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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스튜디오 다이에 특집: 마스무라 야스조와 이치카와 곤

[스튜디오 다이에 특집-시네토크] 마스무라 야스조의 여성과 젠더

[특집 : 스튜디오 다이에 특집]


마스무라 야스조 영화의 여성과 젠더

- 황미요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시네토크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은 일본의 “아이치국제여성영화제”에서 열렸던 마스무라 야스조에 대한 사이토 아야코 선생의 강의와 내가 함께 참여한 대담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오늘은 와카오 아야코와 마스무라 야스조가 함께 작업한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젠더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와카오 아야코는 1930년에 태어났고 50년대부터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 다이에 영화사에서 데뷔를 했고 대부분의 커리어를 이 스튜디오와 함께했다. 70년대 이후에는 텔레비전이나 연극 무대에서도 활동을 했고 2005년, 18년 만의 복귀작으로 화제가 된 <봄의 눈>을 찍었다. 한국에서는 마스무라 야스조와의 협업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작가주의적 영화에만 출연한 배우라는 인상이 있지만 사실은 전형적인 스튜디오 시스템의 여배우 중 한 명이다.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은 다이에에서 미조구치 겐지와 이치카와 곤 감독의 조감독으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다. 마스무라 감독이 미조구치 감독의 조감독으로 있을 때 와카오 아야코의 연기 교육을 맡으면서 둘은 처음 만났다. 이후 마스무라 감독이 이탈리아로 영화 유학을 갔다온 뒤 <명랑소녀>를 연출하며 와카오 아야코를 기용한 것이 둘의 첫 번째 본격적인 협업이다. 그 이후로 20편 정도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보통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에 대한 비평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일본 영화의 모더니즘, 특히 ‘개인’을 그리는 방식에 대한 주목이다. 마스무라 감독이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당시 소시민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던 이마이 다다시와 나루세 미키오를 비판한 것은 유명하다. 그때 그는 근대적인 일본의 인물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여성, 젠더 재현의 문제다. 특히 와카오 아야코와 함께한 영화들이 그렇다. 영화에서 남성 감독에 의한 여성 재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일단 여성 재현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연구는 70년대 로라 멀비에 의해 이루어졌다. 로라 멀비의 논문의 핵심은 영화에서 재현되는 여성이란 것이 실제 여성과는 상관이 없고 굉장히 개념적이라는 것이다. 여성을 보는 카메라와 남성 감독의 시선, 그리고 남성 관객의 시선이 정확히 일치할 때 발생하는 쾌락은 재현된 여성을 남성 주체의 시각적 쾌락에 굴복시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쾌락의 대상으로 여성을 재현할 때 그 여성은 실제적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적 여성이다. 로라 멀비의 연구에 의하면 영화에서 발생하는 쾌락은 무성화된 쾌락이 아니라 젠더적 쾌락이다. 구조적으로 카메라와 관객은 남성의 위치에 있는데, 실제로는 여성 관객도 영화를 본다. 바로 이때 질문이 발생한다. 과연 여성 관객의 자리는 없는 것인지, 영화를 볼 때 여성 관객은 남성화되는 것인지, 아니면 여성 관객의 쾌락은 제거당하는 것인지에 대해 말이다. 이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고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주인공이 전면에 등장하고, 여성 관객이 상대적으로 많은 멜로드라마에 특히 집중을 했다. 페미니스트들이 멜로드라마를 연구할 때 기본적으로 두 가지 것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는 작품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잘 전달해 수용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그 작동 방식을 밝히는 것이다. 이때 후자에 집중하는 연구자들은 관객들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수동적으로 단순하고 매끄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부정한다. 실제로 여러 가지 균열들이 텍스트에 나타날 뿐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어떤 저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멜로드라마를 연구할 때는 또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 가령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에는 압도적인 여성상이 등장한다. 아시아의 멜로드라마를 보면 서구에 의한 근대화 과정에서 상처 입은 남성성이 등장하는데, 이때의 여성 재현은 남성 트라우마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즉 식민 경험을 통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남성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여성이 대리한다는 것이다(서양의 근대 문물에 심취한 여성들이 매혹의 대상으로 그려지면서도 결국 처벌당하는 영화들을 보자). 하지만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는 그런 식의 여성 재현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그의 영화에서 여성들은 자기 희생적이지 않다. 특히 와카오 아야코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삶에 불만족하는 상태이고 거기에서 탈출하고 싶어하며, 이는 자신이 동경하는 사랑을 발견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자신의 정념을 투사할 수 있는 대상을 향해 돌진한 후 파괴적인 결말을 맞고는 한다. <아내는 고백한다>, <세이사쿠의 아내>에서도 외로웠던 여자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가 진짜 사랑을 만났을 때 파괴적 결말을 맞는다. 이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자기희생적인 여성상과는 다른 여성상이 나오는 것이다.


다시 근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마스무라 야스조가 생각한 근대는 서구적이라는 것과 복합적으로 연결된다. 남성 지식인들이 열망하는 근대는 서구와 연결되고 그 이전의 전통과는 결별하는 어떤 것이다. 이때 마스무라 야스조가 생각한 모더니즘의 핵심은 ‘개인’이다. 그 개인이라는 것은 제도나 전통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스무라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비판한 것인데, 즉 소시민이 역사와 사회 속에서 운명을 감내하는 모습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스무라 야스조는 제도, 사회적 억압의 반대편에 있는 ‘근대적 개인’을 이야기한다.


<아내는 고백한다>를 보자. 마스무라 야스조에게 일본 영화의 남성은 제도를 상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 남성은 제도에 저항할 힘을 잃은, 열등감에 휩싸인 역할이다. 젊은 남자인 고다도 그렇고 아야코의 남편도 그렇다. 남편은 굉장히 자신감이 없고 비뚤어진 방식으로만 사랑할 수 있는 열등감을 가진 인물이다. 아야코가 아기를 낳는다고 했을 때 아기를 키울 수 없다고 얘기하는 무력한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권위적이고 포악해 보이지만 사실은 열등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물인 것이다. 고다 역시 사회적 인식과 법 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이다. 이 두 남자, 그리고 일본의 억압을 대표하는 재판정의 검사는 모두 일본의 남성성을 대표한다. 이들이 아야코를 억압하는 것이다.



반면 아야코는 트라우마에 빠진 남성이 추구하지 못하는 개인적 욕망을 대리한 채 내달리는 인물이다. 가장 비제도적이고 비사회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사랑이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섹슈얼한 사랑이다. 마스무라 야스조에게 일본의 근대적 개인을 보여주는 것은 사랑이라는 욕망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화 과정에서 제도에 의해 거세된 남성의 트라우마를 대리하는 것이 여성이 되는 것이다. 와카오 아야코가 연기하는 여성들이 근원적 외로움, 불만족에 시달리는 원인은 개인을 억압하는 제도인 결혼 때문인 것으로 종종 드러난다. 그런 불만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다가 자신의 욕망을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전통에 맞서는 급진적인 의미의 근대적 개인이라고 마스무라 야스조는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구도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보면, 사실 여기에도 여성의 자리는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영화 속의 여성은 실제 여성을 상징한다기보다는 남성 트라우마의 재현일 뿐이다. 여성을 숭배하거나 정면화하는 것도 사실은 남성 트라우마나 비남성화된 남성성에 대한 혐오감과 관련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남성성은 여성성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또한 이런 여성성에 대한 개념은 개념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여성들이 이를 스스로 내면화하게 만든다. 여성들이 ‘여성적’인 개념을 인식하고 내화한 채 그것을 연기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이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여성이 남성에 의한 타자, 혹은 남성 트라우마를 재현한다고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거기에 균열을 만드는 순간이 발생한다. 와카오 아야코는 인터뷰 등에서 감독의 의도에 맞는 연기를 했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영화를 찍는 것은 여배우와 감독 사이의 전투라고 한 적이 있다. 실제로 <아내는 고백한다>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와카오 아야코가 음독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아야코가 비틀대며 화장실까지 걷는 것이 감독은 느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 번 재촬영했다고 한다. 하지만 와카오 아야코는 계속 자기가 생각한 속도로 걸었고 결국 그 연기가 영화에 들어갔다. 그녀는 이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는듯, 이 에피소드를 여러 번 이야기했다.


관객, 카메라, 감독의 남성화된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여성들이 움직이는 것은 어떤 힘을 발휘한다. 또 하나 인상적인 신체 움직임이 있다. 카메라가 와카오 아야코의 몸을 클로즈업으로 훑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일차적으로는 물론 여성의 신체를 파편화시키는 방식이다. 그런데 카메라가 발 쪽으로 갈 때 와카오 아야코가 움찔하면서 자신의 발을 숨긴다. 이 장면은 여배우가 연기할 때 자신이 어떻게 대상화되고 있는지 스스로 인지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아야코의 신체가 경계에 있다가 광기에 가까운 육체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유령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사회적 균형 체제에서 분화되어 그 바깥에 위치하는 순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더 이상 사회 제도 안에 머무를 수 없는 신체로 그려지는 것이다. 예전에 그 장면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 와카오 아야코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했고 별도의 디렉팅이 있었던 장면도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장면은 감독이 의도한 내러티브의 기능을 여배우가 벗어나는 순간인 동시에 관객 또한 순간적으로 영화를 빠져나와 카메라의 시선을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한편 고다의 약혼자인 리에도 재미있는 기능을 한다. 리에는 아야코의 욕망의 세계와 고다가 끝내 벗어나지 못한 제도적 세계 사이를 오가는 인물이다. 개념적인 남성 캐릭터보다 트라우마를 가진 여성이 제도와 상징 질서를 벗어날 수 있는 더 큰 가능성을 갖고 있을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리에도 아야코를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아야코의 욕망을 이해는 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데 영화에서 아야코가 리에를 바라보는 짧은 장면이 있다. 리에를 보는 이 순간, 아야코는 제도적 사회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이때 리에는 남성 트라우마의 대리인으로서 와카오 아야코의 캐릭터와 단적인 대조를 보인다. 마스무라 야스조가 급진적인 성격의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키지만 동시에 그 반대편에 있는 리에를 등장시켜 서로의 반대편에 위치시키는 이런 면이 <아내는 고백한다>를 페미니즘적인 영화로 읽는 것을 망설이게 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와카오 아야코가 실현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이다. 아야코의 자살을 보는 의견은 서로 다를 수 있다. 가장 큰 형태의 저항으로 볼 수도 있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없는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도 있으며, 그것도 아니면 검사가 계속 강조하듯이 남편이 죽은 상황에서 아내가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갖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이 죽음을 사회적 질서 안으로 재봉합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점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앞서 설명한 와카오 아야코의 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잠깐씩 사회 질서를 뛰어넘는 것처럼 보였던 이런 장면들이 감독이나 영화가 의도했던 것과 달리 관객들이 영화를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는 것이다. 그런 장면들이 있기에 이 영화가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정리│송소연 자원활동가 / 사진│김윤슬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