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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오시마 나기사의 레퀴엠에 관하여

[영화사 강좌1] 일본영화계에 대한 단념, 극한의 데카당스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거장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영화사 강좌를 마련했다. 지난 14일 저녁 오시마의 가장 최근작인 <고하토> 상영 후에는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영화평론가 김영진 교수가 ‘오시마 나기사의 레퀴엠에 관하여’란 주제로 열띤 강연을 펼쳤다.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영진(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오늘 강연은 먼저 <고하토>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이야기하고, 오시마 나기사 영화의 전체적인 경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영화는 2000년에 칸영화제에 출품이 됐었는데 원래는 1995,6년에 제작하려고 했으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뇌출혈로 쓰러져서 반신마비가 되는 바람에 몇 년간 연기가 됐던 프로젝트다. 감독은 이 영화를 1999년에 완성했고, 2000년 칸에서 소개될 당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영화제를 방문했었는데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의존해 움직이던 모습을 봤던 기억이 난다. 히지카타 토시로를 연기한 비트 다케시는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 이후 두 번째로 오시마 나기사 감독과 작업한 거다. 비트 다케시와 최양일(콘도 이사미)을 캐스팅한 까닭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영화촬영 중 문제가 생겼을 때 대신 작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영화의 각본은 한국에도 번역이 되어 나와 있는 시바 료타로의 <신센구미 혈풍록>을 토대로 했다. 사무라이들에 얽힌 많은 에피소드들 중에서 미소년 검객(카노 소자부로, 마츠다 류헤이 분)의 에피소드와 이노우에 겐자부로라는 나이든 사무라이 에피소드 두 개를 결합하여 영화를 만들었다. 원래는 이노우에와 함께 대결하러 가는 무사가 미소년이 아닌데 영화에서는 설정을 바꿨다. 이노우에는 콘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로에게 검술을 가르쳐줬던 사람인데, 이들은 이십대에 일가를 이루었지만, 이노우에는 그 후로 검술실력이 늘지 않은 채로 사십대가 되었다. 제일 어린 오키타 소지는 천재 검객이었다고 한다. 신센구미에 관한 얘기는 일본에선 굉장히 유명해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신센구미는 막부 말기에 존왕양위를 외치면서 교토에서 천왕을 위해서 일종의 치안조직처럼 활동을 한 보수적인 집단이다. 막부조직이 원활하게 가동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신 치안을 담당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좋아했고, 그 시기 사람들의 3분의 1정도가 길거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사회가 혼탁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예법이 발달한 이유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센구미는 정통 사무라이 집단이 아니다. 모집을 한 것이기 때문에 계통도 족보도 없었고 하급조직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만 공유되는 비밀인데, 이들은 신센구미 2세대이다. 원래 조장이 따로 있었는데 콘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로, 오키다 소지, 이노우에 겐자부로가 작당을 해서 조장을 죽였다. 영화의 스토리는 어떤 거대한 시스템이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시마 나기사는 왜 이 영화를 찍었는지, 신센구미 스토리의 어떤 점에 매혹되었는지가 궁금해진다. 물론 마지막에 히지카타가 벚꽃을 베는 장면에선 우리가 일본영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고, 그 점이 매혹적이기는 하다. 이 영화는 굉장히 데카당스하다. 남자 하나를 두고 남자들끼리 이렇게 질투하는 것을 처음 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감염되어 가는데, 히지카타가 벚꼿을 베는 것도 일종의 단념을 위한 행위가 아닌가 생각된다. 조직에 대한 단념이기도 하고. 영화에서 미소년 검객은 기성세대의 사무라이에 비해서 굉장히 특이한 캐릭터이다. 신센구미에 입대한 목적이 없다. 단지 사람을 베어보고 싶어서 입대했다고 말한다. 콘도세대처럼 자기 나름의 명분이나 출세욕 같은 게 없다. 굉장히 유희적인 세대의 젊은이가 들어온 것인데, 이 점은 세대론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00년 부산영화제에서 요모다 이누히코라는 일본의 학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이 점에 대해 “오시마 나기사가 이 영화를 만든 것은 일본사회 자체에 대한 단념이자 현재 일본영화계에 대한 단념”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오시마 나기사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일본영화의 적자는 다케시와 최양일이다. 조금 더 간다면 기요시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다케시나 최양일과 대비되는 미소년 검객은 오시마 나기사가 혀를 차는 이와이 순지 세대라고 볼 수 있다. 한 세대가 저물어서 새로운 세대가 올라오고 있는데, 그 상황에 대한 단념이라는 거다. 이런 과정을 이 영화는 굉장히 데카당스하게 보여준다. 60년대부터 오시마 나기사는 굉장히 전투적으로 영화를 찍었다. 일본사회에서 그만한 파워풀한 존재감을 지닌 감독은 없었던 것 같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을 하다가 그의 영화에 반발을 하고 나온 사람이다. 일본식 도제시스템에서는 그럴 경우는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는데, 오시마 나기사나 이마무라 쇼헤이 같은 거물들은 그들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다. 자주영화 시스템을 통해 실험적이고 힘겹게 영화를 찍었다. 영화의 화두도 시스템 내의 성과 폭력에 관한 것이었다. <백주의 살인마>를 보면 살인마를 파괴된 공동체, 실패한 역사로부터 나온 괴물처럼 묘사하고 있다. 오시마 나기사는 60년대에 사회적 균열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부분을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70년대 들어서면서 힘을 잃어버린다. 전공투의 실패 이후로 더 이상 출구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감각의 제국>을 만들 때까지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감각의 제국>의 소재인 아베 사다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한 실화인데, 실제로 로망포르노로도 만들어졌고 이와 비슷한 소재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감각의 제국>은 단념의 극단을 보여주는 영화인 것 같다. 폐쇄된 골방에서 자극적인 섹스를 하던 남녀가 퇴행해 가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게다가 성기를 절단까지 한다. 당시 오시마 나기사는 서구에서 일본의 장 뤽 고다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그런 감독이 포르노그라피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굉장한 스캔들이 되었다.

다음에 만들어진 <열정의 제국>은 개인적으로는 대형스크린으로 처음 본 일본영화였다. 당시 프랑스문화원의 특별상영회에서 영화를 봤는데 시각적, 청각적으로 굉장한 자극을 받았고, 내용도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 때부터 오시마 나기사 감독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당시에는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볼 수는 없었다. 오시마 나기사와 친분이 있었고 60년대부터 계속 주목할 만한 평론을 썼던 사토 타다오라는 일본의 원로 평론가가 김성욱 프로그래머와 대담한 것을 보면 후기작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아마도 성과 폭력이라는 틀로 일본사회에 반기를 들었던 그가 점점 자기파괴적인 쪽으로 끌리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오시마 나기사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에 대해서는 매일 먹고도 질리지 않는 일본식 두부를 잘 만드는 감독이라고 말했고,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식으로 잘 로컬화시킨 스테이크를 만든 감독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독주에 가까운 일본식 사케를 만든 게 아니었을까라는 말을 했다. 그런 점에서 “영화라는 것은 사회에 독을 조금씩 흘려넣는 일이다”라고 얘기했던 스즈키 세이준과 비슷한 태도를 지닌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 실험과 주제적 실험을 병행하면서 좌충우돌한 감독이다. 60년대 모든 시도를 다 해 보고, 70년대 들어와서는 침묵했다가 그 후에는 극한의 데카당스와 자기파괴적인 충동에 자석처럼 끌려가듯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보이는 말년의 루키노 비스콘티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소멸해가는 육체와 그 반대편에서 커져가는 관능성, 생명에 대한 열정이나 탐닉을 데카당스하게 그린다. 퇴폐미를 통해 파괴의 극점에 도달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밟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된다. 지금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투병중인데, <고하토>라는 영화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보여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60년대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찍혀져 있고 영화 중간에 코믹한 요소들도 많이 있다.

신센구미가 몰락하기 전에 이미 시스템 내에 몰락의 징조가 있었고, 히지카타는 마지막에 그것을 예감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비트 다케시가 무표정하게 얘기하면서 검을 휘두르는 장면이 좋았다. 너무 많이 본 세팅이나 스토리라면서 칸에서의 비평적 평판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요모다 이누히코라는 일본평론가의 해석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검을 든 사무라이로 일본영화계에서 거의 단독자로 살아온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말년이 되어 단념을 영화적으로 매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한계를 넘을 만큼 넘어 본 감독이 <감각의 제국>을 통해서는 실제 정사를 표현했고, 이러한 불가능한 지점들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하고 나서는 추동력을 상실해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오시마 나기사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와 더불어서 정말 대단했던 것 같다. 오시마 나시사의 전성기 영화들과 후기작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니 남은 기간 동안 즐겁게 관람하셨으면 좋겠다. (정리: 김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