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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시네바캉스 서울

자신의 영화적 테마를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감독

[시네토크]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가 들려주는 우디 앨런의 세계

2010 시네바캉스가 한창이던 지난 8월 13일은 우디 앨런의 영화 세 편이 연속 상영한 ‘우디 앨런 데이’였다. 마지막회 상영작인 <마이티 아프로디테> 상영 후에는 전 스크린 편집장인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우디 앨런 영화에 대한 유쾌한 토론을 벌였던 그 현장을 전한다.


김형석(영화칼럼니스트, 전 스크린 편집장): 우디 앨런은 미국의 전형적인 토크 코미디, 뉴욕 지식인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주로 70년대 영화들을 많이 얘기하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주로 80년대와 90년대의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디 앨런을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가장 위대한 점은 오랫동안 꾸준히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스콜세지 같은 감독처럼 말이다. 우디 앨런은 60년대 말부터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그 당시라면 히치콕이 아직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고, 앤디 워홀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다.

우디 앨런을 규정하는 키워드가 몇 가지 있다. 제일 먼저 ‘뉴욕커’라는 키워드이다. 오늘 본 <마이티 아프로디테>같은 영화도 전형적인 뉴욕커의 면모를 볼 수가 있다. 우디 앨런은 뉴욕에 대해 애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면이 가장 잘 나타나있는 것이 아마 <맨하튼>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뉴욕은 어떤 절대적인 모태와도 같은 도시이다. 그가 영화에서 뉴욕을 벗어난 것은 2000년 이후에 들어서이다. 미국과 뉴욕을 벗어나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그 전까지는 줄곧 뉴욕에 천착한 영화 작업을 해왔다. 우디 앨런은 뉴욕을 굉장히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애니홀>에서는 L.A와 비교해서 굉장히 문화적인 도시로, 또 <한나와 자매들>에서는 도시 자체가 예술품인 도시로 보여준다. <브로드웨이를 쏴라>같은 영화에서 뉴욕은 갱스터의 도시이기도 하다. 두 번째 키워드는 유태인이라는 정체성이다. <애니씽 엘스>에서도 우디 앨런이 제이슨에게 하는 얘기들처럼, 우디 앨런은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유태인이라고 하면 우리 생각에는 대개 부유하다고들 생각하는데, 모두가 그렇진 않았고 이를테면 뉴욕 브룩클린 출신의 유대인들은 빈민이었다. <라디오 데이즈> 배경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그러한 브룩클린 출신의 유대인 공동체이다. 그가 코미디언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유태인이라는 정체성이 매우 중요하다. 우디 앨런의 코미디는 무작정 웃고 즐기는 코미디라기보다 약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강박증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있다는 점에 있어 그렇다. 우디 앨런의 특별한 면이라면 60년대 말에 데뷔한 감독들, 스콜세지나 코폴라 같은 감독들의 경우 모두 영화과 출신이었는데, 우디 앨런은 독특하게도 코미디언 출신이었다. 스탠드업 코미디, 즉 클럽의 무대에서 농담을 하는 만담가출신인 것이다. 굉장히 두서없이 던지는 스타일의 만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애니홀>은 우디 앨런의 스탠드업 코미디 스타일을 잘 볼 수 있는 영화다.

우디 앨런은 영화감독 보다는 뮤지션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다.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영화보다는 음악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펍에서 자신이 속해있는 밴드가 공연을 해오기도 했다. <와일드 맨 블루스>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보면 그러한 공연 모습들이 나오는데, 우디 앨런의 연주가 아마추어 이상의 실력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굉장한 음반 콜렉터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서 듣게 되는 재즈나 클래식 음악들은 대부분 그가 직접 선곡한 것들이다. 또한 우디 앨런은 작가이기도 한데, 최근에 한국에서도 그의 책들이 출간되기도 했다. 저술가로도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요즘도 희곡을 쓰고 있고, 90년대 까지만 해도 브로드웨이에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대신 10대 때부터 갖고 있던 타자기로 글을 쓴다고 한다. 이처럼 우디 앨런이라는 감독이 단순히 영화감독이라고 하기에는 그가 미국에서 갖고 있는 문화적 위치를 모두 함축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애니홀>이나 <맨하튼> 이전 영화는 한국에서는 많이 볼 기회가 없는데, 그 영화들을 보면 재미는 있지만 우디 앨런을 작가로서 규정하긴 어려운 면이 있었다. 우디 앨런은 <애니홀>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함으로서 A급 영화 감독으로 자리매김 했다고도 할 수 있다.· <맨하튼>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에 흑백영화이다. 미국을 비롯해서 프랑스 같은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한다면,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일 텐데, 이를테면 그 시기의 영화 중 <또다른 여인> 같은 영화를 보면 코미디와는 상관이 없는 영화지만 특별한 감흥을 남긴다. 우디 앨런이 80년대에 처음 만든 영화가 <스타더스트 메모리>인데, 그 영화에서 감독으로 출연한 우디 앨런은 ‘난 더 이상 코미디를 만들고 싶지 않아’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 이후의 영화들은 좀 더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으로 넘어가게 된다. 80년대는 할리우드에서는 액션 등의 오락영화가 우세하던 시기였다. 같은 시기 미국 영화 안에서 보자면 우디 앨런과 같이 영화를 만들던 사람은 드물었으며 독보적이었다. 이 시기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가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가 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존경하는 감독들에 대한 오마주가 등장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스타더스트 메모리>는 펠리니, <또다른 여인>은 베르히만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9월>이라는 영화도 코미디와는 무관하며, 베르히만의 실내극에서 나타나는 차분하고 철학적인 영화의 톤을 그대로 가져오고 있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 같은 영화 역시 ‘영화에 관한 영화’이다. 공황기의 한 여자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극장을 찾는데, 영화 속 남자가 현실로 나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는 내용이다.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하는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는 영화다. <한나와 그 자매들> 역시 <카이로의 붉은 장미>와 비슷한 면들이 있다. 우디 앨런은 영화에서 끊임없이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데, 총기가 오발되면서 삶의 의지가 불타오르게 되고 그렇게 무작정 거리에 나와 극장에 들어간다. 그 때 극장에서 보게 된 영화는 막스 브라더스의 코미디 영화다. 영화와 삶의 의지를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두 영화가 닮은 꼴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의 미국 영화산업에서 우디 앨런처럼 영화를 많이 만든 사람이 없었다. 그는 80년대에만 장편 10편, 단편 1편을 만들었다. 그리고 80년대에는 ‘현대인의 신경증’, ‘뉴요커’와 같은 우디 앨런적인 담론이라는 것이 형성되기도 한다. 이 시기 그는 대부분의 영화에 직접 출연하는데, 그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비교적 고정되어 있다. 그가 출연하지 않는 영화들은 톤이 조금 더 무거운 영화들이라면, 그가 직접 출연하는 경우는 영화의 톤을 좀 더 가볍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사건은 미아 패로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미아 패로는 82년에 <한 여름밤의 섹스코미디>를 시작으로 총 13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영화에서 우디 앨런의 이미지는 고정되어 있던 반면에 미아 패로는 영화에서 유연하게 스펙트럼이 넓었다. 그녀가 당시 했던 역할들은 아주 희극적이고 가벼운 캐릭터에서부터 음울한 캐릭터까지 다양했다. 80년대의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로맨스의 상황들은 70년대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예상 가능한 짝짓기’ 같은 것들이 여지없이 배반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한나와 그 자매들>같은 영화를 들 수 있다. <범죄와 비행>같은 경우는 굉장히 로맨틱한 상황이 범죄로 이어진다. 혹자는 이 영화를 우디 앨런식의 <위험한 정사>라고 말하기도 하다. 70년대의 낭만화되고 달콤쌉싸름했던 관계가 80년대에 오면 일종의 로맨스의 위기를 맞는다. 이 때 우디 앨런이 로맨스의 위기에 대한 탈출구로 삼는 것이 ‘창조적인 영역’이다. 작가로서 글을 쓴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의 인물들은 또 다른 출구를 찾는다. <또다른 여인>이나 <9월>에서도 그러한 면을 볼 수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우디 앨런의 창조적인 것에 대한 강박이 캐릭터에 투영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있다. 한편으로는 우디 앨런 특유의 세상에 대한 냉소가 존재한다. <매치 포인트>에서 처럼, 죄와 처벌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존재한다.

90년대는 우디 앨런의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흥행이나 비평적 평가는 저조한 편이다. 그에게 있어 이 시기는 불안한 리비도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가장 큰 사건으로 순이와의 결혼이 있다. 미국 사회에서 크게 윤리적으로 지탄을 받았었고, 우디 앨런의 영화 안에서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전까지 그는 현실에 대해 언급한다기 보다는 영화의 판타지라는 자기가 만든 세계 안에서 질문을 던지고 바라보는 사람이었는데, 스캔들을 계기로 영화라는 세계에 갇혀있던 그가 현실과 만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그 일 뿐 아니더라도 함께 했던 제작사나 스탭들과 떠나 영화 제작이 고통스런 상황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 11편의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 시기 영화들은 세 가지 테마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남자들의 성적인 추구이다. <우디 앨런의 부부일기>, <해리 파괴하기>, <셀러브리티>같은 영화들이 이에 속한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라는 것인데, <해리 파괴하기>가 특히 흥미롭다. 그의 영화 중 가장 복잡한 형식의 영화로도 알려져 있다. 두 번째는 범죄의 세계 를 다룬 것이다. <브로드웨이를 향해 쏴라>, <스몰 타임 크룩스>, <맨하튼 미스테리>같은 영화들이 있다. 세 번째는 영화 안에서 내레이터의 실험을 하는 영화이다. <마이티 아프로디테>의 코러스, <에브리원 세스 아이 러브 유>의 음악, <스윗 앤 로다운>의 인터뷰같은 형식들이 그 예이다.



영화감독들 중에는 끊임없이 비전을 변화시키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우디 앨런의 경우는, 자신의 영화들의 테마들을 조금 씩 변화시켜가면서 간다. <스몰 타임 크룩스>는 <돈을 갖고 튀어라>를 <헐리우드 엔딩>은 <브로드웨이를 향해 쏴라>를, <애니씽 엘스>는 <맨하튼>과 <애니홀>을, <매치포인트>는 <범죄와 비행>에서 사용되었던 모티브가 반복되어 사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2000년 이후의 영화들의 특징은 뉴욕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공간의 지배에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이다. 우디 앨런은 영국에서 찍은 세 편의 영화는 단순히 배경뿐 아니라 영화 안에 영국적 느낌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제 생각에는 2000년 이후의 영화들은 아주 새로운 영화를 보이기보다는 이전의 영화들을 새로운 공간 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수십년 간 해왔던 글쓰기의 내공이, 관객들이 영화를 즐기는 데에 있어 아무리 익숙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충분히 즐겁게 볼 수 있게 만들지 않나 싶다. (정리: 장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