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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어떻게 국가에 맞서 싸울 수 있었는지 풀어보고 싶었다

[작가를 만나다] 김태일 감독의 '오월애'


지난 6월 25일 ‘작가를 만나다’ 프로그램으로 다큐멘터리 <오월애>가 상영된 후, 영화를 만든 김태일 감독과 다중지성의 정원 조정환 대표가 함께 하는 대담자리가 마련되었다. 오월의 기적 같은 열흘을 만든 보통 사람들의 힘과 공동체에 대한 긍정을 느끼고 얘기를 나누던 자리는 점점 묵직하고 열띤 분위기를 띠었다.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담아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오늘 작가를 만나다 시간에는 <오월애>를 만드신 김태일 감독님과 지난해 『공통도시』라는 광주에 관한 책을 다중지성의 정원 조정환 대표를 모셨다. 먼저 감독님께서 영화를 작업하게 된 과정과 오월부터 영화가 상영되어온 과정에 대해서 들려주시면 좋겠다.

김태일(다큐멘터리 감독): 전체 기획을 한 것은 그 동안 다큐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 년 반 동안이었다. 더 떨어질 것도 없었고 한계상황 속에서 무기력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가 내 모습과 주변의 삶의 모습을 진지하게 보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기존의 모든 역사는 승자와 서구의 시선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시선이 불편했다. 우리나 제3세계의 시선이 담긴 ‘민중의 세계사 10부작’을 만들고 싶었다. 그 첫 번째로 오월 광주를 택했다. 짧은 십일 동안에는 아픔도 있지만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공동체의 모습도 있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국가에 맞서 총을 들고 싸울 수 있었는지, 그 싸웠던 분들이 누구였는지 풀어보고 싶었다. 지원 받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장모님한테 이천만 원을 빌렸다. 촬영 잘하고 구성 잘하는 이들과 작업할 여건도 안 돼서 저와 함께 하고 있는 친구를 조연출 겸 구성작가로 삼았다. 십오 년 전부터 나름대로 교육을 시켜왔다. (좌중 웃음) 작업을 할 때 먼저 제가 읽었던 책을 읽어보게 했다. 강요한 것은 아니고 ‘읽어보세요 탁’ 하면서 그렇게 십 년 정도 하니까 생각하는 게 비슷해졌다. 생계 문제에 관해서 타박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환상의 콤비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 광주 작업을 함께 하게 되었다. 여성분들에게 깊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조연출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제작사 이름도 ‘상구네’인데 상구는 첫째 아들의 이름이다. 이런 가족적이고 가내수공업적인 방식이었기 때문에 광주에 계신 분들의 속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이 년에 걸친 작업 중에 인터뷰 허락을 받기까지는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었다.

김성욱: 조정환 선생님은 <공통도시>라는 작업을 비슷한 시기에 하셨는데 <공통도시>는 어떤 작업이었고 오늘 작품을 보면서 어떤 점을 느끼셨는지?

조정환(다중지성의 정원 대표): <공통도시>는 광주 민주화항쟁을 현재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과 연결시키려는 작업이었다. 5.18은 지금의 신자유주의와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전두환 정권이 미국의 합의 아래 도입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민중의 저항이었다고 생각했다. 오늘 영화를 통해 본 열흘의 걸친 피의 시간도 그 이전의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이 도입되고 부산과 마산, 사북 등지에서 갈등이 빚어지던) 시간과 결코 분리시켜서 얘기할 수 없었고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정치와 5.18 민주항쟁에 대한 위로부터의 진압을 연결시켜서 사고하지 않으면 5.18은 눈물을 흘리고 참 아픈 기억이었다고 말하면서 감상으로만 남게 되고, 기억의 문제로만 치부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걸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책의 관심사였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오늘 영화에서 광주 항쟁과 관련하여 부각되는 인물들은 김대중 같은 정치가도 아니고 윤상원 같은 학생운동 지도부도 아니라는 점이다. 김밥을 말고 주먹밥을 배급했던 취사조를 비롯하여 운전을 통해 항쟁에 참여했던 이름 없는 사람들, 그리고 끝까지 항쟁에 참여했으나 실제로 고등학생에 불과했던 이들이다. 그런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난 삼십년 동안 광주 항쟁에 대한 기억 투쟁과 그것을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투쟁 모두에서 다 배제되었던 사람들이지 않나. 이들이 영화 속에서는 주역이 되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에너지로 조명되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러한 육성들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5.18 자료집을 보면 인터뷰를 통해서 꽤 많은 부분이 만들어졌지만 공식적인 역사로 정리되는 과정에서는 누락되고 다른 관점으로 바뀌어왔다. 이게 정말로 어떤 가감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육성으로,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에게 직접 접촉할 수 있는 대중적인 사건은 이 영화가 처음이라고 할 정도이다.

김성욱: 공식적인 역사에서 부각되지 않은 분들을 인터뷰 대상으로 삼게 된 과정과 실제로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겪었을 어려움이 궁금하다.

김태일: 기존의 인물이나 자료를 배제하고 직접 내려가서 발로 담았다. 그 중 가장 담고 싶었던 분들이 넝마주이 분들이나 갱생원 분들이었다. 두 번째로 마지막까지 방송을 하고 주먹밥을 만드셨던 여성분들의 그때 심정이 궁금했다. 광주하면 총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지만 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밥의 이미지가 중요하지 않나. 여성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은 것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어 제 작품에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내려갔다. 그런데 넝마주이와 관련된 자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재판기록도 다 뒤졌는데 거기에도 나오지 않았다. 넝마주이들이 살았던 동네를 뒤지면서 가장 오래된 집의 초인종을 눌러 나이든 할머니의 얘기를 한 달 동안 전해 들었다. 5월 27일에 계엄군이 광주를 장악하고 28일과 29일 사이에 군인들이 중무장을 하고 넝마주이들을 어디로 끌고 갔다고 했다. 하지만 끌고 가는 장면은 봤지만 어디로 끌고 갔는지, 그 이후의 행적을 아는 분이 없었다. 정말 흔적이 없었다. 그게 가장 안타깝고 힘들었다. 또 팔십년 당시에 대부분 시민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자부심을 많이들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만나자마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나에게 얘기를 들으려고 하느냐. 나는 다시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 나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도 때가 아닌가보다 생각하고 포기하는 게 맞을까 하고 생각하던 차에 시장에 계신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생활했던 공간이 대인시장의 빈 옥탑방이었는데 그때 한문순 어머니께서 리어카를 끌고 과일 행상을 하셨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찼던지 풀이 죽어있던 저희를 바로 나오게 만들었다. 혹시 팔십년 당시를 아시느냐고 했더니 당당하게 그 때 주먹밥을 하셨다고 했다. 그 이후에 쉽게 시장에 계신 분들과 접촉해서 인터뷰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 전에는 무진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광주 내에서는 피해 보상이 되고 나면서 여성분들 간에 항쟁에 참여했냐 안 했냐를 두고 광주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근 일년을 계속 쫓아다니고 설득하고 같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고 나서야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그런데 인터뷰를 듣고 났을 때는 이 분들이 이런 아픔을 삼십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한국 사회가 여성분과 당사자분들에 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 생각이 들면서 죄송스러워지게 됐다. 제가 들었기 때문에 그분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고 이런 아픔을 담아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면서 여성분들의 이야기를 담았던 것 같다.

김성욱: 다큐멘터리의 인터뷰 대상자들은 광주의 주역이기는 했지만 현재 상태에서의 이들은 또 타자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청을 철거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부분에 대한 분열 등도 혼란스러운 양태로 삼십년이 지난 지금 나타나고 있는데 어떻게 보셨는지?

조정환: 광주 항쟁 당시 이름 부를 수도 없고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 저는 다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다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독재 저 위에 자본주의라는 것에 의해서 고통받아왔고 독재가 해결된 다음에도 여전히 그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투쟁의 발전 경로를 놓고서 갈등이 벌어지기 시작할 때 이들 대부분의 목소리가 도청에서의 결사항전을 옹호하는 목소리로 전달되었는데, 이 목소리는 지난 삼십년간 5.18에 관한 극소수의 입장이고 짓눌려서 제대로 발언하지도 못하는 목소리에 속한다. 광주에 관한 일반적인 목소리가 결코 아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려고 하다가 주저앉히는 그런 목소리가 이 영화의 주된 목소리로 쓰였다.

김태일: 광주에 있을 때 시장에 있던 분들이라든지 시민단체에 있는 분을 만나면 대부분 이렇게 말씀하신다. 광주가 경제적으로 낙후되어있는데 좀 발전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신다. 광주 아시아 문화의 전당 건축비가 6조 8천억원에 달하는데 구 도청 자리에 생기면 주변 상권과 광주 지역의 경제적인 여건이 좋아질 수 있다고 어필되는 것 같다. 광주 지역 이외 사람들의 지지나 응원이 없다면 도청은 분명 철거될 것이다. 80년에는 하나가 되었지만 보상의 이름으로 상처를 받고 아시아 문화의 전당 건립이 추진되면서 많은 돈이 지역 사회에 뿌려졌다. 단체이기주의가 대두되면서 또 고통을 받고, 아픔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너무 오랫동안 아파왔기 때문에 힘이 많이 약화되어있다. 이제는 지쳐있다고나 할까.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여전히 오월에 관한 자부심이 가슴 저 깊은 곳에 꼬깃꼬깃 숨겨져 있다고 봤고 그전의 공동체가 만들어서 보여줬던 꿈같은 현실이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끄집어내줘야 하는데 광주의 힘만으로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한국사회 전체, 시민단체나 학생 운동하는 친구들이 함께 도와주고 싸워준다면 이런 항쟁의 마지막 남은 사적지라도 지키는 데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정환: 광주 사람들은 이미 보상까지 받은 사람들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한은 계속 기억만 한다고 해서 풀리는 건 결코 아니다. 한스러운 사건을 빚어내는 상황이 반복되지 않게끔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그날의 광주를 낳았던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도청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수호하는 것은 기억 투쟁 속에서만 중요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넓게 본다면 광주의 사태는 지구 어디에서나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그런 싸움에 함께 하면서 우리의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는 것, 반값등록금, 비정규직화에 대한 운동,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와 싸우는 것이야말로 도청을 사수하는 일이고 계엄군에 맞서서 계엄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투쟁에 함께하는 행동적 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정리: 최용혁 (관객 에디터) 사진: 이호규(자원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