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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상상 이미지 속에서 찾아 헤매는 자아상

[영화읽기] 김정 감독의 <경 Viewfinder>


김정 감독의 신작 <경>(viewfinder)은 다소 딱딱한 어투와 고도의 지식적 틈새를 이용하여 초반부터 스스로의 범상한 입지화를 거부하는데, 보는 이들에겐 어느 순간부터 신기하게도 이러한 난해함들이 방해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고전의 '거리'와 사이버 '세계'와 애니메이션의 '무대'를 상상적으로 넘어다닐 때 영화는 그것에 명확한 인식의 경계점을 긋지 않는다. 이것은 포스트모던한 사고라고도 볼 수 없다. 영화는 현대 사회에서의 통로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절망하는 회유적인 정서를 깊게 깔고 가지만 그 비관적인 것을 결코 시선화하거나 확대, 재생산하지 않는다. 정서는 쓸쓸하나 그것을 담아내는 시선은 결코 관조적이지 않다. 이것은 영화 미학적인 실험이 목적인 영화가 아니다.
 

영화의 오프닝, 남강 휴게소의 간판이 보인다. 어둔 밤 고속도로 위의 한 차에 실려 그를 따라가던 카메라가 2차선 도로에서 깜박이등을 켜며 서서히 속도를 멈춘다. 순간적으로 헤드라이트 앞에 개 한 마리가 보이고 옆으로 같은 색의 비슷한 차가 무서운 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함께 달렸으면 몰랐을 괴물적 속도가 상대성의 원리로 재현될 때 이 흰 색의 차와 개에 투영된 우리의 근심은 마치 우리 자신에게로 전도되는 듯 하다. 차에서 내린 젊은 여자가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고 나서, 불도 켜지 않은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다 뒷문을 열고는, 남강의 풍경을 향해 걸어들어간다. 새벽의 풍경은 검지도 밝지도 않은 적막한 푸른 색이다. 이 어둠 속의 디지털 촬영기술의 미세함,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재현될 때 보는 자로서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날이 밝아오자 여자는 모자를 쓴 안내원들이 일하는 관광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인터넷으로 아르바이트 정보를 검색한다. 다시 길을 나서던 여자는 남자 '창(window)'과 우연히 스쳐지나간다. 이 '창'이란 이름의 남자는 IBM 노트북 하나가 전 재산인, 그야말로 디지털 유목민같은 행색을 하고 있다. 영화는 이 남자를 등장시키면서부터 종종 그의 관망적인 나레이션을 인서트하면서, 영화 자체를 마치 웹의 공간에 타이핑하는 듯이 밖으로 완전히 빠지는 프레이밍을 보이기도 한다. '창'을 통해 이 영화 자체를 window 시스템과 같은 '매체'로 다루려는 의식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 종종 투영되기도 하는데 그의 혼잣말에 가까운 '대화', 혹은 이미지 프로그램을 이용해 사진 작업을 하는 여자가 인터뷰라는 명목상으로 진행하는 인터뷰에서 보이는 인터뷰이들의 '혼잣말(고백)'등에서 그러하다. 영화의 모든 대사는 타자(대상)가 없는 상태에서 오직 뷰파인더와 자신과의 대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자의 이름은 전경(前鏡)이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49제 후) 집을 나간 동생 후경(後鏡)을 찾아 나선다. 전경은 초반 휴게소에서 스친 전직 에니메이터이자 현 사이버 퇴마사를 자칭하는 남자와 이후에도 몇 번을 인상적으로 스쳐가고, 그녀가 찾는 후경과도 우연히 스쳐지나가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의 아이덴티티(ID)가 없는 상태로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영화는 디지털을 이용하여 사람의 자취를 찾는 것의 맹점에서 헤매인다.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는 여자의 경우도 그러한데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 속 아바타와 소통하며 CMA통장까지 만들어 언젠가 이 도시를 벗어나 함께 아시아 하이웨이를 타고 새로운 세계로의 이주할 꿈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무언가를 찾고자(find) 그것을 들여다보고(view) 있다. 하지만 PC, 핸드폰, PDP, 네이게이터의 화면을 통해 찾으려는 사이버상의 좌표들은 찾는 자의 아이덴티티(ID)를 먼저 묻는다. 아이디가 없으면 말해주지 않는 진실들. 그것을 위해 만들어지는 가상의 아이덴티티(ID). 그 가상에게 전달되는 가상의 정보. 그들이 실제로 서로의 지표를 확인하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부조리한 현상들. 영화는 아이덴티티를 확인받지 못한 채 정착하지 못하는, 안정된 위치를 결코 확보하지 못하는 메트로시티 속 현대인들의 고독, 그들의 정처없는 좌표를 그린다.
 
무엇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경(viewfinder)의 view+finder라는 단어 자체의 결합성. '보는 것(view)'과 '찾는 것(find)'의 결합. 거울(鏡)의 실재계와 상상계. 전경(前鏡)과 후경(後鏡). 결국 상상 이미지 속에서 찾아 헤매는 자아상. 마치 차이밍량의 영화를 떠올리게도 만드는 정체성이 부유한 상태에서 또 다른 곳에 존재할지 모르는 정체, 혹은 존재했었던 기원성의 정체를 찾는 행위로서의 영화. 고독과 불소통과 각자의 '창'에 갇힌 인물들. 그 '창'은 그들이 몸에 장착한 채 그들이 찾는 정체성과도 같은 경은 finder로서의 viewer가 아니라 결국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이미지 거울같은 폐쇄적 창일지 모른다. 멀리 간 것 같은데 결국 돌아 다시 그 자리. 마치 자크 타티 영화의 거대한 교차로에서의 차들의 운동처럼 온통 거리로 나온 차량들의 트래픽 상태에서의 원형운동. 영화는 멀리 나아갈 듯 하다 막힌 지점에서 늘 턴을 한다. 정지, 그 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돌기, 전진과 후진. 들어가고 빠져나오고 창을 열고 스스로 창을 닫고 나온다. 스스로 충전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 늘 충전하러 들러야만 하는 휴게소, 충전소, 웹의 공간. 그곳들의 인간 군상. 구심점 없이 떠돌아다니다 아시아 하이 웨이로 들어서는 도로에서 일직선으로 늘어선 밤의 자동차들. 그들의 행렬. 그 곳은 또 다른 세계를 열리게하는 길목일까.

디지털 유목민. 도시의 플라네르(flaneur). 구경자(영화사 '구경'의 첫 작품)로서의 인물들은 과거로부터의 죽음을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절망의 현재를 벗어나려 미래의 세계를 재탐색하려는 듯 끊임없이 리셋(reset)하며 스스로를 새롭게 디자인하는데 몰두한다. 이들의 이러한 행위는 마치 과거라는 구심점을 두고 계속 같은 자리를 빙빙도는 부유하는 시간, 즉 단 한번도 현재와 만난 적이 없는 미래의 까마득한 시간을 불러들인다. 영화에서 전경이 어느 순간 영화의 구가지에서 만나는 낯선 이미지는 까마득한 과거이면서 동시에 미래에서 들여다 본 현재의 유곽화된 거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영화의 현재, 그 현장의 한 가운데가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 미래에서 도착한 자로서 과거의 영화를 지켜본다. 그것은 우리가 영화에서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자취들을 찾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증거이다. 도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는 도시 속을 여행한다. 그러나 도시는 우리가 찾는 것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도시는 현재라는 구심점으로부터 우리를 시공간적으로 끊임없이 내몬다. 도시 속의 여행자인 우리들은 사회의 구심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한 채 그저 집을 나갔다 다시 돌아 오는, 그런 빙빙 도는 운동으로 밖에 작금의 정처 없음과 좌표 없음을 증명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오늘도 거대한 무리에 속한 채 그들과 함께 끝임없이 어딘가로 가지만 결국 갈 곳이 없다. 우리는 그 '정처 없음'의 자리로 매번 되돌아 온다.

현재의 자취가 없는 우리는 그것을 찾는 여행을 하게 된다. 현재의 부유함은 다른 시간의 장에 존재하는 존재들을 만나게 한다. 과거라는 사진적 형상으로, 지면의 땅 속으로 사라진 자, 곧 죽은 자는 오늘의 실재적 흔적이 없다. 우린 현재 속에서 상상적인 디지털 창을 그려넣고 결국 그들을 찾는 여행을 떠난다(떠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상상의 창을 통해서만 현재의 단절된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지로서의 상상력을 실행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통해서만 과거의 존재를 찾고, 채 애도 못한 죽음을 애도할 수 있도록 허락된다. 결국 우리 모두는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이주할 꿈을 꾸는 디지털리스트들이 된다(되었다).

PC방에서 어머니의 추모제를 드리는 딸, 묻힐 땅이 없어 현재를 떠돌고 있는 과거의 유령들. 한 번도 자리를 내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HD카메라를 들기 시작한 이 땅의 작가 감독들. 완전히 매혹된 영화를 PC방에서 홀로 화면을 향해 밤새 써내려가고있는 지금 내 모습까지. 우린 지금 어쩌면 다 같이 주인없는 땅. 나 없는 내 인생. 바로 그 거울을 보고 있다. 나는 결국 이 영화에 설득당했다. 민숭 맨숭한 채 영화를 보다가 후반부에서 눈물이 흘렀다. 화면 안엔 전경과 후경이 그토록 부정하려 했던 과거의 정신병적 어머니도, 과연 인간의 정서가 남아있을까 의심스러웠던 오타쿠적 디지털리스트들도 아닌, 완전히 발가벗겨진 스스로의 현재상이 있었다.



김정 감독의 전작 다큐멘터리에서 다룬 이 땅에서 잊혀진(미발견의) 과거(여성의 구술로써의 역사), 그 기원의 팩트들이 사이버의, 가상의 세계에서 만나 사장되고 단절된 현재의 역사성을 카메라 트래킹으로써 '이야기한다' 카메라를 실은 전경의 차는 오토바이에 탄 후경의 뒷 모습을 발견한다. 후경이 전경을 돌아다본다. 그들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아무런 발견도 하지 않으나 핵심은 그들의 시선이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마주친'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의 앞과 뒤를 탐사하는 카메라, 앞에서 리드하다 뒤로 빠져나와 지켜보는 그 카메라의 움직임. 제 각자의 층에 존재하는 시간성과 시대의 고유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것 자체를 사유하려는 움직임. 이 '영화의 움직임'이 아름답지 않다면. 도대체 현재, 이 도시 속에서 무엇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김시원 영화비평웹진 ‘네오이마주’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