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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2

오늘 부터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온수기 사건’에서 살아남은 나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어딘가 문제를 가지고 태어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부모님의 염려와 함께 무제한적 사랑에 둘러싸인 유년기를 보내었다. 그러던 와중 대퇴골 칼슘 결핍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아홉 살 해의 두 달 동안을 침대에 묶여 지내게 되었는데… 그즈음 우리 가족은 오를레앙에서 다시 파리 14구의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왔고, 부모님은 마치 루이 14세 시대 럭셔리한 주택이나 되는 것처럼 어린아이들 마냥 날뛰며 행복해했다. 나는? 나 또한 부모님처럼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어야 하겠지만, ‘이건 흥미 있는 경험이다’라고 중얼거렸고, 이왕이면 이 풍족한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작정했다. 부모님은 대퇴골 때문에 침대에서 두 달 동안 누워있던 나를 북쪽 영국해협과 근접한 노르망디 메를리몽 해변가로 요양을 보냈다. 거기서 나는 여름을 보내며 해변의 모래 위를 엉덩이로 걸어 다니는 법을 터득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엉덩이 걷기’에 이력이 나서 정상적으로 걷는 사람보다 더 빨리 걷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곧 나는 메릴리몽 해변가의 명물이 되었는데,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는 모래 삽을 들고 잽싸게 엉덩이로 걷는 소년의 친절함과 매력은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해변가에서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파는 장사를 하였다. 당시 아이들은 모래로 주머니를 만들어 어물전에 파는 것이 유행이었다. 어물전 상인들은 아이들이 가지고 온 모래주머니에 조개를 넣고 도시로 운송했기에 모래주머니가 필요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상술을 배울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래주머니에 색칠을 하거나 미리 조개를 넣어 팔았지만 나는 그냥 주머니에 모래를 넣기만 하고 조금 더 싸게 팔았다. 그렇게 하니 중간 상인 노릇을 하는 아이들이 생겨나 내 주머니를 더 많이 구입했고, 그들은 나름대로 색칠을 하거나 장식을 하여 더 비싸게 되팔아야 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순이익을 챙기게 되는 것은 나였다. 메를리몽 해변가의 아이들은 내 발밑으로 속속 들어왔고, 소년시절 나는 이렇게 권력의 맛을 보며 생색을 내는 태도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여름마다 메를리몽 해변가에서 3년을 보내고 난 후 대퇴골도 다시 원상복귀를 하여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만 했다. 상상해보라, 3년 동안 엉덩이로 걸으며 모래 장사를 하면서 추앙받던 소년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 부모님은 유명한 몽테뉴 고등학교 근처의 중학교 2학년 과정에 나를 집어넣었지만 나는 당연히 학교에 흥미가 없었다. 장난질이 더 멋있고 흥미 있게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파악했던 나는 학교를 가면 교실에 붙어있지 않고 윗반 아랫반 교실을 왔다 갔다 하였다. 들킬까봐 두렵지는 않았다.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상한 놈이 어슬렁거리는 구나’라고 중얼거리다가 말겠지. 며칠을 그렇게 교내를 어슬렁거리다가 들킨 후로는 내게 지정된 학년 교실에서 별반 움직이지 않았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나는 똑똑하면서도 멍청한 학생이었다. 나는 어디서든 왕이 되어야 직성이 풀리지만 동시에 나를 완전히 망각시키게 하는 재주도 있었다.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아무 말도 안하면 되니까. 반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거나 아주 흥미 있는 표현을 써가며 떠들어대면 그만이다. 내게 있어서 이건 일종의 게임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변에서 나를 어떻게 판단하든 상관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러한 학교생활은 몇 달을 가지 못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야 말았으니까. 



부모님은 나를 할머니와 고모와 함께 프랑스 서부 사르당 지방으로 보냈다. 메릴리몽 해변가에서처럼, 나는 그 촌구석에서 며칠 만에 권력을 잡았다. 처음에는 물론 쉽지 않았다. 시골 아이들은 나를 도시에서 온 외계인 취급을 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여전히 못생겼고, 키는 1미터 30센티에도 겨우 못 미치는 열두 살짜리 땅꼬마였다. 거기서 최악이었던 것은 나의 목에 항상 둘러쳐있던 나비넥타이였다. 시골아이들은 내가 등장할 때마다 ‘오 나의 친애하는 !’이라고 부르며 나를 놀려댔다. 그러나 상황은 곧 역전되었다. 아이들은 곧 나의 노예가 되었으니까. 먼저, 나는 한 달 만에 그 시골 중학교에서 월반을 했고 늘 일등을 차지했다. 나는 마치 화려한 깃털을 뽐내는 공작새가 된 것처럼 으스댈 수 있었다. 전학 오자마자 월반에다가 우등생이라는 소문은 사르당 지방에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소년시절, 나는 왜 그렇게 허영심과 권력의 욕망에 시달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폭군의 욕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떠받들어지는 쾌감과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었다. 이런 나의 첫 희생자는 할머니였다. 전쟁 중 생활의 어려움과 부모님의 부재와는 상관없이 나는 걸핏하면 할머니에게 용돈을 요구했다. 나는 가지고 싶은 것은 무조건 가져야 하는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단연코 거절했다. ‘왜 이렇게 귀찮게 구니. 네가 어제 내 지갑에서 돈을 꺼내가는 것을 이미 보았어 !’ 할머니의 말은 진실이었고, 나는 ‘알았어 ! 세상은 잔인하고 부당해 !’라고 소리치고는 울며불며 화장실로 뛰어가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물 내리는 짓을 반복하였다. 물론 화장실 문은 활짝 열어둔 채로 말이다. 할머니는 내 뒤를 어기적거리며 따라와서 나의 이상한 행위를 보고는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벌벌 떠는 손으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셨고, 나는 그걸 최대한 활용하는 몹쓸 소년 이었다 ! 





또 다른 피해자는 사르당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셨다. 할머니는 내가 신부님에게 수학과 라틴어를 배우라고 성당에 보냈는데, 나는 오만불손하게도 신부님보다 내가 더 똑똑하다는 것을 확신해버렸다. 신부님은 끔찍한 몽매주의에 사로잡혀 있어서 프로마송이라는 비밀 권력단체의 어둡고도 어두운 미사 의식에 관해 미소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묘사하였다. 나는 그런 신부님이 이상하지도 싫지도 않았고 오히려 재미있었다. 그리고 나와 신부님의 친밀한 관계를 최대한 활용했다. 신부님은 세례식이 있을 때마다 열두 살에 불과한 내게 대부노릇을 맡겼다. 사르당 지방의 주민들은 좌파성향이라 신도 악마도 믿지 않았다(당시 프랑스의 가톨릭계는 우익 성향의 사람들을 상징했다). 하여 세례를 준비하기 위해 이미 세례를 받은 성인들을 찾아 대부노릇을 맡기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세례를 받은 열두 살의 내가 어릿광대처럼 대부노릇을 하였는데, 사르당 지방에서 나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는 계기를 제공하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나는 빵집 아저씨와도 친구였고, 카페 주인과도 친구였으며, 사르당 지방 유지와도 친구였다. 그 지방의 사람들은 쉴 사이 없이 나를 초대하고 대접했다. 초대를 받을때마다 나는 노래를 한 곡조 뽑았고, 이내 나는 스타가 되었다. 나르시시즘에 푹 빠진 나는 화장실에 틀어박혀 변기 위에 올라 앉아 거울을 보며 노래를 부르거나 라신의 <페드르> 와 같은 비극의 대사를 연기하면서 읊어대었다. 그런 나를 거울로 관찰하면서 나 자신이 대단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저 그 순간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었을 뿐이다. 이 정도면 행복한 소년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완전히 그렇지는 못했다. 부모님은 전시 독일 치하의 파리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보고 싶어도 자유롭게 만나러 갈 수 없었다. 어쩌다 가끔 부모님께 날라 오는 엽서는 검열 때문에 형식적인 인사말만 간단하게 쓰여 있었고 (전쟁 중 검열의 이유로 편지는 금기시되었고 봉투 없는 엽서만이 가능했다) 나는 부모님께 인사말 아래 쉼표와 마침표, 느낌표를 이용하여 암호를 만들면서 의사를 소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딱 두 번 나를 보러오셨는데, 올 때마다 수염이 얼굴에 가득했으며 야밤을 이용하여 소리 없이 왔다가 떠나셨다. 그렇게 사르당에서 소년시절은 끝나고 있었고, 시네 클럽 활동이 곧 시작되었다. (계속)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보러가기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