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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21세기 우리 시대의 영화 특별전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의 세계

21세기 우리 시대의 영화 특별전이 한창이던 지난 15일 저녁 <러시아 방주> 상영 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정미숙 러시아 국립영화대학 예술학 박사의 강연이 이어졌다. 오직 한 쇼트로만 이루어진 영화 역사상 가장 놀라운 한 장면이 펼쳐진 영화 <러시아 방주>를 중심으로 알레산드르 소쿠로프의 세계에 대하여 정미숙 박사와 관객들이 나눈 시네토크 현장을 전한다.


정미숙(러시아 국립영화대학 예술학 박사): 소쿠로프 작품의 대부분은 러시아의 역사와 전통 문화사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래서 페레스트로이카 이전에 작품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상영금지 조치가 취해졌고, 90년대 이후에서부터야 비로소 서구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90년대 이전까지 소쿠로프 작품의 대부분은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초창기 세 작품을 차례로 살펴보려고 한다. 첫 작품인 <사람의 외로운 목소리>에서부터 소쿠로프가 지속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죽음이라는 모티프가 드러난다. 이 작품은 1920~30년대 반소비에트적인 작가로 지명되어 배척되었던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포투단 강>을 영화화한 것이다. 원작을 약간 변형시킨 결말에서 주인공은 역사적인 사건에 의해 죽고 말지만, 감독이 말하고자하는 죽음은 결코 파멸이나 삶의 파국이 아닌 어떤 종교적인 상징이며, 새로운 시작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소쿠로프 작품에서의 공간은 대부분 단일한 공간이다. 버나드 쇼의 <상심의 집>을 모티브로 만든 <슬픈 무감>이라는 영화의 공간 역시 방주과 같은 집이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중세와 근대풍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집은 습지와 같은 공간에 위치해 있고, 나중에는 그 집이 방주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그 집 주변에서 폭발음을 비롯한 전쟁의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이 전쟁에 대단히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 집은 방주로 바뀌고, 이미 세상이 멸망하고 난 이후에 흙탕물 속에서 부유한다. 그런 위태로운 방주의 모습에서 역사에 무관심했던 인물들에 대한 단죄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창세기적인 태초의 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이 등장한다. 이와 같이 소쿠로프 영화에서 죽음은 삶과 죽음의 끊임없는 연속선상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역시 새로운 세상을 상징한다. <일식>은 스트루가츠키의 <종말 전 10억년>을 영화화한 작품인데, 동아시아의 황량한 사막을 통해서 제국주의 권력의 종말을 상징하는 영화이다.

그 다음으로는 죽음의 다양한 모습에 관한 암울한 분위기의 3부작이 있다. <두 번째 서클>은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특히 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신곡>에서 등장하는 연옥을 상징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스톤>에서는 체홉 박물관이 단일한 공간으로 보여진다. 죽었던 체홉이 자신의 박물관을 방문하고 다시 묘지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박물관에 남겨진 고전과 전통의 무력함을 역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조용한 페이지> 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소쿠로프의 영화 대부분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루는 단일한 공간에서 삶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있고, 감독은 카메라를 통해서 개인들의 실존적인 삶을 관조하듯 들여다본다. 또한 제국주의 권력자들에 관한 작품들이 있다. 소쿠로프는 20세기를 히틀러와 레닌과 스탈린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의 작품 중에 혁명이나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영화는 없다. 최근에 나온 <알렉산드라>라는 영화가 극영화 중에서는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로흐>는 히틀러, <텔레츠>는 레닌, <태양>은 히로히토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에서도 그들의 정치나 이념이 아닌 실존적인 인간으로서의 가장 개인적인 삶을 다룬다. 그들이 단일한 공간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특정한 시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텔레츠>는 가장 러시아 적인 작품으로, 레닌이 병들어 죽기 직전의 모습을 다루었다. 여기서는 투르게네프나 체홉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러시아의 이상향적인 풍경을 단일한 공간으로 삼았다.

다음으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와 아들>과 <아버지와 아들>은 굉장히 종교적으로 죽음에 접근하고 있다. 여기서는 자연풍경이라는 부분을 강조하고 싶다. 소쿠로프 영화에서 죽음은 자연풍경과 굉장히 많이 관련되고 있다. <러시아 방주>의 라스트에서 예카테리나 대제가 황량한 벌판으로 뛰어나가는 것 역시 죽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자연이 신화적인 인물의 허위기제를 드러내는 하나의 도구로서도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몰로흐>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범으로서의 히틀러가 아닌 나약하고 우스꽝스러운 히틀러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위산과 같은 자연 풍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들>에서의 자연풍경은 곧바로 엄마의 죽음을 준비하는 아들의 이별의 고통과 연결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토대로 <러시아 방주>에서 나타난 꿈과 죽음과 역사가 소쿠로프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어떻게 다루어져 왔는지 대략적으로 알게 되셨으리라 생각한다. 다음으로는 소쿠로프의 작품세계를 간략히 소개하려고 한다. 제일 먼저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소쿠로프는 장르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가장 곤란하다며 자신이 선택한 다큐멘터리의 주제나 소재가 그대로 극영화로 연결된다고 이야기했다. 소쿠로프의 다큐멘터리는 인간 자체의 삶의 호흡을 관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인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든, 그 인물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이나 정치적인 갈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삶의 호흡을 관조하듯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역사적 갈등들은 가장 최소화되어 다루어지고 있다. 소쿠로프는 한 인터뷰에서 직접 ‘정치적인 언어는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쿠로프가 다루는 주제적인 모티브로는 역사, 죽음, 여행을 꼽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소쿠로프는 개인의 실존적인 삶과 죽음의 경계를 주로 다루고 있고, 그래서 정치적인 부분이 최소화 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쿠로프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모티브는 역사다. 특히 그의 다큐멘터리의 대부분은 러시아 역사들에 대한 엘레지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역사를 통해 다루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죽음이라는 주제다. 그리고 죽음이 자연의 질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자연과 같이 순환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역사와 관련해서는 죽음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쿠로프식의 희망이라고 볼 수 있으며, 종교적으로는 구원과 관련된다. 죽음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육체와 고통이다. 소쿠로프의 영화에서 육체는 광학 기계 사용을 통해 왜곡되거나, 혹은 죽음을 앞둔 병들고 나약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여행 또한 소쿠로프의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여행을 하며 우연적으로 어떤 공간에 들어가게 될 때 그 공간이 예술을 지향하는 공간, 특히 박물관인 경우가 많다. 그 박물관, 즉 단일한 공간에서 감독의 기억에 의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데 중첩되면서 시간의 지층을 이루게 된다. 대표적으로 에르미따주 박물관에 작품이 전시되어있는 18세기 프랑스 화가인 휴베르 로베르를 다룬 <로베르, 행복한 삶>이라는 영화를 꼽을 수 있다. 이 영화는 사실 <러시아 방주> 이전의 에르미타주 영화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 소쿠로프의 영화 창작이 미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 역시 발견할 수 있다. 로베르의 그림이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폐허가 된 고대의 건축물들이다. 거기서 유구한 권력의 무상함을 볼 수 있고, 감독은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 여행이라는 테마와 맞닿아 있는 것은 <여행 엘레지>라는 영화다. 영화 안에서 17세기에 덴마크의 어느 박물관에 방문하여 우연히 보게 된 그림에서 17세기라는 시대와, 그 그림이 그려진 100년 전과, 소쿠로프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대가 중첩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서 계속 말해오고 있듯이 시간의 경계가 사라진 단일한 공간에서 그의 작품 세계가 대부분 표현되고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몰로흐>나 <텔레츠>의 경우와 같이 단일한 공간에서 감독의 기억에 의해서 역사적인 시간이 살아나고 있다. 이것은 역시 여행에서 이야기 했던 주제와 맥을 같이 한다.


지금까지 얘기했듯이 소쿠로프가 끊임없이 다루어왔던 죽음, 혹은 꿈속과 사후의 세계, 그리고 시간의 경계가 지워지는 단일한 공간,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의 최소화라는 모든 주제적인 요소들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 <러시아 방주>가 아닌가 한다. 소쿠로프의 작품 세계는 넓고 깊고 철학적이며 접근하기 어렵다. 감독 본인도 자신은 대중을 위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술이란 세계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일반 관객들이 인식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그 인식을 계속 단절시키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 부분들을 최대한 간략하고 간결하게 소개해보았다.

관객1: 이 영화는 반내러티브적인 영화라고 생각했다.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는데, 오히려 그런 느낌이 참 기분 좋았다. 이렇게 반내러티브적인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러시아에서 이 영화의 흥행 결과가 궁금하다.
정미숙: 먼저 현대 러시아 영화계에서 소쿠로프의 위치를 짚고 넘어가자면, 소쿠로프는 러시아 작가주의 영화의 맥을 잇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20년대 몽따쥬 이론의 실험적 작가들을 타르코프스키가 이어받았다면, 타르코프스키의 작가주의적 정신을 오늘날 소쿠로프가 이어받고 있다. 러시아 영화는 2000년대 이후로 제작 편수가 증가하면서 활발하게 세계 영화시장을 공략하고 있는데, 한 편에서는 그렇게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면서도 동시에 이 같은 작가주의 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러시아 현지에서는 소쿠로프에 대해 극단적인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국립영화학교에서도 연배가 있는 교수들은 거부반응을 보이고, 젊은 이론가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관객2: <러시아 방주>는 컷트 없이 한 숏으로 촬영했기 때문에 대단히 화제가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그냥 단순한 영화적 기법상의 시도인건지 아니면 어떤 철학적 의도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고, 또한 다른 40편의 영화중에 그런 시도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정미숙: 소쿠로프가 이런 식의 원씬원컷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처음 생각한 것은 <러시아 방주>를 만들기 15년 전이라고 개봉 당시의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기술적인 면이 허락하지 않았고, 이제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며 이런 기술은 자신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렇다면 원씬원컷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주제가 무엇일까. 러시아의 동방정교는 그들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메시아적 사상이 강한데, 그런 부분이 영화에서 구현되고 있다. <슬픈 무감>에서 인물들이 결국 단죄 받게 되는 방주와는 달리, 여기에서의 방주는 예술과 러시아인들의 예술에의 찬미만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메시아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이 원씬원컷의 연속성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 방주가 세계를 구현할 수 있으며, 영원히 부유하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점을 이 연속성을 통해 영원성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와 같은 촬영을 시도하지 않았나라고 생각한다.


관객3: 영화에 등장하는 맹인 여성, 그리고 무용가가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설정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미숙: 소쿠로프는 자신의 작품의 모든 디테일에 상징적 의미를 담으며, 그 상징들이 하나의 주제를 향해서 응집력 있게 모여든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전쟁으로 인해 그림들을 모두 다른 곳에 보관해 놓아 그림이 하나도 없는 빈 박물관에서, 직원들이 직접 관람객들에게 빈 공간에 원래 걸려있던 그림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는 실화가 전해진다. 외교관이 그림을 볼 수 없는 맹인여성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부분은 페제르부르그 시민들의 이와 같은 예술에 대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림과 대화하는 무용가는 이전의 소쿠로프 영화들에 자주 출연했던 여성이다. 무용이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예술이고, 그런 면을 통해 그림의 정서와 대화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관객4: 앞의 질문에서 언급된 맹인 여성과 무용가에 대한 감상을 말씀드리고 싶다. 보통은 시각으로 조각을 감상하는데, 맹인 여성의 경우 조각을 촉각으로 느끼며 아주 적극적으로 예술에 반응한 것이라고 읽었다. 또한 미술과 연극을 비롯한 모든 예술을 언급한 영화에서, 춤이라는 예술 또한 언급하기 위해 무용가 여성을 등장시켰다고 생각했다. 어떤 문화적 코드의 대표로 그 두 여성의 삽입을 바라보았는데, 강의를 통해 설명을 들으며 더 폭넓은 이해를 하게 된 것 같다. (정리: 박예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