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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시네바캉스 서울

[시네토크] 문제가 어디 있는지를 못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

<괴물> 상영 후 김곡 감독 시네토크 지상중계

 

지난 8월 10일 존 카펜터의 <괴물> 상영이 있던 날, 국내 최고의 카펜터 팬이라 직접 시네토크를 자청했다던 김곡 감독이 극장을 찾았다. 이날의 시네토크는 그가 존 카펜터에게 바치는 애정만큼, 카펜터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던 자리였다. 그 이야기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곡(영화감독): 제가 마치 이 영화를 만든 감독처럼 나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다. 제가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에게 연락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카펜터 팬은 나인 것 같다’라고 하면서, 예정되지 않았더라도 꼭 좀 초대해달라고 떼를 써서 나오게 됐다. (웃음) 근데 저는 이 영화를 만든 사람도 아닐뿐더러 이 자리는 GV도 아니고, 솔직히 제가 뭔가 대답해드릴 건 없다. 여러분처럼 한명의 팬으로 와 있을 뿐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존 카펜터를 처음 만난 건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취미가 엄마가 외출했을 때 김선 감독이랑 같이 라면 끓여먹으면서 몰래 빌린 비디오를 보는 거였다. 그때도 좋아하던 작가가 몇 명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존 카펜터였다. 기억하기론 <괴물>을 보고 먹고 있던 라면을 반 넘게 남겼던 것 같다. 살이 갈라지고 하는 게 너무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제 인생을 이렇게 사로잡을 줄은 몰랐다. 그 이후 저도 모르게 친구들한테 <괴물>이란 영화 봤냐고 묻고 다녔고, 애들이 그게 뭐냐고 하면 꼭 보라고 계속 말하고 다녔다. 그때 같은 시기에 본 영화가 <비디오드롬>(1983)이었다. 그것도 아마 같은 날에, 아니면 이틀간 연달아 봤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크로넨버그와 카펜터의 팬이 됐다. 국민학교 5학년 때 크로넨버그와 카펜터가 만든 영화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 유년시절은 몇 명의 작가에게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게 존 카펜터, 데이빗 크로넨버그, 브라이언 드 팔마였다. 그중에서도 카펜터의 <괴물>이란 영화는, 그 영화가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마음속 깊이 나를 사로잡는, 매순간 나를 따라다니는 영화다. 그런 영화는 당연히 몇 편 안 된다. <괴물>은 그런 영화들 중 한 편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도둑이 될 수 있다면 세상에서 훔치고 싶은 단 하나의 네거티브 필름은 <괴물>이다. 저한테는 우상 같은 영화고, 거의 종교나 다름없다. (웃음)

 

 

존 카펜터 감독은 UCLA 영화학교 출신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각본가로도 활동했고, <다크 스타>(1974)라는 황당무계한 영화를 첫 번째 장편으로 만들었다. 이후 1978년 <할로윈>이라는 영화로 전 세계를 강타한다. <할로윈>은 촬영을 2주 만에 끝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찍은 영화다. <할로윈> 다음에는 <안개>(1980), <이스케이프 프롬 뉴욕>(1981) 등의 작품이 있다. 존 카펜터는 공포영화 전문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렇진 않다. 카펜터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는 하워드 혹스다. 그리고 하워드 혹스가 제작하고 공동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1951년도의 <괴물>이 있다.

혹스와 카펜터의 <괴물>은 존 캠벨의 <Who Goes There>이라는 단편 소설이 원작이다. 50년대 매카시즘 열풍 때문에 이런 소설들이 무더기로 나오기 시작한다. 혹스는 이 소설을 각색하여 영화를 만든 것이다. 카펜터는 혹스의 <괴물> 팬이었는데, 시나리오를 받고 고민을 했다. 혹스의 영화처럼 그대로 만들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혹스의 <괴물>은 카펜터의 <괴물>과는 달리 믿음의 분기에 대한 성찰이 이분법적이었다. 외계인이 한명 떨어지는데, 그 외계인은 우리의 과학적인 발견이니까 보호해야 한다는 과학자 측, 그래도 죽여야 한다는 군인 측, 양자의 구도로 나뉜다. 전형적인 좀비적 구도다. 재밌는 건 혹스의 <괴물>은 괴물에 대한 연출이 굉장히 클래시컬하다는 점이다. 키 큰 거인처럼 묘사되는 게 전부다. 하워드 혹스와 크리스찬 니비는 공포물을 만들기보단 폐쇄 공간 드라마를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다. 카펜터의 <괴물>과 혹스의 <괴물>은 크리쳐에 대해서도 많이 다르다. 혹스의 영화는 아마 돈 시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혹스의 영화에선 크리쳐가 수동적인 식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복제라는 개념이 없었다. 피를 빨리면 그냥 죽어버린다. 근데 존 카펜터는 많은 해석을 가해서 공기감염을 접촉감염으로 바꾸고, 식물에는 없는 흡수의 내장을 만들었다. 정리하자면, 혹스의 <괴물>을 원작으로 봤을 때 카펜터의 <괴물>에서는 인물들의 내분이 여러 갈래로 붕괴되고, 흡수, 동화, 피와 내장의 개념이 들어온다. 즉 카펜터는 인간의 분열에 더 집중하고, 인간의 분열을 가속시키는 복제 개념을 들여와 진정한 전염병을 만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느낌은 눈에서 온다. 하얀색의 가장 차가운 눈, 우리의 시야를 불투명하게 가리고 모든 걸 희미하게 만드는 설원, 그곳에서 고립된 사람들. 이걸 제일 좋아한다. 그리고 가장 차가운 것 속에 가장 뜨거운 것이 있다. 대표적인 장면이 노르웨이 캠프에서 피가 얼어붙은 장면이다. 가장 뜨거운 것이 동결되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녹는 순간,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차가움이 인간의 불신을 이끌고 뜨거움이 괴물의 모방을 이끈다. <다크 스타>부터 최근작까지 카펜터의 영화는 항상 내부와 외부의 구도로 진행된다. 혹스의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구도다. 내부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있고 외부에서 무언가가 침입하는데, 둘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이 없어도 내부에서 뭔가 교란이 일어난다. 마치 뚜껑을 열지 않아도 냄비 안의 물은 흔들리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내부와 외부의 상호작용은 아니다. 밖에서 안으로 세균이 침투해오고 잔상이 남지만, 그것을 어떻게 추적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항체들이 서로를 파괴한다. 자가전염, 자가면역증세 같은 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건 매카시즘 열풍에 저항했던 많은 공포영화 작가들이 선호했던 구도이기도 하다. 여기선 심지어 밖에 뭐가 있는지조차도 몰라야 자가면역이 세진다. 항원 식별이 안 되니까 항체끼리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다. 맥크래디, 클라크, 차일즈의 삼파전에서 괴물은 그저 보조를 맞출 뿐, 직접적 원인은 아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인간의 불신이다. 존 카펜터는 까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에이즈나 바이러스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바이러스를 목전에 둔 인간성에 대한 영화라고 이야기했다. 자기가 진짜로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문제는 어디 있는가’, 즉 문제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문제가 어디 있는지를 못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클라크 같은 경우인데, 클라크는 사람보다 개를 좋아하는, 따뜻하면서도 한편으론 적대적인 캐릭터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클라크는 사람이었고, 맥크래디는 살인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자가면역에 빠진 면역계이기 때문에 법은 무너지고, 살인도 무색한 상황이다. 또한 차일즈라는 캐릭터도 재밌다. 맥크래디와 대립을 이루면서 끝내 살아남는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너무 좋다. 혹스의 원작 영화는 신나게 끝나는 반면, 존 카펜터는 우수에 찬 엔딩으로 끝난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뭔 일이 일어나는지 보게.”

 

카펜터는 몽타주를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빠르게 가면서 뿜어내는 소비에트 몽타주고, 또 하나는 어둠속으로 묻히게 하고 서스펜스를 주는 독일 표현주의 몽타주다. 그리고 자기가 <할로윈>에서 썼던 것은 독일 표현주의 몽타주라고 한다. <할로윈>은 존 카펜터를 전 세계에 알린 영환데, 살인이 일어나는 장면은 여타 지알로 필름과 비슷하다. 슬래셔 필름과 그다지 다를 바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말로 무서웠던 건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카메라였다. <할로윈> 같은 영화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카펜터는 진짜 공포의 성질은 단지 피가 많거나 잔인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작가는 정말 별로다. 우리가 공포영화 거장이라고 생각하는 감독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다들 심오한 피의 철학, 본다는 것과 안 본다는 것, 외부와 내부에 대한 철저한 존재론을 갖고 작업한다. 마리오 바바, 다리오 아르젠토, 존 카펜터 등의 작가들에게서 강력하게 나타나는 시간관이 있는데, 카펜터의 경우는 안 보인다는 것이다. <할로윈>의 마이어스가 딱 좋은 옌데, 안 보인다는 게 단지 어두워서 안 보인다는 게 아니다. 안 보이는 건 보이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다.

 

 

<할로윈> 바로 다음 작품 <안개>에서는 불투명한 안개가 나오는데, 거기에다가 존 카펜터가 추가했던 건 안개가 빛이 난다는 거였다. 안개는 너무 잘 보여서, 눈이 부셔서 안 보인다. 가장 불투명한 것이 뭔가를 숨기고 있지만 사실은 숨기고 있지 않은 거다. 왜냐면 그 자체로 발광하기 때문이다. 안개는 그 자체로 너무나 빛이 나고, 우리는 그 빛을 따라가야 악의 실체를 알게 된다. 이 관념이 카펜터의 후기작을 점령하는데, 영화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빛’에 악마가 숨어 다니게 된다. 존 카펜터의 인터뷰에 의하면, 인간에게 가장 크게 운명 지워진 건 우리는 우리의 신체 안에 갇혔다는 것이며, 그리고 진짜 악마는 어둠이 아니라 빛에 갇혔다고 하는 것이다. 괴물의 주제도 우리 시선 속에 있는 악마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괴물은 우리 바깥에 있지 않다. 내가 저 괴물을 쳐다보는 순간 내 시선은 감염된 것이다. 어둡다고 생각한 것은 우리 시선 안쪽에 있다. 만약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저는 이 개념을 ‘투명하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투명하다는 건 안 보이지만 너무나 잘 보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다. 82년도는 카펜터에게 악몽 같은 해로, 관객도 비평가도 모두 <괴물>에 등을 돌린다. 이후 카펜터는 몇 년을 방황하고, 그 사이에 빛 속에 있는 악마를 표현하는 좋은 영화들이 나오게 된다.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1987), <매드니스>(1994) 등이 그렇다.

 

존 카펜터는 다른 공포영화 작가들과 달리 피에 별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 그리고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지각의 차원을 깊이 고민했던 작가가 존 카펜터다. <다크 스타> 때부터 그런 것 같다. 오히려 마리오 바바 같은 작가들이 피에 정말로 관심이 많았다. 두 감독의 피의 사용 방식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카펜터는 <괴물>에서 피를 단지 테스트의 용도로만 들여온다. 제작자 래리 프랑코와 존 카펜터가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가장 공들였던 것이 피 혈청 테스트 장면이다. 반드시 잘 찍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고 들어갔던 장면이고, 혹스의 원작엔 없는 장면이다. 공포 영화에선 정말 드문 장면이기도 하고, 카펜터가 피를 쓰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생각이란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카펜터를 사랑하는 비평가들도 버린 <저주받은 도시>(1995)라는 영화가 있다. 어느 날 시간이 정지하고 마을의 여성들이 동시에 임신하는데 태어난 애들이 다 외계인이다. 이 외계인들은 사람들의 생각을 조종한다. <화성인 지구 정복>(1988)에서도 외계인이 우리 생각을 조종한다. <투명인간의 사랑>(1992) 같은 경우도, 나의 존재를 정의하는 나의 생각이 투명해질 때 느껴지는 공포가 있다. 카펜터는 한 축으론 전염에 대해 다루지만 다룬 한 축으론 생각에 대해 다룬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뇌란 무엇인가’라는 주제가 카펜터의 필모그래피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정리: 송은경(관객 에디터) | 사진: 김윤슬(자원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