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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21세기 작가열전

[비평좌담]“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만날 때의 미묘한 감각을 중요시한다”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만날 때의 미묘한 감각을 중요시한다”


- 21세기 작가열전 Ⅵ : 지오르고스 란디모스

이용철, 유운성, 김성욱 비평대담





아키 카우리스마키 특별전이 한창이던 11월 28일,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그리스의 지오르고스 란디모스 감독의 영화와 함께 한 여섯 번째 비평좌담 행사가 있었다. 이용철, 유운성 영화평론가는 최근 주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그리스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소통의 불가능성과 가족을 그리는 방식 등 동시대 영화의 흥미로운 점들을 설명해주었다. 이 감독들의 더 많은 영화를 상영할 기회를 기다리며 이날 대화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지오르고스 란디모스 감독은 그리스 출신이다. 2005년에 <키네타 Kinetta>라는 영화를 만들었고 <송곳니>는 그의 세 번째 작품이다. 이 영화로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부문 대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에 <알프스>를 발표했다. 방금 본 <송곳니>는 그리스 교외의 이상한 가족이 외부로부터 모든 영향을 차단하고 살아간다는 우화 같은 이야기를 그린다. 그리스 영화의 현재와 관련해 먼저 이야기를 나눴으면 한다.

이용철(영화평론가)│그리스는 영화산업이 거의 발달하지 못한 나라다. 젊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길은 거의 없고 상업영화나 TV 영화를 주로 만든다. 게다가 영화사를 통하는 것도 아니고 펀드를 통해 만드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조차 나이 많은 분들이 차지하다 보니 새로운 감독은 거의 나오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오르고스 란디모스 감독이 <키네타>로 인정을 받은 후 펀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젊은 감독들에게 기회가 생겼고 그중 가장 주목을 받은 감독이 란디모스 감독과 아티나 라켈 창가리 Athina Rachel Tsangari 감독이다.

유운성(영화평론가)│처음 <송곳니>를 보고 실망했다. 감독은 영화의 의미를 직접 밝히기를 거부한 채 보수적인 그리스 가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지만 영화를 본 사람은 미디어, 독재, 폐쇄적인 사회 등에 대한 은유를 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컨셉을 정한 뒤 그에 맞는 사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다 보니 개념이 앞서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실망을 했었는데 <아텐버그 Attenberg>(아티나 라켈 창가리, 2010)와 <알프스>를 이어본 다음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물론 영화 자체에 대한 생각이 변한 건 아니다.


먼저 이 감독을 소개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이 자리는 미래에 거장이 될 것 같은 감독들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신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적게 논의된 감독들과 영화계의 변화를 매핑하는 데 참조할 수 있는 영화를 고르기로 했다. 그런 맥락에서 란디모스 감독은 그리스 영화의 변화뿐 아니라 동시대 영화의 어떤 변화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감독이다. <송곳니>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를 둘러싼 다른 영화와 감독들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 영화는 그리스 영화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킨 영화라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또한 평론가나 큐레이터들이 동시대 그리스 영화를 언급할 때 빼놓지 않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 영화들도 이미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만큼이나 제작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란디모스 감독의 영화는 HAOS필름에서 만들어졌다. 최근 ‘그리스 뉴 웨이브’ 영화는 대부분 HAOS필름의 영화다. 이 영화사는 창가리 감독이 만든 영화사로 그녀는 2000년에 <고잉의 슬로 비즈니스 The Slow Business of Going>로 데뷔했다. 창가리가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그리스로 돌아왔을 때 2004년 아테네올림픽 기념영상 등을 만드는 등 다른 활동들을 했는데 여기서 뜻이 맞는 사람들과 영화 제작도 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바로 란디모스 감독이다. HAOS필름이 주목받은 것은 <아텐버그>가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르면서부터다. HAOS 필름이 제작한 영화들은 단지 영화적 계보로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타 예술 장르와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영화적 전통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 꽤 많다. <아텐버그>의 경우 주인공의 퍼포먼스가 계속 삽입된다. 그 부분만 잘라서 보면 어떤 실험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탈영화적 영화’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아텐버그>가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송곳니>가 칸영화제, 그리고 다시 <알프스>가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으면서 그리스 영화들이 주목을 많이 받았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폭력녀”란 제목으로 소개됐던 <미스 바이올런스>(알렉산드로스 아브라나스, 2013)도 베니스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다. 이처럼 베니스가 최근 그리스의 신진들에게 큰 상을 안겨주면서 그리스 영화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창가리와 란디모스의 스타일을 따라 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어 우려도 있다.

김성욱│<알프스>의 어떤 지점이 <송곳니>를 다시 생각하게 했는지 궁금하다.

이용철│란디모스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고 주어진 시나리오에 육체가 반응하기를 원하는 스타일이다. 영화를 봐도 배우들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아텐버그>나 <송곳니>, <알프스>를 설명할 때 서구 평론가들은 ‘행동심리학’이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송곳니>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이상한 행동들, <아텐버그>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보면 인물의 심리가 느껴지지 않고 의미도 찾기 힘들다. 허전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 영화들은 그 텅 빈 느낌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한다.

란디모스 감독은 우리의 행동에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관계를 맺을 때 이를 흔히 소통의 의미로 이해한채 언어적, 육체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관계로 보고는 한다. 하지만 이 감독의 영화에서 관계를 맺는 것은 우리가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는 걸 증명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소통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관계를 맺는다고 착각을 하고, 이 영화는 인간의 본질적인 소통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너무 허무한 결론에 빠질 수도 있겠지만 감독은 오히려 우리가 소통을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게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의견을 다 이해하는 게 아닌 것 처럼 말이다. 란디모스의 영화는 그런 습관적인 행동들, 우리가 쉽게 소통한다고 믿었던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유운성│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이 영화에서 피할 수 없다. 요즘 우리가 접하는 영화 중 자주 만나는 두 가지 테마가 있다. 하나는 가족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고, 또 하나는 ‘울타리’를 만들고 사람들을 그 안에 가두는 영화다. 먼저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송곳니>, <알프스>는 모두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들에게 감정이 전혀 없다. 굉장히 못 만든 어학 프로그램 같다. 창가리와 란디모스의 이런 영화를 보며 브레송적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여기엔 차이가 있다. 브레송이 이야기한 몸과 언어의 ‘트레이닝’은 그의 영화적 신념에 맞닿아 있다. 하지만 란디모스의 영화 속 인물들은 실제로 그 안에서 가족, 또는 누군가를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프스>의 간호사가 딸을 떠나보낸 부모를 위해 죽은 딸을 연기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가족 이야기를 하는 영화는 많다. 그런데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다룰 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연기를 펼치는 공간으로 가족을 그리는 흐름이 있다. <송곳니>도 그렇고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도 그렇다. 또한 <알프스>는 소노 시온의 <노리코의 식탁>과 설정이 비슷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 연기를 하는데 그것이 가족 공동체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게 가족이란 이름 안에서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을 자신도 스스로 의식하고 있다. 이런 특성이 <송곳니>에 잘 드러난다. 두 번째 테마는 울타리이다. 울타리를 만들고 이것을 벗어날 수 없다고 전제한 다음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호러영화의 관습이기도 하다. 어떤 공간에 갇혔는데 여기에서는 그 규칙에 따라야 하고 위반하면 제재가 들어온다. 이런 점에서 떠오르는 영화로 루실 아지알릴러비치 Lucile Hadzihalilovic 감독의 <이노센스>(2004)라는 작품이 있다. 나가선 안 되는 테두리 안에서 어떤 규율을 반복하지만 그 시스템의 정체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 것 말이다. 정리하자면, 퍼포밍하는 개인들의 집합으로서 가족이라는 흐름과 울타리 안의 폐쇄된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규율을 따르는 사람들의 집합이 있다. 그리고 <송곳니>는 이런 두 가지 흐름이 합쳐진 영화다. 참고로 창가리의 35분짜리 영화 <캡슐>도 정확하게 이 설정을 따른다.



김성욱│란디모스 감독은 제일 좋아하는 감독으로 존 카사베츠를 이야기했다. 둘은 언뜻 달라 보이지만 방금 이야기한 ‘퍼포밍’이라는 측면에서 카사베츠와 비슷한 점이 있다. 카사베츠 영화의 배경에는 당시의 사회적 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놓여있다. <송곳니>를 처음 봤을 때 어쩔 수 없이 떠올린 것이 최근 그리스 사회의 사회 경제적 불안이었다. 가족이란 최소한의 집단이다. 정치의 문제는 언제나 두 가지 지평이 있는데 그 하나가 집단과 공동체의 공생의 문제라면, 또 하나는 외부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이 영화는 전형적으로 이 두 가지를 다룬다. 무언가 낯선 것이 외부로부터 침입하고, 반대로 바깥으로 나가려는 운동도 있다.


유운성│가족, 퍼포먼스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꼭 극단적 폭력이나 폐소공포증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가족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연기하는 것. 이런 테마는 다른 영화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문라이즈 킹덤>도 그렇다. 성격이나 스타일에선 차이가 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퍼포밍하는 개인들의 집합체라는 점에서 공유하는 면이 있다. 이 감독과 비슷한 지금의 세대가 함께 공유하는 어떤 생각이 아닐까. 반면 한국에서는 이런 흐름의 영화가 많지 않다는 것도 흥미롭다. 한국 영화 속에서 가족들은 혈연으로 끈끈하게 묶이거나 애착을 갖고 있다.


이용철│만든 영화가 많지 않아서 아직 공통점이라고 이야기하기엔 이르지만 가족을 다루는 점에서 창가리의 영화가 오늘 본 <송곳니>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 방금 <이노센스>도 이야기를 했지만 아톰 에고이앙이나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도 많이 떠오른다. 란디모스는 스타일로서의 가족을 보여주는 것이지 전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면 개나 경비원에게는 이름이 있는데 가족에게는 이름이 없다. 이런 게 억지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란디모스는 그리스 가족의 문제를 내부에서 접근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반면 창가리는 보편적인 부분과 연결시키는 면이 있다. 오즈의 <꽁치의 맛>, <만춘>, 클레르 드니의 <35 럼 샷>과 비슷한 면도 있다.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창가리가 란디모스가 더 성숙하다고 생각한다.


유운성│<송곳니>를 볼 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영화는 사실 <샤이닝>이다(웃음). 란디모스나 창가리는 지금 그리스에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두 감독이다. 둘 중 누가 더 나은지는 아직 단정짓기 어렵다. 하지만 차이는 있다. 란디모스의 영화는 영화 안에서 던지는 단서, 구조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주제를 구현해낸다. 그런 점에서 스타일이 독특하긴 하지만 찬찬히 보면 주제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 매우 전통적인 영화의 방식에 가깝다. 하지만 창가리의 영화는 ‘포스트 시네마’의 측면을 갖고 있다.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거나 어떤 주제를 위해 봉사하는 게 아니라 이질적인 양식들을 결합시켜 놓는다. 


관(람)객이 그걸 보고 주제를 연상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전형적인 내러티브를 갖고 있는 <아텐버그>도 그렇다. 부분적으로 다른 사물이나 이질적인 연출이 툭툭 던져진다. 미술관의 이쪽에서는 전시를 하고 저쪽에서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와 비영화적 매체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감독이 창가리다. 그리고 스크린을 바라보는 두 감독의 방식도 다르다. <송곳니>는 미장센을 중요시한다. 배우를 어떻게 놓고, 무대와 소품, 색채, 조명과 동선 등 전통적인 미장센 개념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창가리는 스크린을 평평하게 본다. 그 평평한 곳에 사물들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두 감독의 각기 다른 개성은 최근 영화계의 두 가지 경향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김성욱│란디모스의 영화는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만날 때의 미묘한 감각을 중요시한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달에는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바바라>로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다.




정리│김지혜 자원활동가 

사진│김윤슬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