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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바캉스 서울/Review

실뱅 쇼메의 '일루셔니스트'

프랑스의 애니메이션 <일루셔니스트>는 한국 관객에게는 낯선 실뱅 쇼메의 작품이다. 실뱅 쇼메는 2003년 발표한 <벨빌의 자매들>로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오를 정도로 애니메이션계의 실력자로 꼽히는 감독이다. 물론 감독에 대한 설명만으로 <일루셔니스트>에 대한 국내 관객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는 다소 역부족이다. 그럼 이건 어떤가, <일루셔니스트>가 <윌로씨의 휴가>(1953) <나의 아저씨>(1958) <플레이타임>(1967)으로 유명한 자크 타티의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면?

원래 자크 타티는 <플레이타임>을 연출하기 전 <일루셔니스트>라는 작품을 기획 중에 있었다. 자크 타티가 직접 연기한 기존의 윌로씨 캐릭터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든 무심하게 본인의 리듬으로 독보적인 행동반경을 확보하는 무한 긍정의 이미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와 달리 <일루셔니스트>에서는 긍정의 이미지를 많이 버려야 했던 까닭에 자크 타티는 이를 영화화하는 대신 자신의 서랍 속에 간직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1982년 자크 타티는 유명을 달리 했고 <일루셔니스트>의 시나리오는 그 후 딸 소피 타티쉐프의 보관 하에 있다가 실뱅 쇼메의 손에 들어오게 됐다.

실뱅 쇼메는 시나리오를 본 후 자크 타티가 영화화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일루셔니스트>의 주인공은 자크 타티가 창조한 윌로씨가 아니라 자크 타티 본인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자크 타티와 윌로씨는 외견 상 같은 인물에 속하지만 각각의 영화 속에서 보이는 정서상의 차이는 무지하게 크다. 자크 타티를 그대로 끌어들인 <일루셔니스트>의 주인공 타티쉐프의 직업은 록스타와 텔레비전의 유행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은 마법사다. 그는 공연할 만한 장소가 있으면 스코틀랜드의 오지마을까지 달려가지만 호응은 그리 큰 편이 아니다. 오직 한 소녀 앨리스만이 그의 무대에 반해 타티쉐프를 따라나선다. 하지만 처음 보는 도시의 화려함에 반한 앨리스는 남자친구를 만나 타티쉐프와는 안녕을 고한다.

슬랩스틱 연기를 구사하는 ‘프랑스의 찰리 채플린' 자크 타티를 모델로 한 주인공, 첨단의 3D가 아닌 고전적 2D 애니메이션이라니, 여러 모에서 현대 영화의 리듬과 역행하는 <일루셔니스트>는 타티의 영화적 유산을 가감 없이 계승한다. 말보다 행동으로, 대사보다 이미지로, 감각적인 묘사보다 정서가 충만한 미장센으로 무장한 자크 타티의 영화에는 날로 고도화되는 사회를 풍자하면서도 한줌의 순수를 긍정하는 낭만이 풍만했다. 그래서 살아생전 자크 타티의 영화에는 ‘순수’에 대한 향수의 정서가 충만했다. <일루셔니스트>가 이들 영화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일루셔니스트>의 실뱅 쇼메는 굳이 그 순수의 정서를 되살리려 하지 않는다. 아니, 자크 타티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싫어 영화화를 뒤로 미룬 것일지도 모른다. 자크 타티는 그 자신의 영화 속에서 순수라는 ‘마법’을 되살려 관객의 호응을 얻는데 성공했지만 그 마법이 오래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듯 보인다. (타티가 10년을 기획해 만든 <플레이타임>은 관객의 철저한 외면 속에 흥행에 실패, 이후 거액의 빚더미에 올랐다) <일루셔니스트>에서처럼 한 순간 소녀의 순수한 마음을 혹하게 할 수는 있지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첨단화, 디지털의 물결 속에서 마법과 같은 아날로그적 행위는 더 이상 위력을 발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CG로 대변되는 규모의 스펙터클에 익숙한 현대의 관객들에게 <일루셔니스트>는 한동안 잊고 있던 고전적 가치의 마법을 되살리지만 그 뒷맛은 달콤, 씁쓸하기만 하다.

글/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