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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2012 베니스 인 서울

[시네토크] 파솔리니의 세계

<돼지우리> 상영 후 한창호 평론가 강연 지상중계

 

지난 12월 22일 ‘2012 베니스 인 서울’ 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 했던 파솔리니의 <돼지우리> 상영 후 이탈리아영화에 정통인 한창호 영화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있었다. ‘파솔리니의 영화세계’란 주제로 그의 작품 스틸들을 함께 보며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갔던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한창호(영화평론가): 파솔리니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1922년생이다. 볼로냐 대학에서 원래는 문학을 전공했는데 미술사학자인 로베르토 롱기의 눈에 띄어 르네상스 미술사, 매너리즘 미술사로 논문 준비를 하고 있었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징집을 피해 어머니의 고향 프리올리로 피신을 하는데 그곳에서 인생의 큰 변화를 겪는다. 그곳에서 파솔리니는 정치적 신념에 따라 공산당에 가입하지만,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출당 당한다. 60년대까지도 이탈리아 뿐 아니라 공산당 내에서도 동성애자, 소수자에 대해 편견이 있었다. 그렇지만 파솔리니는 평생 맑시스트로 남았고, 이탈리아 공산당과는 일정한 긴장관계에 있었다. 파솔리니에게는 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 조직에 가담해 파시스트와 맞서 전투를 벌이다 사고로 죽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볼로냐로 돌아온 파졸리니는 원래 전공이었던 문학으로 돌아가 이탈리아 낭만주의 시인 파스콜리와 관련된 논문으로 졸업한다. 파시스트 장교였던 아버지와 사이가 아주 안 좋았던 파솔리니는 그 즈음 결국 어머니와 둘이 야반도주 하듯 집을 떠난다. 로마로 건너간 파솔리니는 시인, 문학 평론가로 활동하며 생활했지만 대단히 가난했다. 당시 전후 이탈리아 현대시 그룹을 이끌었던 시인 아틸리오 베르톨루치는 문학잡지에 파솔리니가 자신의 시에 대해 쓴 글을 보고 이 젊은 비평가를 만나보고 싶어 하게 된다. 그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아버지이기도 한데, 그렇게 해서 파솔리니는 베르토루치 집안과 관계를 맺는다. 너무나 가난했던 파솔리니에게 아틸리오 베르톨루치는 사립학교의 교사 자리를 마련해주고, 파솔리니는 교사 생활을 하면서 소설 『폭력적인 삶』을 쓴다. 네오리얼리즘의 전통 속에 있는 소설로, 로마 근교의 하층민 철거민들, 청년들이 어떻게 해서 사회 문제에까지 눈 뜨게 되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생생한 문장을 쓰기 위해 파솔리니는 당시 하층민 청년들이 쓰는 구어와 속어들을 마치 언어학자가 공부를 하듯이 채록하기도 했다. 그만큼 문장이 살아있다. 펠리니가 <카비리아의 밤>을 발표할 때, 파솔리니를 초대해 하층민들이 쓰는 로마 사투리를 감수를 받게 된다. 물론 파솔리니는 그 이전부터 이미 영화계에 들어와서 시나리오를 쓰며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61년 <아카토네>로 데뷔할 때 파솔리니는 베르톨루치를 조감독으로 썼고, 베르톨루치의 데뷔작을 만들 때 시나리오를 파솔리니가 썼다. 어찌 보면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은혜를 갚은 셈이었다.

 

파솔리니의 영화가 낯설고 어려운 것은 어떤 영화든지 그의 영화에 깔려있는 것은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이다. 그리스 비극을 굉장히 좋아해서 <오이디푸스>나 <메데아>를 각색해 영화로 만들기도 했고, 코뮤니스트이지만 항상 종교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예수를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마태복음>을 만들고, <맘마로마>도 마리아를 많이 의식한 작품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 유럽 코뮤니스트의 이데올로기 이 세 가지가 항상 바탕이 된다. 그런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일반 관객과 소통하는 데에 어려움이 좀 있는 것 같다. 1969년에 나온 <돼지우리>는 정치적 알레고리의 영화이다. 68혁명으로 유럽의 지식인들이 많이 흥분해있을 때 파솔리니가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의견을 제기한 작품이다. 두 개의 에피소드가 병렬적으로 진행된다. 16세기의 이야기와 20세기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본질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사건이 반복되고 있다. 즉 현대의 어느 나라에나 알레고리의 매트릭스를 적용시킬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처음에 석판문이 보인다. 석판의 내용은 중간에 아버지 클로츠에 의해 다시 한 번 얘기된다. 그는 ‘아내와 오랫동안 숙고했는데, 만약 아들이 복종하지 않는다면 잡아먹기로 했다’면서 ‘그런데 나의 아들은 복종하는 것도, 복종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라며 말을 흐린다. 복종한다면 나의 부를 같이 향유할 수 있도록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잡아먹겠다는 것이다. 시작과 함께 이 영화의 메인 테마, 즉 세대 간의 착취와 갈등이라는 것이 나타나있다. 영화는 독일의 본에 있는 성에서 진행되는 이야기, 에트나 화산에서의 이야기가 함께 진행된다. 현대의 독일을 배경으로 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클로츠는 대대로 이어져오며 부를 독점하는 자본가이다. 그의 라이벌인 헤르디히츠는 나치 출신으로, 부당한 정세 속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한 자본가이다.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파솔리니는 단지 독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것이다. 당시 아들들이 마치 승리한 듯한 기분에 취해있을 때였다. 전후에도 여전히 기득권을 갖고 있던 아버지 세대에 대해 젊은 세대들이 일종의 세대교체를 이룬 것이 68혁명이었다. 그런데 클로츠와 헤르디히츠의 만남에서 보이는 것은 과거로부터 물려받거나 나치를 통해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 사람들의 권력, 금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니 흥분해 있을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아버지 클로츠는 히틀러의 외모를 패러디하고 있다. 그는 반복해서 브레히트와 그로츠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히틀러의 청년들처럼 복종을 해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안 되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는 것이다. 그로츠는 소위 다다 시절의 대표적인 작가로 독일과 독일인을 돼지우리의 돼지에 비유했다. 파솔리니도 그 점에서 이 영화를 착안한 듯하다. 클로츠는 부인과 얘기할 때도, 그로츠가 살았다면 분명히 우리를 돼지로 그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헤르디히츠는 이름에서부터 히틀러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소위 학살자, 나치였다. 그가 과거에 유태인 볼세비키 코뮤니스트의 껍질을 벗기는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비유법이다. 클로츠에게는 율리안이라는 아들이 있다. 그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는데,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가 돼지우리에 들어가 아날 섹스를 한다는 것이다. 헤르디히츠는 이 사실을 캐내 클로츠를 협박하고 합병에 성공한다. 합병을 축하하던 날 율리안은 돼지우리에서 죽는데, 그것이 살해된 것인지, 자살인지는 분명하지 않고 모호하다.

 

이 영화에서 동물애호증은 중요한 테마로 제시된다. 돼지우리는 분명 이 세상을, 모조리 다 먹어치우는 아버지 세대를 은유한다. 그리고 율리안은 여기에 들어가 아날 섹스를 한다. 파솔리니가 과연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는지는 모호하다. 모호함으로 제시함으로써 모든 것을 포괄시키는 것이 파솔리니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돼지라는 비유는 굉장히 노골적이고 모욕적인 것이다. 율리안이 이 돼지우리에 가서 하는 행위는 부친 세대에 대한 모욕이고, 자기 나름의 소극적인 저항이다. 대단히 소극적인 68세대의 남성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저항에서 시작됐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기 쾌락이 되어가기 때문에 모호해진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어쨌든 아들이 나치 시대의 아이들처럼 복종하든지, 복종하지 않는다면 먹어버릴 텐데, 율리안의 행위는 결국 복종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잡아먹는다.

율리안의 애인으로 등장하는 이다는 17살의 학생으로 파솔리니가 비판하는 68세대의 전형이다. 파솔리니가 특히 혐오했던 것이 학생들이었다. 경찰들과 충동했을 때 학생들은 파솔리니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경찰들을 옹호하고 연민을 가졌다. 그는 노동자들이나 하층민, 철거민들의 입장은 지지했지만 학생들에 대해선 관념적인 아마추어, 극단주의자로 보았다. 학생들에 대한 그러한 시선이 이다라는 인물로 표현되어 있다. 이다를 연기한 안느 비아젬스키는 당시 고다르의 아내였고, 고다르가 정치영화를 만들 때거나 많이 나왔기 때문에 소위 68세대를 상징하는 배우로 많이 각인되어 있었는데, 이 영화에선 아이러니하게도 파솔리니가 손가락질했던 그런 학생으로 나온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대사가 전혀 없고 마치 무성 영화를 찍듯이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인물이 쓰고 있는 철모나 조총으로 보아 대략 16세기 쯤 일거라 짐작하게 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동물애호증이 문제였다면, 두 번째 에피소드는 식인이 문제가 된다. 한 청년이 산에서 사람을 잡아 죽이고, 식인을 하고, 여자를 겁탈하기도 한다. 나중에는 동료들도 생기도 교회로 짐작되는 곳에 신고 되어 처형당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 청년이 군인을 죽인다는 점에서 국가권력 질서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여자도 죽인다. 첫 번째 에피소드와 비슷하다. 청년이 처음에 군인을 죽이고 남자를 죽였던 것은 부친살해에 대한 반복으로 느꼈다. 그렇지만 제도권에 반역하는 리더처럼 영웅시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상하게 나중엔 살해 자체가 일상화되어버리는 불한당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버지를 왜 죽였는지 설명은 하지 않지만, 도피해서 그곳에서도 충동이 올라왔는지 또 군인을 죽이고, 나중에는 본질적인 것은 없어지고 나쁜 행위만 남게 되었다. 처형되기 직전에 청년은 네 번을 반복해서 말한다. ‘나는 아버지를 죽였고, 사람의 고기를 먹었고, 기쁨에 몸이 떨린다.’ 기쁨에 떨린다고 말하면서 청년은 울고 있다. 분명 부친 살해를 저지른 반역자, 저항한 반역자가 맞다. 그렇지만 한 개인으로서 눈물이 나는 것이다. 율린안과는 다르다. 율리안이 소극적이었다면 이 청년은 강력하게 저항하고서 처벌을 받는다. 두 청년이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결과적으로는 아버지에게 잡아먹히지만 좀 다르다.

 

파솔리니의 영화를 많이 안 본 분들이라면 자유간접화법이라고 하는 것이 많이 낯설었을 것이다. 파솔리니는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자기 확신이 강했고 그것에 근거해서 찍었다. 파솔리니의 영화를 보면 이상하게 잘 몰입이 안 된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 그렇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카메라의 시선(객관적 시선), 캐릭터의 시선(주관적 시선) 두 가지를 본다. 영화를 볼 때 자연스럽게 이 둘 중 하나를 따라가게 되어 있는데, 파솔리니는 그런 부분들을 자꾼 깨뜨린다. 이를테면 첫 장면에서 나비가 나타나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다 카메라가 휙 돌더니 청년이 그 나비를 보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 때 일어나는 약간의 혼란 같은 것이 있다. 관객은 이 두 시선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부분이 일반적인 영화와 많이 다라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시선에 대해 파솔리니가 시적 영화라고 부르며 주장했던 것이 점점 현대영화의 특징을 설명하는 부분이 되었다. 파솔리니의 자유간접화법 이후에 생긴 현대영화의 흐름이라고 보면 되겠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 사진: 박지연(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