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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상영작 소개

시네마테크 사태로 본 <이유없는 의심>과 <오데트>

'납득할 수 없음'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심하고 말하기, 그것에 충실하기

 

[이유없는 의심(Beyond A Reasonable Doubt)]

의심이란 합당한 근거가 없이 시작되는 것이다. 조안 폰테인은 영화에서 참회하는, 고백하는 여자이다. 그녀는 백치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감독들은 저마다 그녀의 얼굴 정면 클로즈업을 결정적일 장면에 넣는다. 그녀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백짓장 같은 무언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반사된다. 존재하지 않는 상태는 스스로를 견딜 수 없다. guilty한 느낌 혹은 그것에 관련된 텍스트가 우리에게서 생성된다. 그녀는 한 마디의 변명도 안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녀의 죄를 용납했다. 무언의 고해성사.

 

이 영화에서 그녀는 자신의 애인인 캐럿의 죄를 알고는 교도소에 전화를 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쓰러진 채 괴로워 한다. 여기서 장면은 끝난다. 그러나 이어 주지사의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오는 장면.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 그녀가 찾아간 경관이 말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그녀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진실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이 결정적인 장면에서 화자는 없다. 지금까지의 일련의 사건을 알고 있는 관객이 조안 폰테인을 대신한 무언의 화자가 된다. 우리가 일러 바치는 것이다. 그녀는 완전히 우리를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그녀는 캐럿의 편에 선 유일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아버지와 사형 제도를 반대하기 위한 작전이었다는 것)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 캐럿이 약혼을 연기한 것은 작전 수행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이것 때문에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지금까지의 캐럿과의 관계에서, 그에 관하여 알고 있는 상식 선에서 이해될 수 없는 행동들이 계속되고 그녀는 점점 그의 말을 점점 더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 관객은 그녀의 편이 아니다. 지금까지 캐럿은 국가 사회의 중요한 문제(사형제도의 문제)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반전은 영화가 다 끝났다고 여겨지는, 법망을 완전히 빠져나오기 직전, 법의 구속력이 다하기 불과 몇시간을 남겨둔 채 잠시 집에 들린 시간에 발생한다.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면ㅡ자신이 완전히 죄를 은폐시키는데 성공했다고 여기면ㅡ그토록 감추려했던 진실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닌 것처럼 맥을 못춘 채 풀려 나온다. 영화 시간 내내 우리를 선의인 양 속인 캐럿이 너무나 쉽게 스스로의 죄를 흘릴 때 폰테인의 의심에 싸인 채 감옥 밖에 서있던 얼굴이 환기된다. 우리는 그 때, 캐럴의 편(감옥 안)에 선 채 자신의 무고함을 위해 선뜻 나서지 않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어하거나 혹은 원망했다. guilty함이 우리편에서 발생되는 것이다. 그녀의 의심에 대한 근거의 실체가 영화의 말미에 드러날 때, 우리는 의심이란 애초에 근거 없이 시작되는 것이고, 그 끊임없는 의심이 근거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오데트(The Word / Ordet)]

영화의 시작 전, 늘 활기차고 목소리가 명랑해서 강한 인상을 남기는 관객이 대표로 나와 관객모금운동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시네마테크를 비석화, 묘지화하지 않으려면 영화의 힘을 믿는 관객들이 일어서자고 했다. 영화는 그러한 생명력이 있는 것임을, 그러므로 그러한 영화는 늘 현재인 것이야만 한다고 말했다. 말은 객석에 우렁차게 퍼졌다. 그 순간 굉장히 감동적이었는데, 이 감동은 영화 <오데트>를 보며 배 이상으로 확장되었다. 이어 시네토크에서 홍상수 감독의 '충실한 태도'에 대한 말에 이르자 이 오래된 영화를 관에서 일으켜 삶의 기운을 불어 넣는 기분마저 들었다. 영화의 엔딩에서 살아난 잉거가 남편의 얼굴에 키스할 때, 처음으로 그녀의 입김이 나에게 전달되는 느낌이 들었다. 필름효과일까. 뺨을 스치는 뜨거운 열기. 그리고 '삶, 삶'이라고 말하는 말. 아픈 후 막 깨어났을 때의 그 미세한 고통의 열기마저 느껴진다. 지끈 지끈한 머리, 혼미한 상태의 정신 상태에서 붙잡고, 느끼려는 삶의 촉수. 그리고 나서 내 아픈 육체의 입김을 불어넣어 나의 실존을 알리고 싶은 욕구.

 

잉거가 죽은 시간은 집안의 시간이 멈춘 시간이었다. 그녀가 살아나고 나서야 시간을 작동한다. 죽음의 시간과 삶의 시간. 드레이어는 느리게, 느리게, 가로로, 더 가로로 시간을 늘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말과 행동이 느린, 그럼으로서 가장 긴 시간을 잡아 먹고 있는 인물은 요하네스이다. 정신의 활동성이 정상을 벗어난 자는 아주 빠른 속도를 보이다가 어느 순간 멈춰버린다. 멈춘 것의 반복 재생. 요하네스는 걸어다니는 성경 텍스트처럼 집안의 모든 상황에 대해 말씀을 선포한다. 영화에선 그의 대사만이 문어체이다. 재단사이자 목사인 안느의 아버지가 설교를 할 때 그곳에 모인 신자들의 눈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그것은 비실재하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이 선언되고 그들은 그 선언을 경배한다. 반면 베르거 집 안의 경우는 다르다. 이 집에서는 요하네스가 말을 선언하지만 가족들은 시종일관 무시한다. 가족들의 구어(口語)와 요하네스의 문어(文語)가, 살아있는 말과 죽은 말이 충돌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요하네스가 말하는 내용(예수의 말)은 끊임없이 죽어있는(가는) 것에 대한 호소이다. '내가 지은 교회에는 아무도 오지 않고 너희 각자가 집을 짓고 있구나. 그렇기에 너희는 떠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생명을 주러 왔는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라는 말을 할 때 그의 요지는 '살아있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것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 결과 죽음을 숭배하는 현상에 이른다.

 

종교는 삶을 위한 것인데 종교인들은 죽어가는 것을 경배하는 역설을 실천한다. 종교의 경건함은 삶을 경직되게 만드는 형식적인 것으로 자리 잡고 이 경직성은 실천적 행동, 즉 화해, 용서, 사랑같은 삶을 위한 가치의 실천을 불가하게 만든다. 광야에서 마치 자신의 정신 이상의 원인인 키에르케고르의 '신 앞에선 단독자'처럼 말을 외치던 요하네스가 죽음이 이른 집에 들어와 손하나 대지 않은 채 오직 말씀의 언어로만 그녀를 일으킬 때 그것은 기적이었다. 영화에선 의사는 물론이고 목사마저 기적을 이미 구약시대의 신화처럼 치부한다. 살아있는 것이 살아있었던 것이 될 때, 즉 시간성을 부여받을 때 살아있었던 것은 죽은 것이 된다. '살아있는 것'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구제하는 일, 그것에 그 말 그대로의 속성(영원한 생명성)을 부여하는 일, 그것이 지속적인 믿음(신앙)이다. 이것이 홍상수 감독이 말했던 영화에 대한 '충실한 태도'이다. / 김시원(영화비평웹진 '네오이마주'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