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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영원한 떠돌이 : 찰리 채플린 회고전

[찰리 채플린 회고전] 외로움의 전문가, 찰리 채플린 - 채플린의 초기작을 중심으로

외로움의 전문가, 찰리 채플린

- 채플린의 초기작을 중심으로




찰리 채플린의 영화는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웃음보다 슬픔이 더 강하게 남는다. 찰리 채플린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건 이런 특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줄 수 있는 감독이자 배우였다. 그리고 둘은 신기하게도 서로의 영역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원숭이에게 코를 물어뜯기는 채플린의 모습에 웃었다고 해서 <서커스>의 마지막 장면이 덜 슬퍼지는 것이 아니며, 아이를 뺏기고 홀로 남은 채플린의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키드>의 권투 장면이 덜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채플린은 웃음과 눈물이 서로 섞이지 않게끔 각 장면들을 세심하게 조율했고,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하나의 장면에서 마음껏 슬퍼하거나 마음껏 웃을 수 있다(이 글의 주제는 아니지만, 이것이 버스터 키튼과 채플린의 차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키튼이 만들어내는 장면에는 종종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경찰>의 마지막 장면이나 <카메라맨>에서 키튼이 혼자 야구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이 글에서는 채플린 영화의 눈물에 집중해보려 한다. 이 ‘눈물’이란 말은 단순한 상투적 표현이 아니다. 채플린은 자신의 연출과 연기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슬픈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시티 라이트>에서 채플린의 마지막 표정, 또는 <모던 타임즈>에서 채플린의 마지막 뒷모습을 생각해보자. 이런 장면들은 진지하게 영화의 근본적인 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거나 사람의 뒷모습을 롱숏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 관객을 슬프게 할 수 있는 것일까(그리고 이걸 해내는 영화와 여기에 실패하는 영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해서는 지금도 계속해서 고민 중이다. 그리고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이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채플린의 비밀’, ‘채플린의 신비’ 운운하며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어떤 미지의 영역에 가둬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런 방식을 택하기보다는 내가 채플린의 영화에서 슬픔을 느낀 장면들을 하나씩 이야기해보려 한다. ‘채플린의 비밀’에 닿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느낀 감정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둘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 글이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단순한 나열로 흐르더라도 양해해주길 바란다. 또한 많이 논의된 <시티 라이트>, <모던 타임즈>, <라임 라이트>와 같은 대표작보다는 초기 장편인 <키드>, <파리의 여인>, <서커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키드>(1921)

<키드>(1921)

<키드>는 채플린이 처음으로 만든 장편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한 가난한 여인이 아이를 버린다. 아이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가 결국 채플린의 품에 안기고, 채플린은 이 아이를 제 자식처럼 정성껏 키운다. 그러나 경찰이 이 사실을 알자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려 한다. 아이가 ‘좋은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채플린은 소동 끝에 아이를 뺏기고 실의에 빠진다. 그런데 마침 비슷한 시기에 지금은 부자가 된 아이의 어머니가 극적으로 자식과 재회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채플린은 경찰의 안내를 따라 깔끔한 집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아이와 만난다. 채플린과 아이, 그리고 아이의 어머니가 집으로 들어가면 “THE END” 자막이 뜬다.

이 이야기에서 도드라지는 건 단연 외로움의 감정이다. 국어사전은 외로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홀로 되거나 의지할 곳이 없어 쓸쓸하다.” 동어반복을 하자면 <키드>에서 도드라지는 건 홀로 되어 의지할 곳이 없어 쓸쓸해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슬픔의 감정이 만들어지는 건 주인공들이 외로워할 때이다. 단적으로 말해 채플린에게는 돈이 없어서 맛없는 음식을 먹거나, 힘센 사람에게 억울하게 맞거나, 먹고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건 그리 슬픈 일이 아니다. 심지어 아이가 아픈 것도 슬프게 그려지지 않는다. 가난이나 약함은 슬픔의 재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다소 무리하게 도식화하자면, 채플린에게 가난은 웃음의 소재이지 슬픔의 소재가 아니다.


<키드>의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를 보자. 침대에 누운 채플린이 다리를 펴면 찢어진 이불 사이로 발이 튀어 나온다. 제대로 된 이불도 없는 채플린의 형편을 보며 관객은 슬퍼해야 할까. 그러나 곧 채플린은 그 찢어진 틈 사이로 머리를 밀어 넣어 이불을 망토로 만들어버린다. 이 장면은 가난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채플린의 방법을 잘 보여준다. 아이가 아파서 누워있는데도 멍청한 의사를 등장시켜 웃음의 순간을 만드는 것도 비슷한 경우이며, 극단적인 빈곤의 상황을 묘사하며 웃음을 준 <황금광 시대>라든지 부자와의 빈부 격차를 유머 요소로 사용한 <시티 라이트>도 같은 예이다.

그런데 외로움의 문제로 넘어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채플린이 연기한 트램프, 또는 채플린이 만들어낸 인물들은 좀처럼 슬퍼하는 일이 없다가도 외로움 앞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속수무책이다. 채플린도 그렇고 아이를 버린 여자도 그렇다. 따라서 혼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독립적인 주인공 같은 건 <키드>뿐 아니라 채플린의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채플린은 영화 안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너무나 행복해하고, 그 사람이 떠날 때마다 이런 외로움은 처음이라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때 스크린 안에는 슬픔의 감정이 가득 차오른다.

꼭 이야기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 바로 <키드>에서 아이가 채플린과 헤어지는 첫 번째 장면이다. 이 이별 시퀀스에서 채플린은 아이를 뺏기기 싫어 주먹을 날리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지붕을 오르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경찰에 저항한다. 채플린의 필모그래피에서 찾기 힘든, 거의 액션 활극이라 불러도 좋을 이 거친 저항의 몸짓은 혼자 남겨지기 싫어하는 채플린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 소란스러운 장면이 결국 관객을 슬프게 만든다. 채플린에게 혼자 남겨진다는 외로움은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고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은 감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채플린이 아이와 다시 만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단순하고 소박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큰 안도감과 감동을 준다.



<파리의 연인>(1923)

<파리의 여인>(1923)

<키드>의 제작으로부터 2년이 지나 개봉한 <파리의 여인>은 채플린이 출연하지 않았으며, 유머가 없는 심각한 분위기의 멜로드라마다. 이야기는 서로 깊이 사랑하는 어떤 연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작은 사건으로 인해 멀어졌다가 계속되는 오해 때문에 갈수록 더 멀어진다. 결국 사랑에 실패했다고 생각한 남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권총 자살을 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여자는 고아들을 보살피며 조용히 살아가는 인생을 택한다.

이 작품은 언뜻 가슴 아픈 사랑을 그린 영화 같지만 영화의 에필로그와 마지막에 등장하는 자막 때문에 인생의 보편적인 외로움을 다룬 이야기로 읽을 가능성이 열린다. 만약 채플린이 사랑에 방점을 찍고 싶었다면 남자가 죽은 뒤 곧 영화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야기는 비극성이 정점에 달한 순간 끝났을 것이며, 남녀 주인공의 안타까운 운명은 더욱 강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죽고 난 이후에도 영화는 8분 동안(<파리의 여인>의 1/10의 분량에 해당한다) 혼자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남자의 어머니와 여자가 어떻게 교감을 나누고, 여자가 어떻게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지 말이다. 즉 채플린에게는 남자가 죽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이후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게 중요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무도회장에서 남자는 총으로 자신을 쏘고 바닥에 쓰러진다. 그러자 곧 사람들이 가득 모여들어 남자의 시신을 둘러싼다. 그런데 영화는 이때 갑자기 숏을 바꿔 집에서 혼자 지내는 남자의 어머니를 보여준다. 이 편집은 매우 갑작스러우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아마 채플린에게는 여러 선택이 있었을 것이다. 남자의 시신을 보여주어 슬픔을 더 강조할 수도 있었고 충격을 받은 여자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더 이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채플린은 숏을 바꾸어 혼자 조용히 지내는 노모의 모습을 보여준 뒤 다시 무도회장으로 돌아온다.


이 편집은 ‘논리적’이지 않다. 공간의 연속성은 물론 사건의 논리적 연속성과 정서적 연속성을 모두 깨트리기 때문이다. 비극이 절정에 달한 순간 갑자기 그 흐름을 끊고 전혀 다른 장면을 삽입하는 건 다른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편집이 아니다. 그러나 채플린의 머릿속에서는 남자가 죽는 숏과 홀로 남겨진 노모의 일상을 보여주는 숏이 붙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채플린에게는 한 사람의 죽음과 남은 사람의 외로움을 연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편집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비극에 슬퍼함과 동시에 남겨진 사람의 외로움을 떠올리는 것. 그만큼 채플린은 외로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이었다.

그리고 곧 등장하는 자막은 이러한 생각에 또 하나의 근거를 제시한다. “시간은 상처를 치료하고, 그 경험은 옆 사람을 향한 헌신이 행복의 비밀이라는 걸 가르쳐 준다.” 채플린은 행복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직접 힘주어 말한다. 이 말에 따르면 외로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으며 ‘고독’과 같은 낭만적 개념과도 거리가 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다소 갑자기 등장하는, 여자가 고아들을 돌보며 살아간다는 설정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채플린은 비록 슬픈 일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삶의 옳은 방식이라고 말한다. <파리의 여인>의 에필로그가 감동을 주는 이유이다.



<서커스>(1928)

<서커스>(1928)

그런데 <서커스>에서 채플린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내린다. <키드>에서는 유사 가족을 이루었고 <파리의 여인>에서는 고아들과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황금광 시대>(1925)에서는 커플까지 맺었지만 이 작품에서 채플린은 그냥 외롭게 남는 쪽을 택한다. 이 자체로도 슬픈 결말이지만 전작들의 따뜻한 결말을 떠올려보면 이 변화는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커스단에 들어간 채플린은 단원인 메르나와 가까워지고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메르나는 채플린을 연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단원을 좋아한다. 이 사실을 안 채플린은 자신이 프로포즈하려고 샀던 반지까지 남자에게 주면서 두 사람을 이어주려 한다. 결국 메르나와 남자는 행복하게 결혼을 하고, 채플린에게 계속 함께 서커스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채플린은 이들을 따라가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걸어간다. 영화는 여기에서 끝난다.

이때 채플린이 타의에 의해 혼자 남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외로움을 떠안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메르나와 그녀의 남편은 분명 채플린에게 같이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채플린은 뒤에서 따라가겠다고 거짓말까지 한 뒤 혼자 남는다. 이 행동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토록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하던 채플린이 자발적으로 외로움을 택했다는 사실이 영화 내-외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슬픔의 감정을 만든다. 이 장면은 부인할 수 없이 쓸쓸하고 서글프고 막막하다.


이런 <서커스>은 결말은 <키드>의 행복한 결말까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 정도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키드>의 채플린은 사람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채플린은 과연 그곳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을까? 혹시 모자의 행복을 지켜보다 <서커스>처럼 어느 날 다시 어디론가 떠난 건 아닐까. 괜한 걱정을 사서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서커스>의 마지막 장면은 그 정도로 어둡고 우울한 인상을 준다. 참고로 이 작품 이후 채플린이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결말을 다시 보여준 건 8년이 지난 뒤였다(1936년 작인 <모던 타임즈>). 그리고 1925년 작품인 <황금광 시대>를 1942년에 재편집해 개봉할 때는 이상하게 원래 엔딩이었던 두 사람의 키스 장면을 잘라 내버리기도 했다. 채플린과 연인이 계단을 올라 프레임 밖으로 나가버리는 장면에서 영화를 끝낸 것이다. 즉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행복한 마무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떠난 텅 빈 공간을 보여주며 영화를 끝낸다(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채플린의 개인사를 들춰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자녀의 사망, 그의 곁을 떠나갔던 여인들, 불명예스러운 스캔들, 그리고 유성 영화의 등장과 같은 요인들을 끌어들여 그의 작품과 개인사를 겹쳐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다른 차원의 해석이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서커스>의 외로운 정서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서커스>의 결말을 보며 마음이 아파 슬퍼지다가도 그 감정에 완전히 몰입하기는 망설여진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외로움을 거부하는 따뜻한 정서, 또는 <모던 타임즈>의 결말에 드러나는 작은 희망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포자기의 정서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서가 <서커스>를 채플린의 작품 중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서커스>는 외로움을 다루는 채플린이라는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눈앞에 있는 ‘안전한’ 결말(서커스단에 합류하는 것) 대신 떠돌이로 남는 것을 택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그 결단의 무게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결말에서 채플린이 내린 선택에는 완전히 동의할 수 없어도 그 장면에서 배어나는 외로움의 감정 자체는 절대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채플린은 그렇게 관객과 자신의 외로움을 공유하고야 만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영화를 통해 외로움을 전염시키는 힘이 있었고 <서커스> 이후로도 계속해서 외로움을 자기 작품의 주요 테마로 삼았다. 그야말로 외로움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전문가였던 것이다.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