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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엘리아 카잔 특별전

배우의 감독, 엘리아 카잔

지난 11일 오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워터프론트> 상영 후, ‘배우의 감독, 엘리아 카잔’이란 주제로 영화평론가 김영진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카잔과 말론 브랜도와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물론, 메소드 연기 스타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던 그 시간의 일부를 옮긴다.


김영진(영화 평론가, 명지대 교수):
엘리아 카잔이란 감독과 배우들에 얽힌 얘기를 드리겠다. <워터프론트>는 1954년에 아카데미에서 거의 상을 휩쓴 영화인데, 반미 위원회에서 엘리아 카잔이 동료들을 밀고한, 당대의 맥락에서 자유롭지 않은 영화이다. 권력집단에 맞서는 개인의 운명을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상당히 복잡한 맥락에 있었던 영화이고 카잔의 경력에서는 오점이었던 작품이다. 말론 브랜도는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출현을 꺼려했고,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매일 오후 4시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수락했다고 한다. 카잔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채플린이나 조셉 로지 같은 감독들은 유럽으로 돌아갔지만 카잔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고, 밀고 안하면 추방이나 망명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건 곧 카잔에겐 자기 경력이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엘리아 카잔은 카메라 밖에서 드라마를 만드는데 굉장히 능했던 감독이다.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배우가 연기하게끔 하는, 카메라 바깥에서 이미 그 사람이 되게끔 하는 연기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서 어떤 사람은 카잔과 일하는 것을 너무 지긋지긋해 했다고 한다. 일례로 <혁명아 사파타>란 영화에 말론 브랜도와 안소니 퀸이 형제 역으로 출현했는데, 처음에 카잔은 둘이 형제같은 감정을 갖게 하려고 숙소, 현장에도 매일 붙어있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둘이 스타일이 너무 달라 친해지는 게 쉽지 않았는데, 후반부에는 둘 간의 배신의 드라마가 펼쳐지니까 그때부터는 둘을 이간질시켰다고 한다. 그 일은 안소니 퀸과 말론 브랜도는 15년 동안 말을 안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워터프론트>의 테리 말로이를 만들기 위해 말론 브랜도는 실제 복싱을 했고, 매일 에바 마리 세인트와 손을 잡고 지하철로 출퇴근을 했으며, 심지어 부두 조폭 두목과 점심도 같이 먹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를 카잔은 요구했던 것이다. 그렇게 브랜도는 몰입해서 테리 말로이가 되어 갔던 거다. 카잔은 작품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영혼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즉흥 연기로도 유명하다. <워터프론트>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이디가 장갑 떨어뜨리고 테리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과 형인 찰리와 택시에서 얘기하는 장면을 꼽는데, 그 두 장면 모두 카잔의 용인 하에 즉흥적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카잔은 그런 점에서 배우들의 감독이라고 불린다. 그의 작품에서 대가를 치루고 연기를 하고 나면 훌륭한 연기자가 되게끔 만드는 감독이다. 말론 브랜도와의 관계도 그렇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말론 브랜도는 브로드웨이 연극무대로도 섰었는데 처음엔 너무 긴장해 그 폭발이 안나왔는데 카잔의 도움으로 독방에서 소리를 지른 후 무대에서 큰 외침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고, 제임스 딘 같은 배우도 카잔이 발굴한 대표적인 배우 중 하나다. 카잔은 그렇게 카메라 바깥에서 실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유형의 감독이다. 가짜가 아닌 진짜 연기를 끌어내는 것에 카잔처럼 능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사실 말론 브랜도가 연기를 그렇게 잘했지만 연기자란 직업을 혐오하고 고통스러워했다는 것만 봐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짐작할 수 있다. 말론 브랜도가 후에 아예 섬을 사서 안 나타나고 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몇몇 일화만 봐도 엘리아 카잔이 미국영화사에 끼친 영향이 크다. 특히 배우의 창작에 관한, 즉 연기를 어떻게 끄집어 낼 지의 측면에서 그의 역할은 상당히 컸다.

이외에도 특히 40년대 중후반부터 50년대 카잔이 이뤄낸 또 다른 업적은 실제 거리에서 찍었던 스트리트 필름이 많았다는 거다. <거리의 공황>이나 <와일드 리버>, <에덴의 동쪽> 같은 영화의 장소를 보면 ‘저건 로케이션의 승리다’ 그런 느낌이 들 정도다. 결코 스튜디오에서는 나올 수 없는 장면이란 걸 체감하게 한다. 또 카잔은 몹씬도 굉장히 실감나게 찍는다. <워터프론트>의 마지막 부두 노동자들을 찍은 것만 봐도 그런데, 그건 아마도 현장에서 실제 단역배우들을 살게 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밀고자라는 뇌상이 커서 카잔은 60년대 <초원의 빛>이란 영화 이후 지속적으로 하강하는 경력을 갖게 된다. 전성기는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까지였고, 정치적 맥락에서 창작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는 불행한 사례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9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 받았던 사건은 그에게 있어 너무 잔인한 퇴장을 하게 만든 것으로 기억된다. 할리우드가 자신의 면죄부를 얻기 위해서 엘리아 카잔에게 뒤 집어 씌웠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었지만, 엘리아 카잔은 ‘나는 조용히 사라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멘트를 남기고 떠나 복합적인 생각을 들게 한다. <워터프론트>는 엘리아 카잔과 버드 슐버그에게 자기변명 같은 영화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어떤 보편적인 감동, 추상화 시켜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감동 상당히 오래 갈 것 같은 영화이고, 그 무엇보다 배우들의 감독이라는 명성을 가졌던 엘리아 카잔의 연출자적 개성을 가장 잘 증명하는 영화다. (정리: 신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