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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영진위는 시네마테크를 공모할 권리가 없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독립영화전용관과 영상미디어센터에 이어 기어이 시네마테크전용관 공모제를 시행할 모양이다. 이미 지난 1년간 유보시킨 사안이라 그 의도에 대해 중언부언할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몇 가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먼저 ‘영진위는 시네마테크를 공모할 권리가 있는가?’ 라는 문제이다.

주지하다시피 공모란 특정사업의 주체되는 자가 그 분야의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운영자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방점은, ‘주체’에 찍힌다. 주인 말이다. 시네마테크공모제의 논란 역시 주인 아닌 자가 주인행세를 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드는 의문, 즉 어찌하여 영진위는 자신들이 시네마테크의 주인인줄로 착각하게 되었을까. 혹은 얼마나 시네마테크가 탐났으면, 아이를 바라는 여인의 상상임신만큼이나 허망한 공모제를 구상했을까. 이것이야말로 젖 몇 번 물려줬다고 제 자식이라고 우겨대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가 순수민간에서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당초 영진위가 ‘지정위탁’ 형식을 빌려 지원해온 것은 이런 까닭이다. 하물며 성과와 이윤에 목 맨 기업도 발행주식의 51%를 보유해야 과점주주가 되는 법이거늘, 일 년 예산의 불과 30%를 지원하면서 주인행세하려는 작태와 몰염치는 어디서 발로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묻는다. 시네마테크의 주인은 누구인가? 도대체 누가 영진위에게 시네마테크 공모할 권리를 주었단 말인가.

시네마테크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저 필름으로 고전걸작을 상영하기만 하면 시네마테크라는 명칭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곳은 영화의 역사가 배어있는 공간인 동시에, 켜켜이 쌓인 시네필 저마다의 추억과 고유의 공기와 풍경이 스며들어 마침내 만들어진 공간이다. 단지 건물과 스크린과 영사기와 찌그러진 필름 캔으로 이루어진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현재의 공모제는 ‘시네마테크 부산’처럼 부산시가 제대로 된 안정적인 전용관을 조성하고 연간 프로그램 운영비를 지원하면서 지정위탁을 하는 것보다도 한심한 수준이다. 결국 문제는, 영진위가 (서울아트시네마가 이룩한 지난 8년간의 무형적 콘텐츠와 가치를 전혀 무시한 채), 시네마테크를 단지 임대료나 대주는 공간 정도로 인식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권리 없는 자, 주인 아닌 자가 시행하려는 공모제를 그냥 받아들여야 하나? 나는 절대로 그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영진위가 이유도 명분도 없이 내세우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공모제’는 반드시 저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시네필의 적극적 행동이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시네마테크는 ‘영화의 집’이다. 당신이 집에 들어가는 것은 단지 밥을 먹고 잠을 자기 위함이 아니듯이, 우리가 시네마테크를 찾는 것 또한 영화만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지난 시간동안 이룩한 사업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영화의 상영과 연구와 발견이라는 삼박자가 유기적으로 행해졌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 정도는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시네필이나 백발성성한 노년 관객도 아는 얘기일진대, 영화학박사이면서 전직 영화학과 교수였던 조희문 씨는, 시네마테크를 물리적 공간, 임대료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공간, 철지난 필름이나 주구장창 틀어대며 그것들이 좋아서 모인 이상한 사람들의 집합소로 보고 있다. 이런 자가 수장으로 있는 영진위가 언감생심 주인 행세하며 공모제를 시행하겠다는데, 자칭 시네필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관객의 힘을 모아 영진위의 공모제 강행을 저지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시네마테크의 존재는 영진위나 문광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서 존재성과 당위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의 정당성을 훼손당하고 위협받는 시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관객 모금운동은 그래서 적절하다. ‘시네마테크는 관객이 공모’ 하겠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현재는 위기상황임에 분명하다. 시네마테크 공모의 허위성과 부당함을 호소하는 소극적 대응을 넘어서는 그 무엇, 수세적 방어태세를 접고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전략을 펼치면서 독자 행보를 펼쳐야 할 때이다. 그러니 이제는 시네마테크 공모제에 따른 서울아트시네마의 존폐문제는 지레 걱정하지 말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시네필의 결집된 힘을 보여줄 수 있느냐에 따라서,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시네필의 힘을 무엇인지, 시네마테크의 진정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저들에게 똑똑히 보여줌으로써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진행 중인 관객모금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표면적이면서도 거창하고 실질적으로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선언문을 통해 상징화될 수 있다. 이를테면 ‘시네필의 권리선언’ 말이다. 따라서 나는 시네마테크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다음과 같은 ‘시네필 권리선언’을 당신에게 제안한다. 그리고 동참을 요청한다.


하나. 영진위는 시네마테크를 공모할 어떤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영진위가 공모제를 강행하려 한다면 영진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둘. 우리는 권리 없는 영진위가 시행해 어처구니없이 다른 시네마테크전용관 사업자를 선정한다면 그들을 인정하지 않겠다.
 셋. 우리는 영진위 임의로 선정 지원한 시네마테크전용관에는 가지 않겠다.
 넷. 우리는 영진위가 선정한 시네마테크전용관이 진행하는 어떤 행사도 참여하지 않겠다.
다섯. 우리들의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를 존속시키기 위한 후원에 기꺼이 동참하겠다.



거듭 말하지만 당신이 시네필이라면, 시네마테크를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영진위의 시네마테크전용관 공모를 송두리째 부정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식 축사를 통해 “이 자리에 모인 관객들과 영화인들이 참으로 신기하다”던 조희문 씨의 발언은 선전포고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비겁하고 더러운 발언의 기억조차 지워버리자. 어차피 그에게 영화는 산업이고 자동차 수천 대와 맞먹는 수출상품이며, 고전영화를 상영해줄 수 있는 곳이라면 시네마테크로 충분하다고 여길 정도이니 말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프랑코에 대한 복수는, 그의 시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 그의 관한 기억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권리 없는 영진위의 공모를 무시하고 결과를 불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네필의 시네마테크 지키기 운동은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제 61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 숀 펜은 기자회견장에서 “영화의 마음을 듣고자 한다. 영화의 마음을 보고자 한다. 우리는 영화의 진정한 가치와 다양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968년 5월, ‘영화가 돈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영화를 통해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외쳤던 고다르와 트뤼포의 선언을 40년 만에 되살려낸 것이다. 그러니까, 1968년 5월 18일 고다르와 트뤼포가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페퍼민트 프레페>가 상영되던 극장을 덮쳐 스크린을 끌어내리고 상영을 중단시킨, 전쟁을 제외하고는 사상초유의 영화제 보이콧이 이뤄진 그날의 사건 말이다. 그렇게 상영이 중단됐던 <페퍼민트 프레페>는 40년의 세월을 거슬러 2008년 칸에서 다시 선보이게 된다. 이처럼 영화의 역사는 반복되고 회귀되며 어떤 것은 유령처럼 우리 주위를 떠돌면서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우리들의 시네마테크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산업과 첨단기술의 범주 안에서 교환가치로써의 효용성에 집착하는 집단이 영화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한, 언제나 위태로운 ‘사냥꾼의 밤’을 맞이하겠지만, 그것들을 극복하는 매순간마다 더해지는 견고함과 무언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자.

훗날 영화의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2010년 2월의 시네마테크의 친구들과 관객을 기억할 것이고, 당신이 마음 졸이며 안타까워했던 불면의 밤과 극장 위 허공으로 날려 보낸 무수한 담배연기와 한숨을 기억할 것이다. 자그마한 모금함 앞에서 조아린 관객과 시네필의 간절한 소망을, 이 모든 것들의 원인을 제공한 영화진흥위원회의 무용성을. 그리하여 이 나라 영화진흥정책기관의 몰염치와 몰상식이 빚어낸 ‘시네마테크 공모’라는 초유의 폭거를 분명히 기록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권리 능력 없는 영진위의 결정에 노심초사하지 말자. 이 땅의 시네필과 영화인이 합심해 시네마테크를 지켜냈음을 자랑스러워할 날이 도래할 것이란 믿음을 변치 말자. 이것은 시네필인 당신이 거쳐야 할 통과의례이다. 그러니 이 땅의 시네필도 68년의 그들에 못지않다는 것을 보여주자. 남은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어찌할 것인가.


/ 백건영(네오이마주 편집장,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