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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Essay

[에디터 다이어리] 겨울이 끝나기 전, 밤을 지새우며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


에디터 다이어리

겨울이 끝나기 전,

밤을 지새우며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

 

 



겨울 방학을 맞이하여 친구들과 홍콩 여행을 다녀왔다. 홍콩으로 떠나기 전에는 홍콩의 시네마테크에 다녀와서 특집 기사를 써볼 야심찬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번 제8회 ‘친구들영화제’에 홍콩 영화가 상영되는 것도 아닌데 괜히 객기인 것 같아 포기. 여기 에디터 일지에 조금이나마 옮겨보려고 한다. 홍콩의 시네마테크,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는 야시장으로 유명한 야우마테이 거리에 있다. 초행길이라 지도,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극장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포스터가 극장 건물 외벽에 크게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건물 외벽을 따라 걸으며 상영 영화에 대한 시놉시스와 스틸사진들이 걸려있는 게시판에 잠시 눈을 돌렸다가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크진 않지만 조용하고, 아늑하며, 극장 특유의 어두운 조명이 여행자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는 세계적으로 홍콩의 시네마테크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지만 관객들에게 값을 받았고, 영화서적이 아카이빙되어 있어 관객이 열람할 수 있는 공간은 따로 없었다. 물론 '큐브릭'이라는 이름의 서점이 영화 전문 서적을 판매하고 있긴 했지만. '시네마테크'라는 공간을 정의함에 있어서 어떤 요소가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배동미 / 관객에디터)

 

 


처음에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할 때에는 무의식의 세계를 다룬 영화에 끌렸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꿈-영화의 유비 관계에 점차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겁쟁이는 무릎을 꿇는다>의 리뷰를 맡은 나는 가이 매딘의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엄청나게 당혹스러웠다. 하필 이런 영화라니! 영화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리뷰를 쓰는 데에는 다른 영화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김곡 감독의 시네토크를 듣고 나서는 꿈-영화의 비유가 아직까지도 유효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가이 매딘이 “표현주의나 소비에트 몽타주의 문법처럼 영화사에서 잊혔을 만한 우리 기억의 밑바닥에 있는 영화를 끌어다온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는 영화사(史)의 무의식인 것이다. (박민석 / 관객에디터)

 



친구들 영화제 기간에는 보통의 특별전이나 회고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집 기사들이 웹 블로그에 올라간다. 관객인터뷰는 매년 꾸준히 진행하는 특집 중 하나이다. 그런데 서울아트시네마의 관객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실제로 여러 번 퇴짜도 맞아봤다. 이제는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전에 거절당할까봐 살짝 두렵기까지 하다. 항간에 떠도는 속설, ‘아트시네마 관객들은 말도 없고 수줍음을 많이 탄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일까? (정확한 기억인지 확신은 할 수 없지만) 2010년 엘리아 카잔 특별전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워터프론트> 상영 후 강연에서 “여기 분들은 질문도 없고 정말 조용하시네요”라고 했던 게 떠오른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도 사실은 ‘조용하고 내성적인’ 관객이다. 하긴 갑작스런 인터뷰 요청에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결국은 우리가 준비를 철저히 해 가야 한다는 거, 그게 정답인 것 같다. (송은경 / 관객에디터)

 




<겁쟁이는 무릎을 꿇는다>를 봤다. 씨네토크 시간엔 김곡 감독님이 들뜬 모습으로 내내 신나게 이야기하셔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무언가에 대한 예찬을 자신의 남다른(?) 취향을 뽐내는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금세 따분해 지고 마는데,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의 이야기엔 그런 과시적인 면 대신 순수한 애정 고백의 느낌이 있어 즐겁다. 오랜 관심과 애정이 풀어내는 이야기들인 만큼 흥미롭고, 어느새 말하는 이의 열정에 나도 전염되어버린다. 때로 느끼게 되는 은밀한 동지애는 덤이다. (감독님, 저도 가이 매딘의 <세계의 심장>을 극장에서 보고 싶어요! 프로그래머님, 언젠가 ‘거대한 편두통의 영화’들만 모아 트는 특별전, 기대할게요. 그때 김곡 감독님 씨네 토크도 꼭 넣어주세요~^^) (장지혜 / 관객에디터)

 




- 2011년 2월 27일 로우 예의 <수쥬>: 친구들 영화제 마지막 날. 셋째 줄에서 봤더니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는데, 단지 내 컨디션의 문제일까 이 영화의 영향일까. 아무튼 주인공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절망적인 기분이었는데, 극장을 나서면서는 그렇지만 그들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고 싶다는 의지 같은 게 생겼다. 황홀한 경험.

 

- 2012년 2월 10일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 그들의 운명도 싫고, 그 습해 보이는 인도차이나의 공기도 싫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윤리(라고 해도 좋겠지?)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여자와 남자가 애처롭고, 그래서 아름답고, 그래서 뇌리에 남고. 겨울밤에 보기엔 조금 잔인한 영화인 게, 돌아오는 길이 이렇게 쓸쓸할 수가. 김태용 감독이 GV에서 했던 질문. "둘의 관계의 업보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이 질문을 생각했던 귀가길.

 

- 2013년 1월 31일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이사쿠의 아내>: 마지막 장면, 이제 아내는 쟁기를 들고 밭을 갈고 남편은 그 옆에 앉아있다. 어쩌면 눈 먼 남편은 오카네에게 낙인과도 같을 터. 그래서 세이사쿠가 오카네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나 보다, 오카네는 어떻게 그의 곁에서 그 낙인을 끌어안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아무튼 세이사쿠의 잊을 수 없는 대사- "말랐구나, 힘들었지."

 

1월 31일 <세이사쿠의 아내>를 관람하고 돌아 와 메모를 하던 중, 친구들 영화제에서 김태용 감독이 추천해왔던 <수쥬>, <부운>을 떠올리다. 지금은 주인공들의 비극성, 처연함과 같은 정서들만이 남아있는 영화들. 세 편의 영화를 관통하는 그 감정들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2년 전, 1년 전의 메모들을 찾았다.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 열어 본 반가운 글들. 겨울이 끝나기 전 밤을 지새우며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이다. (김경민 / 관객에디터)

 




친구들 영화제가 시작한 다음날 나는 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대략 2주 정도 태국에 머무면서 방콕에 있는 에프에이 시네마테크(Film Archive Cinematheque)에 잠시 들러 서울에 있는 시네마테크에서 왔다고 하면서 친구들 영화제 리플렛을 줬다.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타이 필름 아카이브 관장과 잠시 전화 통화를 했는데 짧은 영어 실력 때문에(!) 길게 대화를 나눌 순 없었다. 어쨌든 여행 내내 읽을 수도 없는 태국 시네마테크의 리플렛을 펼쳤다 덮었다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한국이었고 나는 친구들 영화제 리플렛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던 <신밧드>를 극장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최혁규 / 관객에디터)

 




<겁쟁이는 무릎을 꿇는다> 관람. 맨 앞줄에서 관람하니 8mm 필름의 거친 입자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무엇보다 내가 이 영화에 매료되었던 점은 과다 노출을 받은 희뿌연 피사체들과 디제이의 손에 놀아나는 판과 같은 정신 나간 리듬감이다. 내러티브가 여타 실험영화들에 비해 비교적 명확해서인지, 시네토크 중 김곡 감독은 “가이 매딘 영화 중에 재미없는 편에 속한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가이 매딘 월드’에 입문하는 데는 좋은 영화인 것 같다. 무엇보다 자기의 정액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구조라니, 얼마나 흥미로운가. 또 이 영화에서는 유난히 손의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그 중 최고는 아기의 우둥퉁한 손가락인 것 같다. 귀여운 줄로만 알았던 아기의 손가락이 거친 입자형태로 스크린을 꽉 메우노라면 이상하게 징그럽고 묘한 기분이 든다. 그 질감과 부피…. 그나저나 가이 매딘이 케네스 앵거에게 바치는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던데 매우 기대가 된다. 이 글을 마치고 케네스 앵거의 <불꽃놀이>와 김곡 감독이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강력하게 추천한 가이 매딘의 <세계의 심장>을 보면서 감각의 확장 운동을 좀 하고 자야겠다. (지유진 /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