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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네바캉스 서울

뱀파이어는 살아있다 - 감미로운 공포: 뱀파이어 영화

[2013 시네바캉스 서울 - 감미로운 공포 : 뱀파이어 영화 ]



뱀파이어는 살아있다


뱀파이어물처럼 꾸준히 사랑받는 장르도 흔치 않다. 작금의 뱀파이어물이라는 것이 <트와일라잇> 시리즈처럼 트렌디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지만 이미 그 자체만으로 이 장르가 지닌 생명력과 번식력을 담보한다. 그 배경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흡혈 吸血’이라는 뱀파이어의 본능이 자리하고 있다. 흔히 목을 빠는 행위로 시각화되는 흡혈은 우선적으로 에로틱에 기대 성(性)과 관련한 감각적인 이미지로 관객의 눈을 현혹한다. 그럴 때 뱀파이어물은 주로 B영화의 형태를 띄지만 흡혈이 상징으로 처리될 때는 당대의 사회를 반영하는 은유가 되기도 한다. 바로 이와 같은 경계 파괴적인 면모에서 뱀파이어물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과 질긴 생명력이 피어난다. 2013 시네바캉스 서울의 “감미로운 공포 : 뱀파이어 영화” 섹션은 뱀파이어물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할리우드에서 유럽까지, B영화에서 예술영화까지, 시대와 국적과 장르의 성격을 불문한 7편의 영화가 뱀파이어물의 매력을 아우른다. 부제를 붙인다면, 뱀파이어의 영화사인 동시에 피의 사회사라고 할 수 있을까.




올해 4월 2일 사망한 'B영화의 제왕' 헤수스 프랑코의 <레즈비언 뱀파이어>(1971)는 직설적인 제목처럼 여자 뱀파이어들이 등장한다. 여자를 무대 위로 불러 퍼포먼스를 펼친 후 피를 빠는 여자 뱀파이어의 이야기인데 겉보기와 다르게 동성애적인 느낌은 강하지 않다. 오히려 걸핏하면 이유 없이 옷을 벗어젖히는 여인들의 육체에 집중하는 까닭에 남자 관객의 판타지에 복무하는 인상이 역력하다. 실제로 이들 레즈비언 뱀파이들이 옷을 벗는 행위를 몰래 훔쳐보는 남자의 시선이 종종 인서트되고는 한다. 그런 장면들을 제외하면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B영화이지만 뱀파이어물의 관점에서 <레즈비언 뱀파이어>의 지리적 배경은 어딘가 모르게 낯설다. 눈발 서늘한 동유럽의 뾰족한 성이 아니라 햇빛이 작렬하는 터키 이스탄불의 해안이 그 배경인데, 이미 ‘여자’ 뱀파이어물이라는 점에서 헤수스 프랑코는 전통적인 장르의 컨벤션을 따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장르의 남성중심적인 사고와 행위에 균열을 일으키려 한다. 감독이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일 테다. 터키는 동서양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지점이다. <레즈비언 뱀파이어>는 이스탄불이 갖는 지리적 의미처럼 전통적인 뱀파이어물에 정면으로 부딪혀 전복을 꾀한다. 이는 여권 신장이라는 시대적인 흐름과도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여주인공 중 한 명이 사업가인 점도 그러하거니와 여자들끼리는 흡혈을 통해 뱀파이어로 연대(?)를 이루지만 흡혈당한 남자들은 그대로 죽음을 맞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이는 뱀파이어물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상기시킨다. 뱀파이어물이 현실을 흡혈한 것인가? 현실이 뱀파이어의 세계와 다르지 않은 것인가?





알랭 로브그리예의 <아름다운 포로 La belle captive>(1983)는 그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는 영화라고 할 만하다. 영화는 기이한 여인의 정체를 뒤쫓는 한 남자의 혼란을 다룬다. 남자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여인이 늦은 밤 도로 위에 쓰러져 있자 그녀를 데리고 의사의 집에 방문했다가 갇히고 만다. 그리고 갇힌 방에서 둘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여자는 사라진 상태다. 이에 남자는 의문을 품게 된다. 어떻게 이 방에서 나가게 된 걸까, 무엇보다 그 여자는 실재하는 존재였던가? 이와 같은 남자의 의문은 흡사 뱀파이어는 살아있는 시체인가, 아니면 죽은 사람인가, 와 같은 질문의 맥락으로 읽힌다. 극 중 방안에 홀로 남은 남자의 목에는 뱀파이어에 물린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도 하다. 이를 통해 알랭 로브그리예는 내부와 외부, 현실과 환상, 현존과 기억 등 경계를 무화(無化)하는 방식으로 남자의 혼란을 초현실주의로 이끈다. 이 방면의 대가 르네 마그리트의 동명의 작품을 제목으로 차용한 것도 그러하거니와 실제 그림도 등장할 정도다.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알랭 로브그리예는 작가로 참여했던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1961)에서 이미 이를 증명하지 않았던가. <아름다운 포로>에 뱀파이어의 설정을 반영한 것도 뱀파이어물이 지닌 양가성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극 중 남자가 결국 그림 속 현실과 현실 속 그림이 하나 되는 합일의 현실을 깨닫는 것처럼 뱀파이어물 역시 장르와 현실이 서로의 보완재로 작용한다. 현실의 고통이 장르의 욕망과, 금기가 쾌락과 충돌하고 합쳐지는 가운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침실의 표적 Body Double>(1984)은 영화를 통한 흡혈의 경우를 대표한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을 자신의 영화적 수혈로 삼는 것은 워낙 유명하다. <침실의 표적>에서는 영화 속 영화에 뱀파이어물의 요소를 등장시켜 그런 자신의 작가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은유한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삼류배우 제이크(크레이그 왓슨)가 친구의 초대를 받고 방문한 집에서 망원경으로 이웃집 여자를 훔쳐본 후 휘말리는 사건을 다룬다. 말하자면, <로프>(1948)의 배경에서 <이창>(1954)의 설정을 가지고 펼치는 <현기증>(1958)의 액션이라고 할까. 드 팔마는 그중 <현기증>의 스카티(제임스 스튜어트)가 겪는 고소공포증을 제이크에게 반영해 폐소공포증으로 응용한다. 제이크가 이와 같은 증상을 드러내는 건 뱀파이어로 분장하고 관 속에 누워있을 때인데 그런 관점에서 <침실의 표적>은 이를 극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는 드 팔마가 히치콕의 영화를 취함으로써 받는 아류라는 비아냥거림을 좀 더 창의적의 영화의 변용으로 극복하겠다는 의지로 비친다. 드 팔마의 매력이 그렇다. 곳곳에 히치콕이 포진하지만 창조적 모방이라는 측면에서 드 팔마의 인장이 훨씬 강하다. <침실의 표적>의 에필로그를 보자. 제임스 스튜어트를 연상시키는 크레이그 왓슨이 극 중 페소공포증을 극복한 후 현장에 복귀해 뱀파이어를 연기한다. 그의 흡혈 대상은 히치콕 영화의 트레이드마크인 금발 미녀인데 이를 연기한 배우는 멜라니 그리피스다. 그녀의 어머니는 다름 아닌 <새>(1963)와 <마니>(1964)에 출연했던 티피 헤드렌이다. 대를 잇는 영화의 ‘혈연관계 body double’가 모방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형성되지 않나.





존 카펜터의 <슬레이어 Vampires>(1988)와 아벨 페라라의 <어딕션 The Addiction>(1995)은 피의 의미가 중요한 뱀파이어물을 통해 폭력으로 점철된 미국의 역사를 소환한다는 점에서 동일 선상에 위치한다. 다만 두 영화는 뱀파이어를 취하되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어 흥미롭다. <슬레이어>가 뱀파이어물을 서부극에 이식하고 있다면 <어딕션>은 흑백의 기록화면 같은 다큐멘터리풍으로 영화를 끌고 가는 것. 이는 두 영화가 취하는 역사가 각각 미국의 탄생과 근현대사로 범위를 달리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뱀파이어 헌터가 전면에 나서는 <슬레이어>를 요약하면 ‘흑백의 싸움’이다. 밤에만 움직이는 뱀파이어가 흑,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낮에 활동하는 헌터가 백을 의미하는데 황량한 벌판이 배경이란 점에 주목하자. 서부극은 미국의 기원을 쫓는 장르로 이해되곤 한다. 특이하게도 <슬레이어>의 뱀파이어들은 땅에서 솟아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을 땅에 묻은 백인들(헌터는 모두 백인이다!)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신대륙에 들어와 원주민을 학살하고 땅을 차지한 미국의 기원에 대한 인디언의 복수를 연상시킨다. 다만 헌터들이 뱀파이어에게 승리를 거두는 결말은 흑(黑)역사를 부정하려는 미국의 원죄처럼 읽힐 정도다. 이에 대한 아벨 페라라의 입장은 <어딕션>에 등장하는 뱀파이어의 대사를 빌리자면, “너도 공모자야”다. 인디언의 피를 빨아 세워진 국가이니만큼 미국의 체제를 유지하는 수단 역시 폭력이다. 아벨 페라라는 이를 ‘중독 addiction’으로 본다. 국가 단위에서 벌어지는 행위인 만큼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인은 공모자인 셈이다. “반복되는 학살의 광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아벨 페라라가 던지는 질문이다. 대답은, 죄의식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살아도 죽은, 죽어서도 사는 뱀파이어의 운명. 뱀파이어가 된 극 중 캐서린(릴리 테일러)의 묘비에 새겨진 출생과 사망년도가 예사롭지 않다. ‘1969~1994’ 베트남전부터 걸프전까지, 죄의식으로나마 폭력의 중독을 끊어보자는 아벨 페라라의 바람일까?





역사가 남긴 죄의식은 육체에 남아 평생을 따라다니기도 한다(뱀파이어는 그런 비극적 역사가 남긴 영화적인 결과물일 테다). <어딕션>이 정신적인 측면에서 이를 다뤘다면 클레르 드니의 <트러블 에브리 데이 Trouble Every Day>(2001)는 육체적인 관점에서 탐구한다. 미국 출신의 브라운 부부는 프랑스 파리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기쁨에 들떠야 할 남편의 표정에는 오히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미국인이라는 원죄 때문일까. 마치 관을 연상시키는 길고 좁은 비행기 통로에서 그는 피로 범벅된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그러다 보니 부인과의 관계도 원만해 보이지 않는다. 부인의 팔에 나있는 이빨 자욱이 이를 추측케 한다. 미국인 남편에게 지금 당장 절실한 건 정상적인 애정 관계를 가능케 해줄 어떤 치료이다. 그가 미국을 떠나 프랑스에 온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찾는 프랑스인 의사는 성관계를 가질 때면 상대방을 물어뜯어 죽이는 여인을 보호 중에 있다. 피로 물든 폭력의 역사를 떠나왔건만 미국인이 보게 되는 프랑스의 현실 역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미국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프랑스 역시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통해 지배력을 떨치고 국가 발전을 도모해왔던 터다. 미국의 경우처럼 그런 흑역사를 가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닐 테다. 몸 여기저기서 흘러내리는 피는 닦아서 없앨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상처는 신체 여기저기에 남아 비극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 때문에 클레르 드니는 육체를 더욱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행해진 폭력의 상흔은 개인의 내밀하고 은밀한 부위까지 침투할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뱀파이어물의 주요한 언어의 도구는 '육체'다. 이에 대한 가장 독특한 접근법을 보여주는 건 가이 매딘의 <드라큘라의 춤 Dracula: Pages from a Virgin's Diary>(2002)이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원작을 충실히 따르되 흑백 무성영화의 형식을 차용하면서 피와 같은 붉은 색을 부분적으로 강조하는 한편으로, 무엇보다 ‘춤’의 관점에서 영화를 다룬다. 이 영화는 스크린으로 보는 무대극 같은 느낌이 강한데 캐나다의 왕립 위니펙 발레단의 공연을 영화화했기 때문이다. 춤은 몸으로 전하는 가장 격렬한 신체 언어다. 뱀파이어는 저주받은 운명에 맞춰 영원을 갈구하며 흡혈로 몸의 운동을 펼치는 존재다. 굳이 말이 필요 없는 존재이기에 춤은 뱀파이어를 표현할 가장 적절한 언어인 셈이다. 그런데 <드라큘라의 춤>이 보여주는 춤을 포함한 모든 영화적 움직임은 비극적이라기보다 과잉에 더 가깝다. 예컨대. 드라큘라가 미나를 흡혈하는 장면은 공포라기보다는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신성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그러니 흡혈당하는 미나의 표정에서도 전혀 거부감을 읽을 수가 없다. 가이 매딘이 의도하는 것은 초현실이다. 드라큘라를 연기하는 배우가 중국인인 것도 이런 맥락이다. 물론 제국주의나 인종차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다만 <드라큘라의 춤>을 포함해 일련의 뱀파이어물들은 세상에 죽음이 넘쳐난다고 증언한다. 뱀파이어물이 시대를 막론하고 여전히 인기를 구가하는 배경에는 폭력의 악순환이 자리한다. 더욱이 이 죽음의 고리가 끊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다. 굳이 뱀파이어의 시각을 빌리지 않더라도 세상은 이미 초현실로 진입했다. <드라큘라의 춤>에서 묘사되는 드라큘라의 죽음만 보아도 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비극적인 순간이다. 이 장면에서만큼은 드라큘라를 몰아붙이는 반 헬싱 일행이 더욱 뱀파이어처럼 느껴진다. 뱀파이어가 되는 것이야말로 초현실적인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말하려는 걸까. 과장된 해석일 것이다. 다만 <드라큘라의 춤>에는 “죽음, 그것은 시작이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제 세상은 타인을 죽이고 그 피를 빨아야 자신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뱀파이어는 허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로 내 옆에도 뱀파이어가 살고 있다.



허남웅 /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