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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프랑수아 트뤼포 전작 회고전

[오픈토크] "한국에서 영화감독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지난 6월 24일, <아메리카의 밤> 상영 후 지난 달에 이어 두 번째 “오픈 토크”행사가 마련되었다. 영화에 대한 공감,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감독으로서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작업을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영화의 힘에 이르기까지, 네 감독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일부 옮긴다.

 

 

변영주(영화감독): 오늘은 김종관 감독, 이혁상 감독을 모시고,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오늘 영화를 보면서 가장 와 닿았던 장면은 어떤 장면이었나?

김종관(영화감독): 공감도 있지만, 어쨌든 트뤼포 감독님은 저랑 사정이 많이 다르다보니 동경의 대목도 있다. 대부분은 영화를 찍는 시간이 아니라 영화를 찍기 위해서 기다리는 시간에 대한 고민이 많고, 영화를 찍을 때는 항상 찍는 순간의 즐거움이 있다. 영화에서 감독이 배우를 달래면서 하는 말이 있다. “영화는 야간 기차 같다. 네가 살아서 숨 쉴 수 있는 장소는 여기니까 도망치지 말고 여기서 어떻게든 해봐라”는 말이 와 닿았다. 영화를 찍어야한다는 강박에도 공감이 간다.

이혁상(영화감독): 계속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작업해왔기 때문에, 극영화 현장 분위기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극영화감독들은 참 난잡하다는 느낌이었다.(웃음) 영화판에 여러 가지 일들이 많지만, 그중에도 서로 정분나는 일들이 참 많다.

이해영(영화감독): 영화를 만들 때 감독들의 악몽과 무의식, 현실적인 부분 같은 것들이 잘 표현된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트뤼포니까, 프랑스에서 인정받으며 좋은 시스템에서 영화를 찍던 감독이니까, 사실은 영화 속의 고민이나 갈등이 굉장히 우아하다. 여기에 냄새로 따진다면 땀 냄새, 토한 냄새, 발 냄새 같은 걸 섞어 놓으면 충무로랑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웃음)

 

변영주: 재밌게도 하필 오늘 이 영화를 보는 동안 트윗으로 메시지가 왔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고등학생인데, 영화감독이 되려면 19살에는 영화의 어떤 걸 공부해야 하냐고 질문을 보내왔다. 그래서 “19살에는 영화를 공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라고 답했다.(웃음) 오늘 이 자리에도 어쩌면 앞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분들도 계실 것 같다. 김종관 감독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김종관: 어렸을 때 영화를 보고나면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면서 공상하곤 했다. <그렘린>을 보면 <그렘린2>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혼자 만들 거보고, <슈퍼맨>의 속편을 만들어본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이해영: 그렇게 블록버스터를 상상하고서 인디영화를 만드셨다.(웃음)

김종관: 영화를 재밌게 보는 것에서 어느 순간 영화를 만들기에 대한 욕구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것 같다. 20대 초반에 필름 워크샵을 한번 했었다. 한 달 동안 워크샵에 참여하면서 어깨너머로 영화를 배웠다. 그 때 재밌게 했던 기억에서 어떻게 넘어오게 되면서, 20대 후반부터는 나의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이해영: 영화과에 비교적 늦게 들어간 편이다.

김종관: 그 전에는 장사도 하고 이것저것 다른 일을 했었다. 그런 일들이 다 잘 안되고, 뭔가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었다.

 

변영주: 이혁상 감독은 ‘연분홍치마’라는 다큐멘터리 만드는 독립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연분홍치마’의 첫 작품인 <마마상> 때부터 함께 했었나?

이혁상: 그렇다. 사실 애초에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니었다. 다들 제작을 전공한 것도 아니었고, 이론과에서 비평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세미나 팀을 시작하면서 여성주의와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세미나를 진행했는데, 세미나만 하다보니까 뭔가 실천적인 것도 해봐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연분홍치마’를 만들게 되었다. 처음엔 카메라를 든다는 것 자체를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현장에서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실태보고서 나 자료집 같은 걸 만들게 되는데, 이걸 꼭 글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카메라로 다큐멘터리를 찍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처음 만든 작품이 <마마상>이었다.

 

변영주: 이해영 감독은 배우랑 결혼하고 싶어서 영화감독이 됐다는 게 사실인가.(웃음)

이해영: 특별하게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막연하게 나에게 있는 잡다한 재능들을 모아보면 그나마 영화판에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감독이 돼서 유명해지면 좋은 여배우와 결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웃음) 변영주 감독은 ‘연분홍치마’와 비슷하게 다큐멘터리의 길을 걷다가 갑자기 극영화로 전환하셨는데..

변영주: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처음에는 ‘장산곶매’에 들어가서 일을 하다가 현재 영상원의 김소영 교수님과 함께 사무직 여성노동자에 관한 중편극영화의 시나리오와 촬영을 했었다. 그러니까 다큐로 시작을 했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나서, 김동원 감독을 만나 다큐멘터리를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만든 첫 작품이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었다. 그 영화를 만들고 나서야 갑자기 감독이 되고 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이해영: 김종관 감독도 말했지만 사실 영화를 찍는 시간보다는 기다리거나 준비하는 시간이 훨씬 더 길다. 스스로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의식이 별로 없다가, <천하장사 마돈나>가 개봉하고나서 극장의 마지막 상영 때 혼자 영화를 보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더라. 그때부터 ‘나는 감독이다’ , ‘감독이니까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채근한다.

김종관: 처음에 영화를 시작했을 때는 영화가 굉장히 중요했다.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서 시작했기 때문에 스스로 배수진을 치고 뭔가 결과물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영화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은 별로 없었다.

 

 

이해영: 이혁상 감독은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고민도 있을 것 같다.

이혁상: 고민을 하고 있는데, 당장은 <두개의 문> 때문에 워낙 정신이 없는 상황이다. 한 번 더 게이 영화를 더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큐멘터리로 한 편 정도 더 작업하고, 다큐멘터리 뿐 아닌 다른 길도 모색해보려고 한다.

변영주: 영화촬영을 하면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이 있나? <아메리카의 밤>에서처럼, 스크립터와 배우가 사랑에 빠져서 감독은 안중에 없게 된다면, 감독 입장에서는 정말 끔찍할 것 같다.

김종관: 영화촬영 현장에선 연애가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웃음) 적은 예산의 영화를 해오다보니까 항상 무슨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처음의 계획대로 촬영이 진행되는 게 아니라 항상 무언가로 떼우게 되고, 그러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허덕허덕 하는 게 제일 스트레스다.

이혁상: 다큐멘터리는 일단 주인공들과의 거리 설정이 중요하다. 특히 <종로의 기적>은 스스로도 또 한 명의 주인공으로서 등장하기 때문에, 다른 주인공들과의 거리 관계가 힘들었다. 촬영 중간에는 주인공 중의 한 명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정말 힘들었다. 2~3개월 동안 방에 틀어박혀서 악몽을 꾸고 아무것도 못할 정도였다.

이해영: 뒤늦게 고백하자면 예전에 감독을 해보니까 어떠냐는 질문에, 너무 귀찮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때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다.(웃음) 감독에게 계속 모든 것을 물어오고, 감독은 계속해서 일일이 선택해야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공감했던 것이 악몽장면인데, 촬영을 하면서 실제로 악몽을 정말 많이 꾼다.

변영주: 영화현장에서는 정말 사사로운 것까지 감독에게 물어본다. 감독은 모든 걸 대답을 하면서 가야한다. 그 때 감독이 잘 대답을 못하게 되면 스탭과 감독 사이의 신뢰에 균열이 가게 된다. 언제가 선배감독으로부터 배운 요령은, 감독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럼 너는 어떤 게 더 좋은데?’ 되물어보면 된다.(웃음)

 

관객1: <아메리카의 밤>에서 배우들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고, 감독은 악몽 속에서 힘들어 할 때, 스탭들은 묵묵히 작업을 하고 있던 장면이 인상 깊었다. 영화감독이라면 아마도 ‘영화라는 게 대체 뭐길래’라는 물음을 힘들 때마다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이해영: 그 질문은 때로는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수많은 스탭들이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 ‘영화가 뭐길래 이들은 청춘을 다 바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찰나적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가 뭐길래 이렇게 터무니없는 낙관을 하게 만들고, 이렇게 나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치유와 상처가 그 안에 다 있는 것 같다. 영화의 대사 중에 영화가 삶보다 훨씬 조화롭다는 말, 우리는 영화를 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핵심인 것 같다.

 

관객2: 감독님들께서 힘들 때 마다 꼭 찾게 되는 자신만의 영화 목록이 궁금하다.

김종관: 시기마다 좀 바뀌기는 한다. 지금은 예전처럼 반복해서 보는 영화는 없는데 가끔씩 보게 되는 건 영화에서도 나왔던, 장 비고의 <라탈랑트>이다. 관객으로서 깊은 교감을 느끼게 되는 영화다.

이혁상: 새벽에 <섹스 앤 더 시티> 시리즈를 보면서 최면에 걸리듯 잠이 든다.(웃음)

변영주: <스타워즈> 시리즈와 <아라비아 로렌스>, 50~60년대 할리우드에서 대작 붐이 일어났던 시기의 대작 영화들을 찾는다.

관객3: 어떤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될 때 갖는 기준이 궁금하다

이해영: 그런 생각이 들기 까지는 123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는 거 같다. (웃음) 하지만 결국 이야기의 재미라는 점이 크다.

이혁상: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와서 그런지, 사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시간과 역사를 내가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종로의 기적>도 그런 출발에서 시작했었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더라도, 픽션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역사를 기록하고, 시간을 기록하는 기분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

김종관: 앞의 두 얘기와 다 연결된다. 처음에 단서처럼 오는 건 기록인 거 같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나 계절, 그때의 감정을 편지를 쓰는 느낌으로 담아낸다. 모든 단서들은 차근차근 오는 것 같다.

변영주: 어떤 이야기를 접했을 때 혼잣말처럼 메인플롯을 만들어본다. 만들어보는 순간 어떤 메인플롯이 재밌다, 그리고 그 플롯 안에서 이런 장면을 만들어 볼 수 있겠다, 이런 장면이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 최용혁(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