로 선택했던 영화 영역에서도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의 생산력이 감소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가 그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급변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홈리스 문제, 의료제도, 노동쟁의 등을 다룬 텔레비전 작품들을 통해 사회주의 감독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1980년대에 이르러 대처주의라는 크나큰 벽에 부딪혔다. 1979년에 수립된 마가릿 대처의 보수당 정권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당 정부에 의해 고수돼온 각종 국유산업과 복지정책을 폐기하고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경제개혁에 집중했다. 국영기업들은 민영화되었고, 완전고용 목표는 포기되었으며,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규제는 강화된 반면 민간 영역의 규제는 완화되었고, 통화정책과 금융시장은 활성화되었다. 1990년, 대처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1997년,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누가 총리직에 앉고 누가 행정부를 이끌건 상관없이 신자유주의의 거센 바람은 계속됐다.


이런 변화가 노동계급에게 미친 영향은 분명했다. <네비게이터>에 잘 나타나있는 것처럼, 수직적 싸움은 수평적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노동 조건의 변화 속에서 노동자들의 연대의식과 투쟁의지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경쟁사회 속에 휘말려 들어간 노동자들은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동료 노동자들과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찍이 로치는 <빅 플레임>, <랭크 앤 파일>, <지도부의 문제들> 같은 TV 작품들에서 노동조합 지도부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계속해나가고 있는 평조합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이제는 그런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조차 힘든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로치 본인의 상황도 녹록치 않았다. 많은 영국 감독들은 문화 분야 전반에 대한 정부 지원이 대대적으로 감축되고 영국 뉴웨이브 영화를 가능케 했던 미국 자본의 상당 부분이 빠져나간 상황 속에서 TV로 발길을 돌려야 했고, 로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나마도 BBC를 비롯한 방송국들의 내부 분위기는 전보다 훨씬 경직돼 있었고, 공공연히 이루어져왔던 검열도 한층 강화됐다. 거기다 로치는 오랜 파트너십을 맺어 왔던 제작자 토니 가넷과 이별한 뒤 새로운 제작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상태였다. 그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1980년대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그에게 분명 “해로운” 시기였다. 그리고 그 점이 그로 하여금 예전만큼 쉽게 희망을 말할 수 없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그에게 역사극이 이전보다 더 유의미하게 느껴졌을는지도 모른다. 노동계급의 체념과 무기력에 직면한 그는 <랜드 앤 프리덤>이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같은 역사극을 통하여 현재의 영국에 부재하는 가능성을 타국의 과거로부터 불러내고자 했다. 비슷한 전략은 BBC 방영 당시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4부작 드라마 <희망의 나날들>에서도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 작품이 20세기 초 굵직한 노동 투쟁 사건들을 되짚으며 1970년대 영국 노동계급 내부의 분열을 상기시켰던 것처럼, <랜드 앤 프리덤>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역시 스페인 내전과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좌파 내부의 갈등을 조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진정한 사회주의의 실마리를 재발굴하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랜드 앤 프리덤>은 로치의 이념이 가장 첨예하게 구현돼 있는 작품 중 하나다. 파시즘과 자본주의를 상대로 한 투쟁 속에서 ‘좌파’는 언제나 단일한 집단명사가 아니었다. <빅 플레임> 때부터 로치와 함께해온 각본가 짐 앨런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좌파와 민주주의 국가들이 단결하여 파시즘에 맞서 싸웠다는 “신화”를 깨부수고자 했다. 그 신화가 유지되는 한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는 역사 속에 묻혀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치는 내전의 전체적인 윤곽을 제시하는 대신, 온건주의자부터 급진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적과 노선의 청년들이 모인 일개 민병대를 중심으로 하여 드라마를 전개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벌이는 장황한 토론을 담은 신들을 통해 넓은 정치적 스펙트럼 속에서 진정한 사회주의의 정신을 가려내고자 했다. 그 과정의 목격자 자리에 앉게 된 관객 역시 민병대 일원 중 하나인 비교적 순진한 영국 공산당원 청년 주인공과 함께 스페인 내전을 통과하며 급진주의적 사상에 이끌리게 된다. 그런 이끌림이 가능하도록 관객을 선동하는 데 로치가 특별한 재능을 지닌 감독임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다.


로치가 관객에게 바란 반응은 영화 속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청년의 손녀는 할아버지의 과거 행보에 고무된듯, “전투에 참여하라”는 윌리엄 모리스의 시구를 읊는다. 사실상 그는 텔레비전 감독으로 활동했을 때부터 노동자나 하층민의 내면에 그 같은 변화를 일으키고자 노력해 왔고, 그래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나 하층민이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는 온건한 리얼리즘적 드라마와 신파의 형식을 채택해 왔다. 급진주의를 ‘표현’하는 것보다 급진주의에 부합하는 ‘반응’을 일으켜내는 데 더 골몰했던 그로써는 당연하고도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가 이런저런 형식적 절충을 감수하면서까지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다시금 그에게 여전히 희망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1969년 <빅 플레임> 방영 당시, 가넷은 파업을 다룬 드라마지만 고용주는 거의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시청자들에게 미리 귀띔한 적이 있다고 한다. 영국의 영화학자 존 힐은 로치에 관해 쓴 책에서 그 사실을 언급하며 자본가란 “정부, 미디어, 노동조합 지도부 뒤에 숨어서” 움직이는 것이기에 그런 묘사는 당연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 자본의 정치적 권력은 훨씬 더 미시적인 수준에서 산발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이들도 그런 메커니즘을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또 재생산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어떤 문제들이 곪아터졌을 때조차, 원인의 규명과 제거가 쉽지 않다. 저들의 권력도, 우리의 투쟁력도, 손에 붙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바뀌어버린 시대다. 이토록 막막한 비가시적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이 완전히 망가져 있다는 느낌에 잠겨 살아가고 사람들에게 로치의 영화는 어떤 현재적 의미를 전달해줄 것인가. 그런 궁금증이 지금 로치의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든다.


이후경│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