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작가를 만나다

[작가를 만나다] “비장한 순간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끌어내는 것”

 

 

10월의 ‘작가를 만나다’에서는 개봉 10주년을 맞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을 특별상영하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오랜 지지를 보내온 김영진 영화평론가가 함께 자리해 관객과의 대화를 나누었다. ‘복수 3부작’의 첫 구상에서부터 공동각본 크레딧에 숨은 재미있는 뒷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던 이 날의 흥미로운 대화를 확인해보자.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올해로 <복수는 나의 것>이 개봉한 지 10년이다. 이 영화가 어떤 배경으로 만들어졌고, 감독님께는 어떤 작품으로 남아있는지 궁금하다.

박찬욱(영화감독): <복수는 나의 것> 제작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큰 성공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지만 각본을 쓴 건 훨씬 오래 전이었다. <3인조>가 개봉했을 때 영화관 앞에서 누구를 만나려고 기다리다가 이 영화를 떠올렸다. 머릿속으로 한참동안 구상을 하다가 거의 하루 만에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면서 다 썼다.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대사도 많지 않아서 빨리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찍는 과정은 정말 즐거웠고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찍을 때는 흥행도 잘 되겠다고 우리끼리 즐거워했었는데 투자․배급사 시사를 하고나오니 다들 어디서도 본적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동료 영화인을 대상으로 한 시사 때는 반응이 좋았고 칭찬에 힘이 났다. 그런데 개봉한 후 관객들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나빴다. 그렇게까지 나쁠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이 영화가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웃음). 사실 ‘복수 3부작’을 구상한 것은 이 영화를 기억시키기 위해서였다. <올드 보이>가 크게 흥행하고 나니 <JSA>와 <올드 보이> 사이에 놓인 이 영화를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 같았다. ‘3부작’으로 이름을 붙인 건 어떻게든지 이 영화를 구제하기 위한 기획이었다.

김영진(영화평론가): 당시 비평의 반응은 전반적으로 좋았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초반 5분부터 ‘맛이 갔었다’. 그런 경우가 두 번 정도 있는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처음이었고 이 영화가 두 번째였다. 사실 박찬욱 감독에 대해서는 필력에 비해 연출력이 따라주지 못하는게 아닌가하며 반신반의했었는데 이 영화는 끝내준다고 생각했고, 흥분해서 감독에게 문자를 보냈다. 쑥스러워서 그런 짓을 원래 안하는데 의심할 바 없는 걸작이라느니 하는 낯 뜨거운 문자를 보냈다. 영화의 주제도 주제지만 화면이 주는 굉장한 긴장들이 놀라웠다. 엄청난 찰기와 긴장이 있는데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나가는 힘이 인상적이었다.

김성욱: 영화 대사 중 머리가 두 개인 남자에 대한 농담이 이상하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계속해서 쌍을 이루며 치환되고 대치되는 영화의 구조와 정교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두 개라는 환상을 갖고 있으면서 그 중 하나를 제거하려는 순간 자멸하는 것이 영화 전체와 굉장히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박찬욱: 한참 후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그 얘기가 반복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병증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려는 시도가 굉장히 어렵고 잘못된 결과를 끌어낼 때가 많다. 그래서 망상을 가지고 있는 환자에게 그 망상을 없애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두고 인정하고 그대로 살게 하는 편이 현명하다는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정사장면에서 마치 머리가 둘 있는 사람처럼 두 사람을 그린 장면도 있고, 대화를 할 때 거울을 통해 그런 이미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이 영화는 모든 것이 어떤 대립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표적으로는 두 계급의 대립 문제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집어넣은 농담이었다.

 

 

 

김영진: 이 영화가 한국 영화의 연기 패러다임을 바꾸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90대까지만 해도 배우들이 ‘연기’를 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에선 연기를 안 하는 것이 연기를 잘하는 것이란 식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가끔 90년대 영화를 보면 연기가 촌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 이 영화의 연기는 하나도 낡지 않고 굉장히 현대적으로 보인다. 실제로 배우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아마 자신들이 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이끌어주지 않았던 유형의 연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게 아닐까. 현재 연기 잘한다는 배우들은 덜어내는 식의 연기를 하는데 이 영화가 그런 스타일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박찬욱: 연기에 대해 새롭게 접근해보려고 시도 했었다. 좀 더 엄밀하게 규정한다면 연기를 아예 안하는 것과는 다르다. 무조건 백지처럼 연기를 포기해버리는 식의 연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차갑고 메마르기 때문에 가장 표현을 아끼고 미니멀하게 연기했던 작품이다. 그 덕분에 연기만큼은 십년이 흐른 지금 봐도 소름끼치게 감정이 잘 살아있다.

김성욱: 영화의 곳곳에서 피가 선적으로 뿜어져 나오거나 오줌이나 배설물들이 흘러나오고, 여자아이가 물에 빠지거나 비가 오는 등 전체적으로 신체적인 손상을 가하는 부분을 액화시킨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액체성의 느낌이 영화의 전체적인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박찬욱: 여름에 뭔가를 추적하거나 도망 다니는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늪에 빠진 사람들이 허우적대는 끈적끈적한 느낌의 추적드라마를 생각했다. 그리고 보통 생명을 담지하는 장소로서의 물이나 강, 바다라는 상투성에서 벗어나 반대로 해보고 싶기도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메마른 느낌의 장소와 대비적으로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이미지들을 구사하려고 했다.

 

김영진: 이 영화에는 괄호 쳐진 장면들이 굉장히 많다. 마지막 장면은 코미디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표정들도 그렇고, 보통의 영화들은 이미지들이 명확하게 지시하는 게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것들에 괄호를 쳐서 모호하게 만든다.

박찬욱: 장면이 등장하는 순간 관객이 바로 눈치 채는 것보다는 ‘저게 뭐지?’하는 의문을 계속 가지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감정 표현을 자제하고 설명들을 조금씩 덜어냈다. 이무영 감독과 같이 각본 작업을 했는데, 이무영 감독은 사실 쓴 게 하나도 없고 내가 쓴 각본을 계속 지워나갔다. 한 스무 군데를 지우더라. 그런데 그렇게 없앤 것을 다시 읽어보니 분위기가 더 건조하고 더 냉정해졌다. 그렇게 해서 한 글자도 안 쓰고 공동 각본 크레딧에 이름이 오른 영화사에서 희귀한 사례가 생겼다(웃음).

김성욱: 감독님의 영화에는 부조리한, 굉장히 이상한 유머가 등장한다. 누나가 괴로워할 때 옆 방 남자들이 자위를 하고 신하균씨가 라면을 먹는 장면이라든지, 아이가 물에 빠질 때 전경에는 신하균, 후경에는 류승범씨가 보이는 장면 등이 있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숏에서 두 개의 요소가 충돌하는 것을 넘어 세 개까지 나오면 여기서 웃어야하나 울어야하나 주저하게 된다.

박찬욱: 유머와 폭력이 결합되거나 공포, 슬픔, 고통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유머와 결합하는 것은 내가 제일 중시하는 영화요소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을 꼽아보라고 하면 다 그런 장면들이다. 마지막에 송강호씨가 판결문을 읽으려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판결문이라는 것은 피고가 어떤 죄를 저질러서 어떤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인데, 정작 당사자가 그걸 읽을 수 없게 해서 자신이 왜 죽는지 모르게 하는 것만큼 불쌍한 것이 없다. 그야말로 인간 실존의 부조리다. 그런데 단지 판결문을 읽을 수 없는 위치에 꽂아버리는 것에 머문다면 그 부조리가 잘 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비장한 순간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끌어내는 것이 이 상황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너무 어울리지 않으니까 관객은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관객1: 극중 송강호씨가 사람들을 죽이는 방법들이 평범하지 않은데 그 부분은 어떻게 생각한 건지 궁금하다.

박찬욱: 그가 전기기술을 배운 노동자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캐릭터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전기기술을 활용하는 장면을 많이 넣었다. 팽기사가 자해를 할 때도 경찰을 부르거나 그냥 가지 않고 달려들어 몸싸움을 하는 것은 다 그의 출신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한다. 물에서 신하균씨의 발목을 자르는 건 키가 작아 빠져죽었던 자기 딸과 똑같은 처지에 놓으려고 키를 줄이는 것이다. 아버지의 지독하고 집요한 복수심이 낳은 행동이다.

 

관객2: 이 영화에서 배두나씨의 대사들은 수다나 허풍, 과장으로 일관하다가 죽을 때 송강호씨에게 했던 말인 ‘조심하라’는 말은 실현이 된다.

박찬욱: 그 결말을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고 제일 많이 고민했다. 대부분이 반대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단 결말을 정하고 나니 그 결말을 위해 나머지 앞부분에서는 배두나씨의 말이 신뢰가 안 가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정치적인 구호를 외칠 때도 껄렁껄렁하고 담배를 물고 있고, 슬로건도 PD와 NL의 구호가 뒤섞여있는데 정작 자신은 무정부주의자 동맹이라고 말하는 식으로 설정했다. 심지어 형사도 그 단체의 회원은 배두나 혼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테러리스트들이 등장하면서 이 영화의 결말 전체를 신기루나 환상처럼 느낄 수도 있고, 신의 사자 혹은 복수의 천사가 내려온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영화 내내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여자애였는데 그 말을 할 때만큼은 진심을 다했던 것이라고 느끼게 하고 싶었다.

 

관객3: 미니멀리즘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딸을 잃은 송강호씨의 분노나 슬픔을 보여줄 때는 롱숏으로 촬영하거나 하는 점이 눈에 띄는 반면, 신하균씨의 슬픔은 상대적으로 절제를 안 하신 것 같다. 두 캐릭터의 복수에 어떤 차이를 둔 것인지 궁금하다.

박찬욱: 미니멀하다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영화를 만들 때 어떤 원칙을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맞추는 태도는 좋아하지 않는다. 전체적인 기조가 있고 그때그때 등장인물의 감정에 맞게 여러 가지 영화적 기법들을 운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딸의 시체를 부여안고 오열하는 아버지를 롱 쇼트로만 계속 찍는 것은 뭔가 멋 부리는 것 같아서 스스로 못 견딘다. 그래서 아주 극단적이 클로즈업과 먼 거리의 쇼트의 충돌로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두 주인공은 똑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신하균씨는 범죄자이고 큰 의미에서는 복수의 대상이 되는 인물인데 관객이 그에게 좀 더 연민을 느낄 수 있도록 구상을 했다.

 

정리 : 장지혜 관객에디터 / 사진 : 정지연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