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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21세기 작가열전

[비평좌담]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 이용철, 유운성, 김성욱 대담

[21세기 작가열전 Ⅲ. 오멸]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 이용철, 유운성, 김성욱 비평대담



지난 6월 30일, “21세기 작가열전” 세 번째 시간으로 <지슬>의 오멸 감독에 관한 비평좌담이 진행되었다. 이날 좌담에서는 오멸 감독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최근 젊은 작가들이 역사를 다루는 경향들, 로컬시네마의 조건 등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용철(영화평론가) : ‘제주’를 빼고 오멸의 영화를 말하기 힘들다. 오멸은 제주를 지역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제주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들과 언어, 행동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이그 저 귓것>은 한량들의 생활을 보면서 우리가 상대적으로 갑갑하게 억압받으며 살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한다. 그리고 

<뽕똘>은 제주도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 가난한 사람들이 영화적 지식이나 도움이 없는 상태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고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궁핍함 가운데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 번째 작품인 <이어도>는 감독의 사적인 영화다. 제천영화제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몇 번 상영한 것 외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형식적으로 특이한 부분들이 많은 영화다. 제주에서도 외진 곳에 살고 있던 한 아낙이 4·3을 경험하는 순간에서  영화는 끝난다. 감독은 4·3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상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관객들은 지루해 하지만 감독은 그것이 제주에 사는 여자들의 일상이며, 어머니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관객들의 상상력이 일어나길 원한다고 말했다.


유운성(영화평론가) : <뽕똘>에 대해서는 <지슬>과 관련해 미심쩍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다. 소위 ‘주변’이라 불리는 곳에서 영화를 만들어 이를 ‘중심’에 가져와 보여주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실수, 즉 ‘자기 원시화’에 빠진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어도>를 보았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굉장히 단순하고 하나의 곡조가 영화 내내 반복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면 이 곡조는 전체 노래의 전주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다. 뭔가 사건이 일어날 듯 일어나지 않을 듯하며 아주 정적인 이미지들이 이어지다가 결국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 사건이 발생하고, 그때 비로소 고종국 시인이 쓴 가사로 만들어진 노래가 흘러나온다. 4·3의 순간을 마지막까지 지연시킨 것이다. 역사적 사실과 이것이 환기시키는 끔찍함을 지연하는 와중에도 ‘내가 결국은 말해야 하고 들려줘야 한다’는 딜레마가 있다. ‘말해야 한다, 하지만 말할 수 없다’는 고민을 계속 반복하다 마지막에 결국 말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이어도>가 하나의 전주였다면 

<지슬>은 망설임을 뚫고 하나의 이야기를 내놓은 것인데, 사실은 이 영화에 아주 만족하는 편은 아니다. <이어도>를 보면서 지역 영화감독으로서, 혹은 역사적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감독으로서 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것과 상당히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 <이어도>와 <지슬>은 공통적인 면도 갖고 있다. 두 영화 모두 형식이 먼저 주어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어도>에 노래가 있다면 <지슬>에는 제사라는 형식이 있다. 역사의 재앙과 상처를 다룰 때 형식의 견고함이 느껴졌다. 특히 <지슬>의 제의는 흥미롭다.


이용철 : 오멸 감독의 이미지와 형식 실험은 <이어도>에서 이미 진행했기 때문에 <지슬>을 만들 때는 이런 것을 시도하지 않은 면이 있다. <지슬>에서는 처음으로 전문 스태프들과 작업을 했고, 미리 만든 스토리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 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형식적으로는 웰메이드하지만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적은 영화가 되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지슬>에서 스타일상 특이한 부분들이 모두 계획에 없던 장면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동굴에서의 수평 트래킹 장면은 원래 시나리오에 없었다. 그런데 출연자들이 전부 생업이 있는 비전문 배우들이라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자 날을 잡아 모두 동굴에 모이게 한 뒤 찍은 게 그 장면이다. 감독의 전작인 <이어도>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여자가 두려움에 떠는 연기는 감독이 디렉션을 준 것이 아니라 배우가 지쳐 포기하는 순간을 우연히 찍은 것이다.


김성욱 : 제사의 형식 중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소지’ 부분이 인상적이다. 제사가 끝나면 사용한 종이를 모두 태워버리는 것인데, 그런 맥락에서 <이어도>가 흔적의 영화라면 <지슬>은 소멸의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기억을 담기보다는 이 영화를 통해 소멸시키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유운성 : <지슬>을 보면 초혼이 없는 제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서처럼 국가 권력이나 좌우 대립으로 인해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을 다룰 때 미심쩍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희생자들이 겪은 아픔에 접근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기와 공간을 원시적인 것으로 치환해 버려선 안 된다. 

<지슬>이 지워버리는 것 중 하나가 당시 3·10 총파업이나 제주에 실제 존재했던 남로당의 활동과 같은 이데올로기 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역사를 하나하나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실들을 지우고 순박, 순수, 미천함과 같은 이미지만을 남길 때 ‘자기 원시화’로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 시기의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영화가 과거로 가서 제사를 지낼 수도 있고 안타까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타까움과 제사 너머로 모든 저항의 이미지를 포기하고 그 상태에서만 4·3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정치적인 타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슬>이 그러한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이어도>에는 제주라는 땅에 남아있는 분노와 저항, 그리고 적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슬>에는 억압은 있지만 적대가 없다.


김성욱 : 역사를 다루는 영화들에서 당사자성, 비당사자성이라는 것은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다. 역사의 문제가 언제나 당사자의 논의로 환원되고 닫혀버리면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당사자인 우리가 역사의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 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유운성 : 오멸이나 <미국의 바람과 불>을 만든 김경만 같은 젊은 세대의 감독들에게는 영화를 통해 역사의 현장으로 관객을 데려가겠다는 의식이 거의 없다. 당시의 역사를 직접 경험했던 세대가 아닌 사람들이 간접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다. 김경만 감독처럼 ‘대한뉘우스’ 같은 푸티지를 활용하거나, 오멸 감독처럼 제의의 형식을 끌어들이는 것도 역사에 직접 다가가지 못하는 세대가 어떻게든 역사를 우리 곁으로 끌어오기 위해 취한 형식적 장치일 것이다. 역사를 유의미하게 다룬 영화들을 보면 비당사자들이 만든 영화가 오히려 더 많다. 4·3이나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사건들을 비당사자로서 다룰 수 있는 세대의 영화감독들이 비로소 등장한 것 같다. <지슬>에 대해 몇 가지 비판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4·3에 대해서 여기까지 오는 데도 6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용철 : 사실 역사에 대해 흥미로운 상상력을 보여주는 영화, 역사에 대한 사유 자체가 자유로운 영화는 드문 편이다. <미국의 바람과 불> 같은 경우도 형식은 굉장히 흥미롭지만 그 시대를 통과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자라면서 본 신문 기사를 다시 읽는 것 이상의 감흥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유일하게 이미지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여준 영화가 있다면 배용균 감독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한국 근현대사를 일종의 악몽으로 상상한다고 느꼈다. 단순히 역사의 사건을 재현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로컬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로컬의 언어, 문화, 사람을 지속적으로 그리는 감독을 로컬시네마 작가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은 오멸 정도인 것 같다. 로컬시네마가 나오려면 특이한 환경이 갖춰져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본의 문제가 있다. 장 비고가 <니스에 관하여>를 만들 때 아주 간략한 지적을 했다. 영화에 자본이 들어옴으로써 상당히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로컬시네마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로컬시네마의 정체성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 오멸 같은 감독이 좀 더 지지를 받고 제주에 대한 영화가 계속 나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운성 : 로컬시네마를 정의할 때 그 지역만의 정체성, 고유성만이 아니라 그 ‘로컬’을 위협하는 요소들, 즉 지역 안에 있는 분리, 투쟁, 이질적인 것들의 섞임을 드러내야 진짜 로컬시네마일 것이다. <지슬>은 희생의 공동체, 제의로 묶여진 초혼의 공동체와 같은 단일한 제주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지역 감독에 의해서 만들어진 지역 영화이지만 그 지역에 대해 말하는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간극과 균열, 비제주적인 것의 틈입 모두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제주에서 만들어지는 좋은 로컬시네마의 관건이 될 것이다.


김성욱 : 70년대 초반에 오가와 신스케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한 얘기가 있다. 농촌에 관한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라고 하는 대지의 장소가 있고, ‘있다’라고 하는 일상이 담긴 대기의 시간, 이 둘 모두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슬>은 이제 로컬을 넘어가야만 한다. 비당사자들의 당사자성을 적극 개진해야만 하는 영화다. 그래야만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리 ㅣ장지혜 관객에디터 

사진 ㅣ곽혜원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