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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이스라엘 영화제 - 21세기 주목할 작가 특별전

[특별전] 이스라엘의 최근 주목할 작가들을 만나다

이스라엘 영화들이 그리는 보통 사람들의 고민


 

 


 

많은 영화들이 이스라엘을 그려왔다. 특히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 그리고 그 이후 팔레스타인과 아랍 국가들과의 갈등을 다룬 영화들을 보며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어떤 인상을 쌓아 왔다. 하지만 그 영화들이 이스라엘의 단면을 잘 포착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은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상을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자. 야마카를 쓰고 수염을 땋은 랍비들이나 성지순례 명소의 기록 영상들, 그리고 해외 토픽 뉴스에서 본 군인들의 모습을 빼고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이스라엘 영화제”는 지금까지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이스라엘 영화’ 속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물론 지금까지 만들어진 수많은 이스라엘 영화들 중 최근 개봉한 7편의 영화를 본다고 해서 그들의 삶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들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다른 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나 이웃 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군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반항하고, 은행 대출로 고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젤리피쉬>, <밴드 비지트- 어느 악단의 조용한 방문>

 

 

 

 

이번 상영작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자신의 문제와 최대한 직면하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장르의 상상력에 기대지도 않고, 환상이란 영화적 장치를 안이하게 사용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사실적인 묘사로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각 영화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돌려 말하지 않고, 이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거짓 희망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바로 문제를 제기하고 끝날 때까지 여기에 대해 계속 고민하는 것이다.


<젤리피쉬>(2007)와 <밴드 비지트 - 어느 악단의 조용한 방문>(2007)을 보자. <젤리피쉬>는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여성들의 일상과 함께 삶의 어려움 끝에서 찾는 작은 위로를 그린 영화로,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등장인물들이 자신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옆의 사람에게 선뜻 손을 내민다는 것이다. 이들이 만약 해변에서 길을 잃은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성질 고약한 할머니를 그냥 무시해 버렸다면, 모욕을 당하는 사람과 함께 싸워주지 않았다면 영화가 시작한 지 십 분 만에 그냥 끝나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인물들은 자기 문제에만 함몰되지 않고 주위를 돌아본 후 옆 사람에게 손을 내민다. 거창한 건 아니다. 하지만 떨어진 물건을 주워주고 담배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다음 장면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이 하나씩 이어지다 보면 어느새 작은 위로의 순간이 발생한다. 하늘에서 갑자기 안정적인 일자리가 떨어지거나 좋은 집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현실을 좀 더 따뜻하게 볼 수 있는 여유는 생기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들의 팍팍한 삶의 조건이 그대로임을 지적하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비현실적 요소가 등장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이 영화가 제시하는 위로를 미심쩍게 바라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인물들이 보여 준 연대의 손길이 영화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옆 사람에게 나지막하게 말을 거는 모습은 <밴드 비지트 - 어느 악단의 조용한 방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에서 온 전통음악 밴드가 공연차 이스라엘로 여행을 가며 벌어진 일을 그린 이 영화 역시 이스라엘 시골의 주민들이 낯선 이집트인들에게 건내는 말 한 마디가 돋보이는 영화다. 이게 뭐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 느낌이 조금 달라진다. 굳이 저 옛날 모세가 홍해를 가른 이야기까지 안 가더라도 20세기 이후 두 나라가 서로 죽인 사람들의 숫자는 그리 적은 편이 아니다. 이런 역사적 갈등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 밴드는 이스라엘 시골 마을의 낯선 이들에게 환대를 받는다. 그런데 이 환대는 거창하고 감동적인 화해의 손길 같은 것이 아니라 당장 오늘 밤이 외로운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조용한 대화에 가깝다. 수줍음을 타고 무뚝뚝하더라도 그냥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그러니 극적인 사건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길을 잃은 밴드는 다시 길을 찾아가고 마을 주민들은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날 밤의 풍경에서 긴 역사 속에서도 끝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가 잠깐이나마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면 그건 단지 착각인 걸까.


 

<아버지만의 영광>, <레스터레이션>

 

 

 

 

앞엣 두 영화가 자신들이 처한 문제를 조용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면 <아버지만의 영광>(2011)과 <레스터레이션>(2011)은 보다 극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끄집어내고 파헤친다. 이때 등장인물들은 괴로워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때까지 문제를 키워버린다. 그 과정에서 미처 몰랐던 문제까지 새롭게 드러나지만 절대 멈추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다룬 <아버지만의 영광>을 보자. 탈무드를 연구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연구를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긴다. 자신의 평생을 광범위한 기본자료 연구에 바쳐온 아버지는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에 몰두하는 아들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불운이 겹치며 아버지의 연구는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고 아들은 어느새 모두에게 인정받는 학자로 성장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인터뷰를 통해 이 불만을 직설적으로 말해버리고, 자신이 아버지의 연구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들은 엄청난 배신감과 실망을 느낀다. <레스터레이션> 역시 마찬가지다. 아들은 아버지가 적자만 내는 고가구 복원 가게를 그만 정리했으면 하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배신감과 실망을 느낀다. 하지만 아들은 아들 나름대로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둘의 갈등은 계속 커져 간다.


두 영화에서 나타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는 단순히 몇 가지 갈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감정과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버지만의 영광>의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 그리고 측은함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아버지 역시 아들에게 자랑스러움과 질투심을 함께 느끼고 있다. 이렇게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때 예상 못 한 작은 사건이 발생하자 둘의 관계는 되돌리기 힘든 대립으로 치닫는다. 또한 <레스터레이션>의 아버지는 자신의 일을 잘 이해하는 부하직원 안톤을 아들처럼 대하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 때문에 더 차갑게 행동하며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그런데 단지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영화들이 문제를 폭발하기 직전까지 키워놓은 뒤 봉합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이 영화들은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면서도 이것을 해결하지 않는다(또는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상처를 가까이 들여다 보기만 할 뿐 거기서 멈춰버리는 것이다. <아버지만의 영광>은 결정적인 순간에 영화를 끝내버리고, <레스터레이션>은 그저 인물들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들에는 분노와 체념이 섞인 슬픔의 감정이 넘쳐나지만 그 다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마무리 방식은 결말과 마주하기를 주저한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열린 결말과는 다른 것이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두 영화가 보여준 문제제기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노아의 홍수>

 

 

 

이런 맥락에서 지적장애를 가진 형을 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노아의 홍수>(2009)는 어떻게든 이야기의 끝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 영화 속의 아버지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일을 쉬고 있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며, 소년은 한창 예민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법한데 한 가지 사건이 더 발생한다. 지금까지 보호시설에서 지내던 지적장애인인 큰아들이 시설 측의 사정으로 다시 가족들과 살게 된 것이다. 일상적인 의사 소통이 불가능한 데다 골치 아픈 사고를 치는 이 형은 등장과 동시에 가족들의 삶을 더 고달프게 만든다. 어머니는 이웃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빠지고 소년은 친구들의 놀림을 참아야 한다. 아버지의 가장으로서의 능력이 더 약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만약 앞의 두 영화가 이 이야기를 영화화했다면 가족들이 느끼는 고통의 그래프가 가장 높아졌을 때 냉정하게 영화를 끝내거나, 연민의 시선과 함께 이들에게서 서서히 멀어지며 마무리를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아의 홍수>는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고 끈질기게 희망을 불어넎을  빈틈을 만들어 낸 다음 결국 봉합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건 변하지 않지만 적어도 오늘이 어제보다 마음이 좀 더 가벼워지기는 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말이 전혀 안 통해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형에게 말을 거는 동생의 노력이나 늦은 밤 괜히 잘 알지도 못하는 컴퓨터 얘기를 꺼내는 아버지의 노력 같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진다.  이런 작은 노력이 그 결말에 이르러 따뜻한 감동을 만들어내는 건 물론이다.


 

<매치메이커>, <2 나이트>

 

 

 

그리고 중년의 소설가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십대 시절을 추억하는 <매치메이커>(2010)와 최근 이스라엘 독립영화의 한 경향을 엿볼 수 있는 <2 나이트>(2012)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지금 이스라엘 사회의 문제를 고민한다. 특히 <매치메이커>는 이스라엘 사회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문제들을 고민해 왔는지 짐작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즉 레바논 등 외국과는 계속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홀로코스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으며, 동시에 미국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로 설레고 있다. 즉 서로 다른 무게를 지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고민이 한꺼번에 섞여 있는 독특한 풍경을 그리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기본적으로 과거에 대한 향수를 깔고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무작정 과거를 낭만화하지 않는 것 역시 이 영화의 미덕 중 하나다.


한편 <2 나이트>는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한 젊은 남녀가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로만 이루어진 독특한 컨셉의 영화이지만 그 안에서도 지금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간접적으로 그린다. 이를테면 콘돔 사용에 대한 의견 대립을 통해 혼란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바뀌는 새로운 가치관과 여전히 남아 있는 과거의 가치관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이다. 괜히 필요 이상으로 심각해지지 않으면서도 지금 이스라엘의 젊은 세대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한국의 젊은 영화들과 비교해 보아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번 “이스라엘 영화제 - 21세기 주목할 작가 특별전"의 7편의 상영작들이 각자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지 잠깐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처음에 얘기했듯이 이 영화들만으로 이스라엘 영화의 커다란 경향이나 현재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은 역부족일 것이다. 다만 이 영화들이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높은 주목을 받았다는 것과, 이 영화들을 만든 감독들이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은 흐름을 짐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특히 이번 상영작들이 어떤 식으로든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홀로코스트라는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부모 세대에 대한 조심스러움과 그들이 이루어낸 것에 대한 존경이 있으며, 그와 동시에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짜증 섞인 반발심이 섞여 있다. 만약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 사이에 새롭게 만들어진 이스라엘 영화들을 본다면 이 문제들은 또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을까. 그때도 여전히 용감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며 옆 사람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김보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