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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스튜디오 다이에 특집: 마스무라 야스조와 이치카와 곤

[스튜디오 다이에 특집] 다시 마무스라 야스조의 영화는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특집 : 스튜디오 다이에 특집]

다시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를 생각한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는 사회적 규범에 대항하는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으로 인간의 생명력의 풍부함을 농밀하게 표현하고 그들의 에너지를 찬미한다. 개인의 생의 문제가 국가나 군대, 사회와 규범 등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 저항해 인간의 욕망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표현하고, 생의 의지와 욕망을 따르는 개인적인 존재로서의 인물을 영화 속에 그려내는 것이다. 그동안 몇 차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를 상영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이번 호에서는 그 동안의 논의를 정리해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에 나타나는 개인, 여성성, 그리고 공동체성의 문제들을 살펴본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는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오시마 나기사는 마스무라의 영화가 나왔을 때 “이것은 돌파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지금 시점에서 마스무라의 영화를 보는 것은 그동안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작가와 배우를 만난다는 의미와 함께, 이것이 일본영화사에서 어떤 돌파구로 작용했으며 현 시점에도 여전히 돌파구로 작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내포한다.


일본 영화계의 고전적 전통 중의 하나는 욕망의 표출을 억제하는 경향이다. 마스무라의 영화는 이러한 전통과 결별하는 기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 현대영화의 계보 안에서 마스무라 야스조가 지닌 존재의 무게는 1960년대 초에 발흥한 일본식 누벨바그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과 그 세대 감독들과 함께 미묘하게 상이한 방식으로 유사한 주제들을 공유하는 영화들을 만들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에게는 하나의 전통을 형성해 온 ‘일본 영화’라는 문맥 자체가 거부의 대상이었다. 인간성이니 운명론이니 하는 안이한 관념을 기반 삼아 형성된 이야기들, 그리고 일본 영화와 일본 사회의 가능성을 옥죄는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이때의 개인이란 모든 것에서 떨어져 나온 한 개체가 아니라, 조직과 집단과 사회와 구조와 틀이라는 어떤 관계 안에 있는 개인이었다.


이러한 생각에는 기성의 일본 영화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비판이 담겨 있다. 가령, <남편은 보았다>(1964)를 두고 마스무라는 “나는 이 작품으로 곤충이나 모래를 그리지 않았다. 인간을 그렸다”고 말했는데, 이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일본 곤충기>(1964)와 데시가하라 히로시의 <모래의 여인>(1964)을 빗대어 한 말이다(1963년 『키네마준보』의 베스트 10의 1위는 <일본 곤충기>였고, 1964년의 1위는 <모래의 여인>이었다. 반면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는 이 시기 『키네마준보』의 베스트 10의 목록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마스무라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또한 비판했다. 그는 구로사와의 영화가 정밀하게 계산되어 만들어진 근대 건축의 인상을 준다며, 그러나 이 작품이 근대 건축의 결점 또한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깊이에의 결여로, 그의 작품에서 깊이가 부족한 것은 사상성과는 관계없이 그 지성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구로사와 영화에서 여성의 묘사는 남자의 경우와 비교할 때 지극히 졸렬하다며 여자를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것은 여자가 애매하고 심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라 했다. 마스무라는 그런 애매함을 싫어했고 그러므로 예술의 특징인 개방성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마스무라 야스조가 일본 영화의 전통을 비판하며 새롭게 제시한 그의 기획이 <아내는 고백한다>(1961)에서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가령 로프와 매달린 사람의 수직적 구조가 그것이다. 중간에 매달린 여자를 중심으로, 위에는 기어 올라가서 만나야 할 젊은 남자가 있고 아래에는 그녀의 남편이 매달려 있다. 수직적인 선이 되는 로프는 그래서 여자에게는 하나의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로프에 매달린 것은 생명과 연관되는 동시에 자신을 옭죄는 올가미인 셈이다. 마스무라가 주목한 것은 그 수직의 선에서 무엇을  끊어낼 것인가이다.



이 영화는 지극히 심플한 직선적인 이야기로 영화적 드라마의 속도감이 대단하다. 마스무라가 혁파하려 했던 것은 일본 영화의 유산이기도 한 특유의 느린 시간 감각이다. 이 영화에서 속도감을 부여하는 그만의 방식은 문제를 회피해 결코 돌아가지 않고 주제와 직면해 직선적인 사건을 전개하는 것, 휴지부 없이 사건의 밀도를 높여가는 장면들의 연결(그의 작품 대부분은 90분 내외의 러닝타임을 지녔다), 단순한 공간의 활용(법정의 공간), 그리고 인물의 격정적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인물의 격정적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그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이나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이탈리아적인 정념을 일본 영화에 도입하려 했는데, 그 특징은 ‘이탈리아인의 정열은 굴절되거나 도착되지 않는다’는 한 줄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적인 것, 그것은 에로틱한 것이다. <아내는 고백한다>에는 ‘사랑한다면 죽일 수도 있다. 죽일 수 없다면, 죽을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과격한 테마가 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가? 사람을 죽이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이율배반적인 것인가?’라는 여인의 항변에 주목해  영화 전체가 흘러가는 구조다.


그리하여 그의 영화에서 사랑과 죽음은 분리 불가능한 상태로 펼쳐진다. 이는 일종의 질문인데, 이 질문이 제기되는 방향이 어디인가에 그 중요성이 있다. 이 영화에서 로프를 끊게 되는 순간에 여자가 느낀 것은 진정으로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죽이는 것과 사랑을 깨닫는 것이 같은 순간에 벌어진다. 뭉개지고 절단난 남편의 시체를 바라보는 것과 삶과 생으로 충만한 젊은 남자에의 열망이 대조된다. 시체, 죽음과 마주한 이후에 남아있는 여자의 삶에의 데카당스적 열망. 이는 전후의 영화라는 환경에서 시체들과 마주한 인간의 에너지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그 에너지는 곧 사랑, 욕망과 열망이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가장 에로틱한 것이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에서 보이는 여인의 열망과 정념, 순수함과 결과적으로 그녀가 걸어야만 하는 가시밭길은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그는 미조구치 겐지의 조감독 출신이다). 특별히 그의 영화에서 와카오 아야코가 연기하는 여인이 겪어야만 하는 가혹한 처벌은 사회의 구조가 다양한 시선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내는 고백한다>에는 그녀의 순수한 행동에 최악의 의미를 부여하는 다양한 질투의 시선, 불순의 시선이 있다. 신문기자, 배심원, 판사의 눈이 그러하다. 여기에는 또한 그러한 시선에 대항해 내부로 닫힌 시선이 있다. 즉, 여인의 맹목의 시선. 결국 사랑은 눈먼 것이다. <아내는 고백한다>, <세이사쿠의 아내>(1965)에서, 그리고 <눈먼 짐승>(1969)에서 내부로 닫힌 맹목의 시선은 그 어떤 사회적 규범도 열정으로 돌진하는 여인에게 브레이크를 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눈먼 짐승>은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계를 응축해서 보여주는 영화라 하겠다. 촉각적이고 표피적인 것에 몰두하는 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예술가의 눈은 멀게 되고, 이는 맹목적인 여성의 형상과 닮아있다. 눈멈과 맹목성. 표피적인 피부성과 촉각성. 눈이 먼 상태에 빠진 인물들의 사랑에의 맹목성. 이는 단순한 이야기의 설정이 아니라 행동과 연기에서의 물리적이고 촉각적인 표현을 동반한다. 가령 <아내는 고백한다>에서 와카오 아야코의 비에 젖은 머리, 조금 까매진 양말, 진흙을 밟고 걸어온 듯한 여인의 느린 발걸음, 그녀의 손끝과 얼굴. 그녀는 “내 몸이 얼마나 야위었느냐”며 남자에게 자신의 몸을 만져볼 것을 원한다.



마스무라 야스조가 주목했던 것은 부부, 가족, 사회, 국가라는 관계에서 대충 타협하고 양보하는 인간이 아닌 그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며 저항하는 인물들이다. 군대와 징병 시스템, 성을 둘러싼 가족주의적 규범, 개인의 자유를 옥죄는 사회적 규범에 대한 이의제기로 마스무라는 개인을 내세웠다. 인물이 한 명의 개인으로서 등장하는 지점은 그러나 그녀의 내부의 에너지가 분출되어 나갈 때이다. 마스무라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가 환경이 낳은 비극적 운명을 강조해 도리어 사람들을 체념의 상태로 몰고 갈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반대로 그가 내세운 것은 에너지의 영화다. 그는 억제와 체념과 순응의 정서 안에 갇혀 있는 인물 깊숙한 곳에서 언젠가 분출을 기다리는 강렬한 에너지가 꿈틀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변이 지점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영화가 <섹스 체크>(1969)이다. 힘과 에너지를 갖게 되는 몸, 성차의 문제, 그 변이의 과정들이 하나의 주제나 테마, 혹은 소재처럼 작동하는 영화다. 마스무라는 그것을 가정 내의 공간까지 끌어온다는 점에서 선구적이다. 이런 에너지, 힘들의 격돌을 무엇보다도 영화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것이 마스무라의 역량이었다.


마스무라의 영화가 현재 어떤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마스무라의 영화가 갖고 있는 현대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사회성을 잃어가는 영화들, 어떤 관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터무니없는 개인을 다루는 영화들과는 달리, 마스무라의 영화는 사회적 밧줄에 얽혀 있는 인물들에게서 욕망을 긍정하고 개인성이 출현하는 지점을 그려내려 했다. 이를 데카당스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격렬한 에너지에서 영화의 활력을 뽑아내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다. 현실에서 그러한 것들이 용납되지 않을 때, 그것을 존재시키기 위해서 영화를 성립시켜 나가는 기획.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적 기획은 여전히 효력을 잃지 않고 있다.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