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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모스필름 90주년 특별전

인간의 영적인 삶에 대한 탐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인간의 영적인 삶에 대한 탐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삶을 반영으로, 삶을 꿈으로 포착하는 새로운 언어를 발명한 사람이다. 

- 잉마르 베르히만




칼 드레이어, 오슨 웰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로베르 브레송이 영화 리얼리즘의 신세계를 창조하며 영화를 정신적인 삶의 문턱으로 인도하던 1950년대에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등장했다. 이제 막 알랭 레네가 <히로시마 내 사랑>으로 시간을 정복하고 있었다. 타르코프스키는 레네와 더불어 영화가 잃어버린 시간을 탐색하는 훌륭한 매체임을 입증했고, 시간의 문을 넘어 영화를 ‘시의 세계’로 안내하려 했다.


1932년 4월 4일 러시아에서 태어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모스크바에서 지냈다. 하지만 볼가 근처의 자브라이예와 유리에프의 시골에서 보낸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이는 영화에서 이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러시아의 자연 풍경으로 등장한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시인이었고, 그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부재는 그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고 일관되게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제가 됐다. 그의 어머니는 문학, 예술,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어린 그에게 많은 예술적인 자극을 심어 주었다. 어린 시절 그는 바흐의 음악,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회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흥미를 느꼈다. 이런 유년기의 체험은 영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타르코프스키는 1954년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국립영화학교(VGIK)에 입학했고, 미하일 롬의 지도를 받았다. 7년 후 타르코프스키는 졸업 작품인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을 만들었고, 이어 극영화 데뷔작인 <이반의 어린 시절>로 세계적인 주목을 얻었다.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은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세계를 이미 선보이는 영화였다. 아스팔트를 깔고 있는 노동자에게 아이가 순진하게 열심히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거기에는 노동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 혹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거리의 삶과 예술을 연결하면서 예술의 진지함과 책임을 근본적으로 사유한다. 여기에는 또한 그의 일생의 테마, 즉 ‘유년기의 테마’가 있다. <이반의 어린 시절>과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은 아이의 시선을 빌어 그의 독특한 스타일과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지향을 분명히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 유행하던 아동영화와 전쟁영화의 외관을 빌리고는 있지만, 이 두 작품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시적인 영화’라는 독특한 스타일적인 실험을 이뤄내려 했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1962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또한 그가 겪게 될 수난의 전조를 보여주는 작품이 됐다. 당시 이 영화는 이탈리아 공산당으로부터 ‘프티 부르주아적인 영화’로 비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도 이 영화가 전통적인 영웅과는 거리가 먼 ‘새로운 영웅’의 이미지를 보여준다며 격심한 찬반양론에 휘말리기도 했다. 당시 장 폴 사르트르는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사회주의적인 초현실주의'라 변호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적 지향은 다음 작품인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가장 완성도 있게 표현된다. 그는 이 영화와 다음 작품인 <거울>에서 영화가 회상과 기억, 감각을 재구성하는 시적인 매체임을 보여준다. 그는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시인으로 예술작업을 시도했다.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합리적으로 주제를 말하기 전에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파고 들어가 상상적인 세계를 재구성하면서 비가시적인 것을 감각적인 경험의 세계로 끌어올린다. 그는 영화에 두 종류의 감독이 있다고 믿었다. 세계를 모방하는 작가와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감독, 즉 영화 시인이 있다. 그는 후자의 감독들로 로베르 브레송, 잉마르 베리만, 페데리코 펠리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알렉산드르 도브젠코, 구로사와 아키라, 루이스 부뉴엘, 미조구치 겐지 등을 꼽았다. 그가 시적인 영화라 부르는 작가들이다. 물론 그가 존경하는 작가들과의 차이를 중요하게 볼 필요가 있다. 가령, 타르코프스키는 베리만이 신을 말할 때, 그가 침묵하는 신, 부재의 신을 언급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한다. 그는 베리만이 종교의 문제보다 키에르케고르에 더 친밀한 감독이라 여겼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차라리 로베르 브레송과 더 닮았다. 평생 과작의 감독으로 남았다는 점이나, 은총과 영원성, 정신과 물질의 갈등, 신앙과 세계의 야만과의 갈등이라는 테마가 브레송과 타르코프스키가 공유하는 점이었다. 그런 점으로 브레송의 유작 <돈>과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희생>은 <어쩌면 악마가>와 <스토커>만큼이나 비교할 만한 작품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에서 ‘시간의 리얼리티’를 추구했다. 그는 영화가 시간이라는 개념을 움직이는 유일한 예술이라 봤다. 이는 영화가 단지 시간 속에서 전개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영화가 실제 시간의 본성을 담아내는 예술이라는 점에서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나중에 <봉인된 시간>이란 책에서 분명하게 담아냈다. 그는 ‘시간의 리얼리티’를 독특한 질료를 통해 표현한 작가였다.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자연적인 풍경, 동물 등은 그의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들이다. 이런 대상들은 종종 상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는 비, 물, 불, 눈, 이슬, 바람, 나무 등과 같은 자연적인 이미지와 새, 말, 개 등과 같은 동물의 이미지를 빌어 특정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 영화에서 그의 유일한 스승은 알렉산드르 도브젠코라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영화에서 물의 이미지는 그의 전 영화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반의 어린 시절>과 <거울>에서의 늪지대, <스토커>에서의 물웅덩이,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의 강, <솔라리스>의 연못, <향수>에서의 물로 가득한 도메니코의 집이나 성당 내부 등에서 물이 다양한 형상으로 등장한다. 또한 <희생>에서 나무는 ‘신념의 상징’처럼 보이고, <솔라리스>와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말은 ‘삶의 상징’과도 같다. 이런 자연의 이미지는 종교적이고 신화적이며 문화적인 상징처럼 보이는데, 타르코프스키는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겨냥한 것은 아니라 말한다. 그는 자연의 요소가 인간이 거주하는 물질적 세계를 구성하는 원질료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래서 물질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자연의 요소들은 그가 추구한 기억, 회상, 시간의 원초적인 이미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반의 어린 시절>의 늪지대, <스토커>의 물웅덩이, <향수>의 온천장은 강렬한 물질성, 즉 시간이 기원하는 거대한 근원처럼 보인다. 여기로부터 인간 실존의 정신적인 차원이 유래한다.



종종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질료는 상징으로 표현되곤 하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이러한 이미지가 결코 상징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영상이 시적 매개나 묘사를 통해 세계에 관한 정서를 표출할 때, 이는 상징이라기보다는 은유에 가깝다고 봤다. 상징은 그 내부에 분명한 의미, 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에 반해 은유는 하나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것이 표상하는 세계와 특징을 보관, 유지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상징이 그것을 구성한 공식에 따라 설명되고 분석될 수 있다면, 은유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자기 완결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그것은 종종 설명되거나 의미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할지라도 진실을 담을 수 있다. <거울>에서 소년의 머리에 멈춘 작은 새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그 영상이 ‘진실의 영상으로 추출된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것이 하나의 상징이라면 그것은 지성에 의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성적인 방식으로 독해 가능한 상징을 거부하는 입장을 내비친다. 예술적인 이미지는 독해 가능하거나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봤다. 예술적인 이미지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등가의 것으로,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의의를 가질 뿐이다. 그는 심지어 예술가가 숨겨진 의미를 영상에 담아내는 것이 부적절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려고 노력하면서 영화를 만든 것은 이상한 일’이라 일축한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의미한다기보다 마치 일상의 단편처럼, 일생의 단 하루에 벌어진 사건처럼 곧바로 이해될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이다. 그 결과로 타르코프스키는 종종 난해하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킨 <스토커>보다 인간의 생애 하루가 더 신비한 것이라 말한다.


그는 그런 점으로 자연의 신비로움을 영화에 담아냈다. 자연의 이미지와 동물의 이미지는 불확정적이고, 예견 불가능하며, 설명 불가능한 것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과는 다른 계열로 인간은 거기서 걱정과 근심을 느낀다. 자연은 인간 세계를 침입하고, 잠식하며, 덮어버린다. 이를테면 <거울>에서 집 안에 내리는 비, <향수>의 교회 안의 눈, <스토커>의 물, <이반의 어린 시절>의 전쟁터가 그렇다. 그런 출몰과 침범은 인간의 삶이 더 이상 꿈과 대립되는 사실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 없고, 다면체적인 비결정성의 견지에서만 삶을 논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타르코프스키는 이런 근거에서 진정한 자연의 소리에 주목했다. 그는 자연의 소리(이를테면 바람 소리), 음악 혹은 목소리가 대상에 견고하게 부착되어 있기보다는 부유하는 불분명한 느낌의 소리라고 생각한다. <거울>에서처럼 목소리는 그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신의 음성처럼 물질적인 세계에 고착된 것이 아니라 경험의 불가능한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향수>에서 고르차코프의 음성이나 온천장에서 들리는 웅성거리는 소리들은 동시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세계를 드러낸다. <거울>에서 영화는 말을 더듬거리는 소년의 음성으로 시작하고, 그것은 <희생>에서 최종적인 말로 이어진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에게 음성, 소리는 세계를 다시 탄생시키는 것이다. 진실이란 그런 감각과 분위기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후기의 작품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소리의 부유성으로 더 강렬한 언어를 개발했다. 그는 대상에 부속되거나 어떤 인식가능한 근원에서 자립한 소리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타르코프스키는 『봉인된 시간』이란 책에서 영화적으로 변형된 세계와 음악적으로 변형된 세계가 서로 대립적이며 평행선을 긋는 세계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소리를 지닌 세계는 어떤 경우에도 상상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영화는 하나의 장면 안에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주의적인 수법은 자연의 소리 가운데에서 오직 하나의 소리만을 끄집어내면서 그 밖의 다른 부차적인 소리들, 즉 우리들이 실제 생활에서 틀림없이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을 모두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그래서 사실상 자연의 소리가 불협화음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는 진정한 자연의 소리, 불분명한 느낌의 소리에 주목한다. 그는 영화에서 소리가 음악이건 목소리이건 혹은 바람 소리이든 반드시 ‘부유의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한다. <희생>(1986)에서 단지 소리로만 표현된 3차 세계 대전이나, <향수>(1983)에서 온천장 주변을 떠도는 소리들, 고르차코프의 꿈 장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들은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혹은 신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소리의 원천과 분리된 소리는 더 이상 물질적인 세계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불가능한 공간과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미셀 시옹은 이런 소리들을 ‘어쿠스매틱한 존재’라 불렀다. 들리지만 보이지 않는, 그래서 신비로운 힘을 끌어내는 영화의 특정한 소리들, 음성들을 말한다. 탈육화된 소리(음성)는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의 힘은 특정한 한계에 머물지 않는다.


타르코프스키는 예술의 자유를 위해 힘겨운 싸움을 진행했고 그 때문에 곤경을 겪어야만 했다. 그는 1983년 <향수>가 유럽에서 성공리에 개봉된 후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다음 작품인 <희생>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서방세계에서의 그의 활동에 불만을 갖고 있던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귀환 명령을 받았다. 오랜 고심 끝에 그는 1984년 7월 이탈리아로 정치적인 망명을 선언했다. 타르코프스키는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이탈리아, 프랑스, 폴란드, 스웨덴, 영국 등을 여행하며 강의와 영화 작업에 몰두했고, 그 결과 이탈리아에서 <향수>를 만들 수 있었다. 고국에 있는 아들과 부인 때문에 망설였지만 그는 예술의 자유를 선택했고, 그 선택 때문에 심각한 향수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향수>와 마찬가지로 <희생>(1986)에서 그가 어린 시절, 순수성, 오염되지 않은 자연, 사랑스러운 가족, 고향 등과 같은 잃어버린 곳으로의 ‘회귀’를 절절히 염원했던 것도 그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스웨덴에서 촬영한 이 영화가 러시아 영화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를 러시아에서 무고하게 고통 받고 있는 아들 안드류슈카에게 헌사했다. 1985년 말, 타르코프스키는 암 선고를 받았고, 그가 겪은 시련 덕분에 1986년 1월 가족과 재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가족과 재회한 후 병마와 싸우며 타르코프스키는 『햄릿』을 영화화하려 했지만 1986년 12월 타르코프스키는 파리에서 54세를 일기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복권은 상당히 뒤늦게 이루어졌다. 1990년 4월 그가 사망한 지 4년 뒤에 타르코프스키는 러시아로부터 영화 예술의 발전에 공헌한 대가로 레닌상을 수상했다.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덕분이었지만 너무 뒤늦은 선택이었다.



타르코프스키는 오늘날의 세계가 오로지 물질적인 면에서 진보를 이뤄내면서 결국 그 진보가 영적인 모든 흔적을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리얼리티가 사물의 감각 가능하고 물질적인 질서라 본다면, 거기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직접적인 효과, 즉 손으로 닿을 수 있는 사물밖에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회적이든, 정치적이든 혹은 기술적인 면이든 개인의 경험에 주어진 것만을 보게 된다면 그 결과는 무서운 일이 될 것이라 여겼다. 인간이 영적인 발전의 여지를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우주가 오그라들고 조화가 파괴된다면 이미 사람에게는 살아나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희생>을 만들었다. 삶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시킬 유일한 수단이 인간의 영적인 본질을 재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삶, 영적인 삶에 위기가 발생하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 2009년 “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에 맞춰 카탈로그에 실었던 글을 재수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