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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네바캉스 서울

[아티클]가토 다이와 임협영화

가토 다이와 임협영화

 

가토 다이(1916년 8월 24일 ~ 1985년 6월 17일)는 효고현 고베시 출신으로 60~70년대 시대극이나 임협영화로 활약한 일본영화 감독 중 한 명이다. 일본영화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가 “요절한 영화 천재”라 극찬한 야마나카 사다오의 조카이기도 한 그의 영화적 재능은 외가 쪽을 물려받은 듯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나카무라 긴노스케가 주연을 맡은 <구쓰카케 도키지로, 한 마리의 협객 沓掛時次郎 遊侠一匹>, 후지 준코의 대표작이기도 한 <붉은 모란> 시리즈, 그리고 <에도가와 란포의 음수 江戸川乱歩の陰獣> 등이 있다. 또한 영화 외에도 텔레비전 드라마 각본가로서 활동했었다.

공업학교 기계과를 다니다 2학년 때 중퇴를 한 그는 교토에 위치한 무역회사에 입사하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당시 영화감독이었던 야마나카 사다오에게 부탁하여 상경한 뒤 1937년 도호 촬영소에 입사하게 된다. 이후, 만주영화협회의 제작부장이자 그의 스승인 야기 야스타로와 함께 만주영화협회 등을 전전하며 기록영화를 만든다. 이때 야기 야스타로와 함께 한 기록영화에 대한 경험은 그가 말년에 다큐멘터리 영화에 참여하게 되는 데 영향을 미친다. 1946년에 귀국한 그는 다이에 교토 촬영소에 조감독으로 입사하고 자신의 소년 시절을 영화에 빠지게 만들었던 장본인이기도 한 이토 다이스케 감독의 작품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羅生門>의 인상적인 예고편도 가토 다이의 작업물 중 하나다. 1947년 미국 상원에서 시작된 매카시즘의 여파로 1950년대 일본 영화계에도 레드퍼지(Red Purge)가 실시되었는데, 가토 다이도 다이에 조합 서기장을 지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영화사에서 해고당하게 된다. 그 후, 독립 프로덕션으로 전직하여 시대극으로 1951년 영화감독 데뷔를 한다. 1956년에는 도에이 교토 촬영소로 이직하여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한다. 그중에서 하세가와 신의 희곡을 영화로 부활시킨 <그리운 어머니 瞼の母>, 뮤지컬과 SF, 현 사회에 대한 시대비평 등 여러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속에 집어넣어 “도에이 시대극의 누벨바그”로까지 찬사를 받은 이색작 <사나다풍운록 真田風雲録> 등, 당시 도에이의 간판 스타였던 나카무라 긴노스케와 여러 작품을 함께했다. 

프로그램 픽쳐의 왕좌를 닛카츠에게 빼앗겼던 도에이가 1963년 쓰루타 고지가 주연한 <인생극장․- 히샤카쿠>의 히트로 시대극을 대신할 새로운 장르를 발굴하게 되는데, 그것이 임협영화이다. 임협영화는 이후 후카사쿠 긴지의 <의리없는 전쟁>과 같은 실록 야쿠자 영화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10년간 한 세대를 풍미하게 되는 장르로서 자리를 지키게 된다. 도에이의 임협영화가 오랫동안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인정미 가득한 야쿠자를 그린 마키노 마사히로, 중후한 분위기를 그려낸 야마시타 고사쿠, 바로크적인 양식미를 영상에 담아낸 가토 다이 등과 같은 실력 있는 감독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중 가토 다이는 임협영화의 한 획을 긋는 인물로서 특히 사후에 평단과 관객들에 자주 회자되고 있다. 임협영화는 특정한 시기에 잠깐 인기를 끌고 사라져 버린 일본영화의 한 조류로 치부해 버리기엔 긴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임협은 가부키에서도 오래된 주제이지만, 임협물이라는 장르로 따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았다. 가부키가 근대화의 흐름 속에 ‘전통연극’, ‘고전연극’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임협물은 천박한 것으로 치부되어 버리고 후에 등장하는 시대극에서도 임협물은 철저히 배제되어 버린다. 그러나 실제 많은 관객들은 <구니사다 지 国定忠治>나 <네즈미조 지로키치 鼠小僧次郎吉>라는 반권력적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임협물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임협물에는 근대극에서 느낄 수 있는 당시의 시대의식, 즉 ‘새로움’을 지향하거나 그것을 향해 전진하고자 하는 성질이 배제되고, 오히려 패배감에 사로잡힌 치부의 세계, 의지와는 상관없이 점점 더 파멸되어 가는 인간상에서 특유의 매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가토 다이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파멸해 가는 인간군상들을 통해 잘 묘사되고 있다.

주인공의 고독과 파멸은 가토 다이 작품 속에서 묘한 페이소스로 작용하며 극 전반을 이끌어 나가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개인과 단체 사이에서 부유하며 그 어느 쪽에도 진입하지 못한 채 ‘틈새인간(ハザマ人間)’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원수와 동지, 자본가와 노동자 등 세상의 많은 대립각 사이에 그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중간에 서서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해 나가는 자가 ‘틈새인간’인 것이다. 가토 다이의 작품 속에서는 틈새인간과 대립각을 이루는 인간상으로 어느 한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매몰시킨 채 살아가는 ‘순응형 인간’이 등장한다. <메이지협객전 삼대계승 明治侠客伝 三代目襲名>에서 쓰루타 고지가 분한 기쿠치야말로 가토 다이가 그려낸 ‘틈새인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조직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동일시했던 기쿠치는 잠시 ‘순응형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의리와 인정 사이의 선택지에 놓이게 된 순간 조직과 자신 사이에서 어느 하나 선택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틈새인간’으로 변모한다. 그가 의리와 인정 중 어느 한쪽도 선택하길 거부하고 사이에 놓이기를 결정한 순간 ‘틈새인간’의 파멸은 필연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가토 다이가 그려내는 임협의 세계에서 문제로부터의 탈출이란 있을 수 없듯이, ‘틈새인간’은 자신이 놓인 상황 속에서 몇 번이고 탈출하고자 분투하지만 탈출할 수 없기에 ‘틈새인간’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가토 다이는 ‘틈새인간’에 내재하고 있는 파멸로의 숙명을 좌절의 결과로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도약으로서 전환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파멸을 반복하는 과정 안에서 존재하는 저항의 정신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토 다이 감독의 임협영화 중에서 팬들에게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작품은 여도박사로 분한 후지 준코의 매력이 돋보이는 <붉은 모란 - 돌아온 오류 緋丹博徒 お竜参上>이다. 여주인공이 후지 준코가 아니면 <붉은 모란> 시리즈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시리즈에서 후지 준코가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하다. 후지 준코는 <일본협객전>, <붉은 모란> 시리즈의 프로듀서인 순도 고지의 딸로서, 아버지 사무실에 견학갔다가 우연히 마키노 마사히로 감독에게 스카우트되어 여배우의 길을 걷게 된 케이스다. 쓰루타 고지, 다카쿠라 겐과 함께 ‘도에이의 3대 스타’로 불렸던 그녀는 남성들이 지배적인 세계인 임협영화에서 특유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독보적인 존재로 성장하게 된다. 여도박사로서 그녀가 보여주는 손놀림은 주변의 야쿠자를 압도하며 거친 남성들의 세계인 임협에서 여자협객이란 캐릭터를 구축한다. 가토 다이 감독이 <메이지협객전 삼대계승>의 연출을 맡을 때, 당시 프로듀서였던 도 고지에게 “지금까지 나왔던 임협영화들처럼 도박꾼 칭찬 일색의 영화에는 흥미가 없지만, 남녀의 멜로드라마라면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가토 다이는 애초부터 임협영화의 세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그는 임협영화에서 내세우는 도박꾼들의 의리에 의심을 품고 있었고, “약자를 구하고 강자를 물리친다”는 이상화된 협객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젊은 남녀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붉은 모란 - 화투 승부 緋丹博徒 花札勝負>는 이러한 가토 다이의 작품관이 잘 반영된 작품 중 하나이다. 물론 <붉은 모란 - 화투 승부>에서도 양친을 잃은 맹인소녀의 치료를 돕는다는 이상화된 협객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지만, 이는 기존 임협영화에서 보여지던 협객의 의리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류가 맹인소녀를 고치기 위해 전념하는 모습은 강자는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임협도’에 얽매인 행위가 아닌 보다 개인적인 정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성들 간의 연대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진심에 의한 사적인 행위로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토 다이는 앞서 언급된 두 편의 <붉은 모란> 시리즈를 통해서 기존 임협영화와의 차이점을 확실히 자각하고 자신만의 색채를 담아내기 위해 의도적인 시도를 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창작 활동은 1967년에서 1970년에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이 당시 만든 작품들로 실록 야쿠자 영화의 히어로 안도 노보루가 주연을 한 <남자의 얼굴은 이력서>나 <징역 18년> 등과 같은 액션영화가 성공했고, 다이에의 임협 스타였던 에나미 교코를 도에이로 불러들여 <쇼와 여도박사>에서 함께 작업했다. 또한 마쓰모토 세이초의 추리소설들을 영화화한 노무라 요시타로나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로 유명한 야마다 요지 등 쇼치쿠 감독들과의 교류를 통해서도 작품의 저변을 넓혀 나갔다. 1970년대에는 쇼치쿠에서 대작 시리즈인 <미야모토 무사시>, <인생극장>, <꽃과 용> 이외에 컬트영화의 걸작으로 불리우는 <에도가와 란포의 음수>를 작업하고, 도호에서는 <일본협화전>, <화염과 같이> 등을 감독한다. 70년대 이후 일본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에도 그만의 창작열은 꺾이지 않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등 경계를 넘는 다양한 작업을 펼쳐 나간다. 가토 다이 감독은 극단으로까지 치닫는 로우앵글과 고정된 화면, 롱테이크 등으로 구성된 독특한 촬영 스타일로 유명하다. 그중 극단적인 로우앵글의 탄생 비화에는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는 도로를 파내어 그곳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주변의 전선으로 설치가 방해될 때는 과감히 그 전선을 자르도록 지시한 일화가 있다. 또는 달리는 열차를 바로 그 밑에서 찍은 영상이라든지, 그의 과감하고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연출방식은 전설로서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촬영기법이 감독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확립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1960년에 제작된 작품 <오에도의 협객 大江戸の侠児>에는 로우앵글과 부감쇼트, 고정된 화면과 유동적인 카메라, 롱테이크와 몽타주 기법 등 각각 서로 상반되는 촬영기법이 혼재되어 관객들에게 제시되고 있다. 이와 같이 가토 다이는 현상 유지에 머무르지 않고, 작품 활동을 통해서 꾸준히 자신만의 스타일 구축을 위해 갈고 닦으며 노력하는 장인정신을 지닌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 이후, 영화 제작이 힘들어진 말년의 그는 자신의 외숙부이자 천재 영화감독인 야마나카 사다오의 업적을 정리해서 많은 저서를 남기는 등 영화를 위한 작업에 끊임없이 천착한다. 그러던 중 이하라 세이카쿠 원작의 호색오인녀를 영화화하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1985년에 급작스럽게 타계, 그의 차기작을 기대하던 많은 영화인들을 안타깝게 했다. 기존의 임협영화의 틀에서 벗어나 그만의 독자적인 스타일로 만들어진 임협영화들이 사후에 많은 영화 팬들과 평론가들에게 재조명되고, 여러 영화제 등을 통해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가토 다이와 그의 작품이 보다 많은 한국 영화팬들에게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태준 ㅣ 일본영화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