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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좋은 감독이 좋은 배우의 매력을 최대로 끌어낸 하나의 방식” - 최동훈 감독의 선택작 <가방을 든 여인>

“좋은 감독이 좋은 배우의 매력을 최대로 끌어낸 하나의 방식”

- 최동훈 감독의 선택작 <가방을 든 여인>


오랜만에 친구들 영화제를 찾은 최동훈 감독의 선택작은 발레리오 주를리니 감독의 <가방을 든 여인>이었다. 그리고 2월 14일, 최동훈 감독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아 관객들과 이 영화를 보고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대화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오늘 오신 분들은 이 영화를 극장에서 필름으로 보는 대단한 호사를 누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연배에 따라서는 이 영화를 잘 알고 계신 분들도 많을 것이다. 나도 아주 어릴 때 봤었고, 영화 음악 자체도 워낙 유명한 곡이다. 영화 중간에 주크박스에서 나오는 노래는 우리나라에서 번안해 발표하기도 했었다.

또한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라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배우가 등장하는 작품이니만큼, 그동안 여러 영화에서 여성 배우들을 매혹적으로 담아냈던 최동훈 감독이 들려줄 이야기에 대한 기대도 크다.

최동훈(영화감독)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게 좀 아저씨 같은 느낌이다(웃음).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내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여배우이다. 그녀를 이렇게 장시간 동안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나는 어렸을 때 이 영화를 본 것은 아니다. <도둑들>의 시나리오를 쓰다가 여성을 매력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그래서 좋은 감독들이 여배우들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많이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가방을 든 여인>을 DVD로 처음 보았다. 별 기대는 없었는데 영화가 너무 재미있었고, 이 영화가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를 보여주는 방식에 완전히 매료당했다.

김성욱 특히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천천히 담아내는 장면들이 있는데, 스크린 속 선망의 대상인 배우가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을 거의 커트 없이 보여준다는 것이 너무 매혹적으로 느껴진다.

최동훈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신파적일 수 있는, 센티멘털리즘에 관한 영화다. 내가 그런 걸 은근히 좋아한다. 나는 <타짜>도 도박 영화가 아니라 센티멘털리즘의 영화라고 우기고 다닌다(웃음). 아무튼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너무 좋았다. 처음 카메라의 움직임만 보고도 ‘이 사람은 참 대단한 감독이자 이상한 감독이다’라는 감이 왔다.

지금도 기억하는 장면이 초반에 아이다(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남자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여기서 네 번째 쇼트가 이 영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쇼트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이다가 화면 앞 쪽에서 움직이면 남자는 고개를 못 들고 그녀를 다만 곁눈질로 훔쳐본다. 그리고 관객은 남자에게 이입하게 된다.

또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오페라 「아이다」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다. 그 계단이 한 30미터는 됐어야 하는 건데(웃음). 이 장면에서부터 관객들은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버린다.

김성욱 그러고 보니 <도둑들>에서 전지현 씨가 타월을 두르고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 유난히 길었던 것 같다(웃음).

최동훈 분명 영향이 있다(웃음).

김성욱 지금 언급한 장면도 그렇고, 이 영화의 많은 숏들은 정말 길이가 길다. 그런데 그 장면의 대부분이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걸어가거나 정면으로 다가오는 순간들이다. 그녀의 몸과 움직임을 매혹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인데 사실 거의 모든 감독들이 그녀를 이런 방식으로 촬영했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도 그랬다.

지금 우리 두 사람이 굉장히 아저씨처럼(웃음), 여배우에 대한 감탄만 늘어놓고 있는데 적어도 이 영화를 얘기할 때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에 대한 조롱 중 하나가 그들이 너무 순진해서 이런 강렬한 아름다움의 여배우들을 화면에 담기 두려워했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브리짓 바르도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같은 배우들을 제대로 담아낸 건 주로 미국이나 이탈리아 감독들이었다. 유일하게 고다르만이 브리짓 바르도와 <경멸>을 찍었다. 사실 매력적인 배우들의 움직임이나 매력을 제대로 담아내는 건 감독으로서도 고민이 많을 것이다.

최동훈 나는 이 배우가 천재일 거라 생각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메소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훌륭한 배우라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미인대회 출신이다. 소위 말하는 ‘금발 백치 미녀’ 타입으로 치부되기 쉬운데, 연기하는 걸 보면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가방을 든 여인>은 그녀가 영화계에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출연한 작품이다. 여기서 그녀의 표정이나 몸짓은 계산이 아닌 본능적인 것으로 보인다. 상처받은 여린 여자 같으면서도 이태리 특유의 강인한 여성의 느낌도 있고, 고양이 같은 매력도 보인다.




김성욱 사실 여배우 말고도 이야기할 부분이 무척 많은 영화다(웃음). 조명이나 화면의 명암 대비도 섬세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영화가 나온 게 1961년이니 현대 영화에 속하지만 상당히 고전적인 맛도 있다.

최동훈 일단 흑백촬영이 너무 잘 되었다. 나도 <암살>의 초반 10분을 흑백으로 하려고 했었는데 흑백을 아름답게 구현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는 걸 그때 느꼈다. 그리고 나는 숏을 굉장히 많이 나누는 편인데, 이 감독은 쇼트를 많이 나누지 않고 배우의 동선을 아주 편하게 확보해 주는 느낌이다. 긴 테이크 안에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인데, 자전거 씬의 롱테이크도 너무 좋았다. 남녀 배우 두 사람의 얼굴만 나오는데도 스펙터클이 느껴질 정도로 재미있었다.

이 감독의 다른 영화 중에 알랑 들롱이 나온 <인디언 섬머>(1972)라는 작품이 있다. 그 영화에서도 알랑 들롱이 걷는 걸 심각하게 오래 보여준다. 배우가 걷는 것에서 매력을 발견하는 감독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식으로 아주 느리게 무언가를 찾아가는 느낌의 영화를 보기가 힘들어졌다. 배우의 매혹보다는 긴박한 상황과 서스펜스로 영화를 끌어가는 경향이 지배적이기도 하다.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더럽혀졌던 정신을 맑게 해주는 영화였다.

김성욱 한편으로는 관객에게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 같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물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충분히 관찰하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관객 1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같은 배우가 화면에 나와 있기만 해도 한 편의 영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아까 감독님이 요즘은 그런 영화가 나오기 힘들다고 말씀하셨다. 그처럼 탁월한 배우가 흔치 않아서인지, 아니면 요즘 관객이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지 궁금하다.

최동훈 요즘은 저 시대처럼 훌륭한 배우가 나오지 않는 게 아닌가, 란 생각도 솔직히 해 본 적 있다. 오드리 헵번이나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같은 배우가 지금 시대에 있는지 물어보면 솔직히 나도 답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다른 매력의 사람들은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계에 어떤 흐름이 있고, 99퍼센트의 감독은 그 흐름을 따라간다고 본다. 그 시대의 영화들을 보면 저 영화들이 배우들을 더 존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를 찍을 때 ‘내가 저 배우를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가?’ 라고 스스로 물어본다. 그때 긍정적인 답이 나오지 않으면 작업을 열정적으로 하기 어렵다.

나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옛날에는 서사와 구조 같은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배우의 매혹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시간이 몇십 년 흐르면 영화의 서사는 잊혀져도 배우의 매혹은 퇴색하지 않는다. 점점 그런 걸 더 많이 느낀다. 확실히 60~70년대 영화들에 그런 경향이 강했다. 반면 1980년대부터는 <E.T.> <죠스> 같은 영화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배우를 보여주는 영화들이 가끔 나온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나 스웨덴판 <렛미인> 같은 영화는 정말 좋았다.

관객 2 아이다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문 잠그기나 끊임없이 맹세를 시키는 등의 행동이 진지하면서도 웃음을 유발하는 측면이 있다. 만약 아이다를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어땠을까?




최동훈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아니면 이런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웃음).

한국은 코미디를 굉장히 좋아하는 한편, 거의 집단무의식적으로 코미디를 경멸하는 나라다. 그래서 코미디를 하는 배우를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고 코미디 연기로는 상을 받기도 힘들다. 하지만 남을 웃기는 건 번뜩이는 천재적 아이디어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 영화가 드문드문 웃기기 때문에 더 좋은 영화라고 본다. 감독이 선택한 방식이 아주 효과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반복적인 행동들이 처음에는 코미디 장치로 쓰이지만 나중에는 ‘맹세해’ 장면과 같은 절박함을 만들어낸다. 같은 장치를 반복해서 쓰면서 각 장면마다 사용 가치가 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게 연출의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감독이 굉장한 내공의 연출가라고 생각한다.

김성욱 처음에도 말했지만 오늘 오신 분들은 배우의 매혹을 스크린으로 경험하는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최동훈 감독 본인도 지금의 영화 환경에서 꾸준히 여배우의 매력을 스크린에 탁월하게 담아왔기에 더 의미가 깊다. 마지막으로 최동훈 감독의 근황을 듣고 싶다.

최동훈 <암살>은 오래전부터 너무 하고 싶었던 작품이라 끝나고 나니 약간 멍해지는 것 같다. 데뷔 때부터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지금은 어처구니없게 웃긴 영화를 해 보고 싶다. 최근 TV에서 <전우치>를 다시 봤는데 ‘내가 저 때는 미쳤었구나, 저걸 어떻게 찍었지’ 싶더라. 그런데 요즘 그때가 또 막 그리워지고 있다. 다시 그런 얼빠진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서 요즘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 영화제에도 못 가고 상도 못 받는(웃음), 그러나 재미있고 매력적인 영화를 찍고 싶다.

김성욱 또 다른 기회에 최동훈 감독이 추천하는 색다른 영화들을 두고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 오늘 자리해 주신 최동훈 감독과 관객 분들 모두 감사드린다.

정리 장윤정 자원활동가

사진 장혜진 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