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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클레르 드니 회고전

[클레르 드니 회고전] 감각의 영화: 클레르 드니의 세계

감각의 영화: 클레르 드니의 세계


낯섦, 이방인, 주변부, 어두움, 신체, 감각, 타자 등. 클레르 드니의 영화가 연상시키는 미묘한 단어들이다. 1990년대 이후 프랑스 영화가 보여주는 새로운 흐름으로 비평가들은 ‘감각’과 ‘신체’에 대한 관심을 꼽는다. 그 대표적인 감독이 필립 그랑드리외, 가스파르 노에, 브루노 뒤몽, 베르트랑 보넬로, 카트린느 브레이야 등이다. 클레르 드니 역시 이런 경향에 속하는 주요 감독으로 여겨진다. ‘감각의 영화’라 할 수 있는 이 경향은 조형적 측면의 강조라는 프랑스 영화미학 전통을 신체와 연결해 확장시키며, 영화적 서사구조와 미장센에 독특한 흐름을 형성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조형적 내레이션을 신뢰하는 영화에 동질감을 느낀다”고 밝힌 것처럼 드니는 영화의 설명적인 화면 구성이나 대사보다는 조형적인 이미지를 통한 내레이션 구성과 연결에 집중한다. 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뿐 아니라, 대사보다는 침묵, 안무와 같은 신체 언어, 스토리의 빈번한 생략, 파편화된 화면 구성, 인과율의 단절과 같은 영화 언어의 사용은 클레르 드니의 영화가 프랑스 영화 가운데서도 더욱 낯설고 난해하게 느껴지고,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진형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에 위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이방인과 타자의 세계


프랑스 행정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카메룬, 소말리아, 지부티 등 아프리카를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클레르 드니는 자신을 ‘아프리카의 딸’이라고 할 정도로 아프리카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드니에게 아프리카는 낯선 곳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항상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드니는 데뷔작 <초콜렛>(1988)에서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백인 여성의 호기심과 애정어린 시선으로 아프리카를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초콜렛>을 시작으로 드니는 이후 식민주의와 포스트 식민주의로서의 아프리카에서 나아가 이질적이고 낯선 세계에 대한 관심과 시선, 이방신, 타자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으로서의 타자의 신체 등 그녀의 영화를 특징 짓는 여러 요소로 영화적 지형도를 그려나간다.

드니 영화의 특이성은 먼저 영화의 배경과 인물의 선택에서 드러난다. 배경은 항상 이질적이고 낯선 장소이며, 지정학적으로 주변부에 속해 있다. 또한 배경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예외적이고, 극단적일지라도 사건의 전개 양상은 매우 일상적이다. 드니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주류에서 멀리 떨어진 소외 계층에 속하며 사회적으로 타자이다. 흑인, 게이, 청소년 등 이방인이나 주변인, 혹은 심리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단절된 이들에 대해 드니는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아프리카와 흑인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된 관심으로, 데뷔작 <초콜렛>에서 프랑스 식민지 카메룬에서 안주인을 사랑한 흑인 하인에 대한 시선에서 이런 특징이 엿보인다. 알제리를 비롯해, 아프리카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는 프랑스의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이유에서 찍은 <네네트와 보니>(1996)는 그 변두리인들 가운데 부모 없이 사춘기를 힘겹게 통과하고 있는 오누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잠들 수 없어>(1993)에서는 흑인 게이 살인자의 삶을 이방인인 리투아니아 처녀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프랑스 독일 공동 채널 ‘아르테’의 제작 의뢰로 만들어진 <좋은 직업>(1999)은 중동의 디부티라는 변방에서 프랑스 외인부대의 생활을 담은 것이다. 가장 평범한 백인 프랑스 여인의 하룻밤을 다룬 <금요일 밤>(2002)은 이제까지 자신이 누렸던 작은 소우주에서 다른 지대로 이행해 가려는, 이젠 더 이상 여기에 속하지는 않지만 아직은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 타자로 여인이 묘사된다.

이처럼 그녀는 초기 아프리카와 흑인이라는 분명한 지정학적 지형도를 확장시켜 주된 관심을 이방인, 타자와 몸이라는 탈-시공간적이고 근본적인 테마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영화 속 배경도 파리와 같은 주류 공간으로 바뀌고 백인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러한 변모는 그녀의 주된 관심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심층적이고 내적인 문제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와 관련한 작업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낭시가 직접 출연하는 단편이 포함된 옴니버스 <텐 미니츠: 첼로>와 낭시의 동명의 책에서 영감을 얻은 <침입자>(2004)는 낭시에게 얻은 철학적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낭시의 책 『침입자』는 자신의 심장이식 수술의 경험을 존재 내에 공존하는 타자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통해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클레르 드니의 관심과 일치한다.





감각의 세계, 매혹의 대상이자 장애물로서의 몸


이렇듯 그녀의 관심은 낯선 것들이 우리의 신체, 감각의 작용, 욕망과 어떻게 연결되며 작용하는가이다. 감각으로서의 몸은 그녀의 영화에서 이중적이다. 초기 매혹과 호기심의 대상으로서의 몸의 포착은 후반으로 갈수록 욕망의 충돌과 장애물로서의 몸의 표현에 집중한다. 낯설고 이질적이기 때문에 매혹적인 동시에 위험하다. 이는 몸과 감각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세계이다. 무엇보다 타자의 몸은 매혹적이다. 가시적으로 외부에서 바라본 몸은 이끌림, 매혹적인 욕망의 세계로 초대한다. <좋은 직업>의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소녀들의 몸, 사막에서 신체를 단련시키는 외인부대의 몸은 마치 현대무용에서 안무 동작처럼 시각적이고 형상적인 아름다움과 매혹의 대상으로 묘사된다(드니는 프랑스의 안무가인 마틸드 모니에르의 신체를 담아낸 <마틸드를 향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네네트와 보니>에서 보니는 이웃에 사는 빵집 부인의 몸에 매혹되고, 네네트는 임신한 자신의 신체를 경멸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매혹된다.

매혹된 신체와의 만남은 처음에는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촉각적인 접촉, 어루만짐, 애무 등으로, 이는 긴장되고 욕망하는 신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곧 그 접촉은 의도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만들고 그것은 때로 충돌하고 서로를 파괴한다. 시각적 만남 이후 촉각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 영역은 겹쳐지고 확장된다. 그리고 다시 가장 근접한 만남, 접촉면 사이 혹은 그 위에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탄생한다. 타자들이 만나 이루어지는 세계, 타자를 인지하고 접촉이 일어난 후에 이루어지는 감각 세계는 이성을 넘어선 세계로, 여기에는 감각의 충돌이 있다.

감각의 충돌은 가시적인 영역에서 섹스를 만들고, 범죄를, 그리고 전쟁을 만든다. 그 충돌은 때로 매혹과 경이감을 일으킬 것이나 때로 파괴와 해체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결과는 섹스와 범죄의 결말로서의 어둠의 세계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1990)에서의 불법 투계장, <트러블 에브리 데이>(2001)에서 섹스를 하며 신체를 훼손하는 미지의 질병에 걸린 주인공들, <돌이킬 수 없는>(2013)에서 근친상간적 어둡고 은밀한 공간은 그런 어둠의 세계를 반영한다. <백인의 것>(2009)에서 흑인, 백인의 것, 즉 타자에 대한 과도한 매혹은 식민주의과 살육과 내전을 만든다.

하지만 클레르 드니에게 주된 관심은 결과로서의 가시적인 사건보다는 감각-충돌의 만남과 그 세계의 생성에 있는 듯하다. 그녀의 관심은 비가시적인 사건, 즉 최초의 접촉, 시각적인 만남과 촉각적인 만남, 그리고 그 접촉면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비가시적 영역을 가장 접근해서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그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감각-욕망의 어두운 세계


후기작 <트러블 에브리 데이>, <백인의 것>, <돌이킬 수 없는>과 같은 작품은 느와르풍의 영화, 범죄, 호러, 스릴러와 같은 장르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이 영화에서 드니는 감각의 어두운 측면, 즉 신체의 훼손, 파괴, 욕망, 집착, 강박증 등과 같은 이미지들에 집중한다. 여기에는 감각-욕망의 극단적 이미지들, 충동과 파괴가 있으며, 그것이 만들어낸 느와르적 세계, 퇴락한 세계, 음모와 범죄가 있다. <돌이킬 수 없는>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낯설고 기이하며 극단적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일반적인 장르로서의 범죄, 스릴러 영화는 오래된 장르적 관습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안전장치를 제공한다. 비교적 분명한 선악구도와 징벌적 결말 구조, 어두운 세계에 대한 익숙한 묘사, 장르적 내러티브와 이미지의 차용의 현실지시적 강도, 사실적인 묘사의 수위가 높더라도 상대적으로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드니 영화에서 모호한 선악 구도, 빈번한 생략, 과거와 현재의 혼재, 지극히 일상적인 접근 등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방식과 예측을 벗어난 결말은 관객에게 난해함과 불편함을 준다. <트러블 에브리 데이>에서 타자의 신체의 훼손은 관습적 호러 장르에서 용인되는 방식과 다르다. 위협의 순간은 가장 매혹적인 순간에 일어난다. 접촉에의 욕망이 가장 극에 달한 순간에 신체는 파괴된다. <백인의 것>에서 피를 나눈 형제자매처럼 가까운 사람들이 총으로 위협하고, 가장 정상적이고 안정된 순간이 우리를 배신할 것이다.




드니가 그리는 영화적 지형도에서 가장 분명한 변화를 보려면 <초콜렛>과 <백인의 것>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타자이자 이방인인 백인 여성이 바라본 아프리카 식민지라는 동일한 요소가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커다란 간극으로 드러난다. 향수가 깃든 로맨틱하고 평화로운 공간으로서의 <초콜렛> 속의 백인 여성과 그것을 거울화(mirroring)하는 <백인의 것>의 백인 여성은 교만하고 물욕에 찬 눈먼 여성처럼 보인다. 그녀는 아름다운 원피스를 입고 흑인들과 친근하게 지내며 함께 노동하면서 자신이 누리는 평화와 안락한 삶의 이면을 보지 못한다. 저변의 어두운 세계가 서서히 드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감각을 신뢰하는 ‘눈먼 자’이다. 두 영화는 여전히 몸과 감각의 세계를 그리지만, 한편에서 다른 한편으로의 분명한 이행이 있다. 타자의 매혹적인 신체라는 순진한 세계는 그 욕망의 감각이 만들어낸 어두운 세계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드니의 인물들이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감각 세계의 충돌로 인물은 이미 파괴되고 분열되었다. <잠들 수 없어>에서 살인마가 되고, <백인의 것>에서 백인 여성과 아들은 광기에 빠지고, <돌이킬 수 없는>에서 아버지와 딸, 그리고 어머니까지 세 명 모두는 분열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한 가족이다. 감각 세계에서 자아가 파괴되고 길을 잃은 신체는 광인이 되기에 이른다.  

신체, 감각 작용은 비극을 만든다. 매혹의 순간은 일시적이며 달콤하지만, 파괴의 지점까지 이끌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경고의 메시지가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의문은 우리가 어떻게 신체를 길들이고 서로 화해할 수 있는가이다. 혹은 비가시적인 감각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되는지를 알고, 그것을 조정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드니의 인물들은 실패한 인간이다. 그리고 경제적, 이념적, 종교적 갈등과 테러로 얼룩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현재, 세계의 모습이 이를 증거한다.

임세은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