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상영작 소개

장 엡스탱의 <어셔가의 몰락> - 공간으로 환기된 분위기가 압도적인 영화



장 엡스탱은 마르셀 레르비에, 루이 델뤽, 장 그레미옹과 더불어 프랑스 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포토제니(photognie)’이론을 제창한 루이 델뤽과 더불어 첫 번째 영화이론가이기도 했던 그는 영화와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동시에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의 주도적인 감독으로 활동했다.

 

<어셔가의 몰락>(1928)은 <파스퇴르>(1922), <충실한 마음>(1923), <삼면거울>(1927) 등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엡스탱의 영화들 중에서도 1920년대 후반에 유럽에서 일어났던 아방가르드 예술의 최고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을 모티프로 각색한 이 작품은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버전으로 여러 명의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지만, 엡스탱의 작품은 무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인상적인 버전, 걸작 중의 걸작으로 꼽힌다.



 

영화는 파리 남부의 늪지대를 배경으로 황폐한 집에서 벌어지는 괴이한 사건을 다룬다. 엡스탱은 슬로우모션 등의 기법을 동원하여 음울한 영상으로 표현했다. 마치 인상파 회화를 보는 듯한 탁월한 영상미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로더릭 어셔는 부인 마들린의 초상화를 살아있는 실재처럼, 진짜같이 그리려는 강박적인 모습을 보인다. 초상화를 통해서 부인 마들린의 영원성을 꿈꾸는 어셔의 강박적인 행동은 외형의 유사성과 영속성을 통해서 시간을 이겨내려고 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보여주는 것 같다. 게다가 살아있는 초상화를 그리려는 어셔의 병적인 집착은 1895년 영화가 탄생한 이래로 지금까지 스크린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점점 더 실재와 같아지려고 하는 영화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어셔가의 몰락>에는 나뭇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 안개 낀 호수에 흐르는 물, 흔들리는 커튼, 그리고 물 위에서 신비스럽게 펄럭이는 베일 등의 영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런 이미지들에서 엡스탱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헝가리 출신의 영화이론가인 벨라 발라즈가 『영화의 이론』에서 언급한 “아방가르드주의자들은 영화에서 영상적 환각이라는 수단을 통해 내적 기분이나 마음상태를 묘사하려고 했다”는 말은 엡스탱의 이 ‘놀라운 영화’가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를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가 영화에서 다루고자 한 것은 단지 에드가 앨런 포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을 홀리는 분위기와 독자에게 환기된 분위기의 연상 작용이다. 선이 없는 홀, 불안한 계단, 그리고 비극적인 그림자가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니는 어둡고 끝없는 복도가 표상하는 것. 문이 열리고, 커튼이 흐느적거리고, 손이 튀어나오고, 안개 낀 물 위로 베일이 떠도는 장면들. 이것은 스토리를 알아듣기 쉽게 보여주기 보다는 무서운 이야기의 어두운 인상이 자아내는 혼란스러운 분위기 그 자체, 그로 인해 지각되고 감각되는 연상 작용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신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