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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상영작 소개

물질성과 정신성의 조화, 그리고 사랑과 믿음의 회복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

<오데트>(1955)는 카이 뭉크의 희극을 칼 드레이어가 각색하고 연출한 영화다. 드레이어의 세계와 뭉크의 세계는 분명 닮은 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뭉크와 드레이어는 항상 사랑을 찬미한다. 그들에게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육체적) 사랑은 다르지 않다. 드레이어는 “카이 뭉크에게 있어 훌륭한 것은 신이 이 두 가지 형태의 사랑을 분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가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을 드러내듯 <오데트>에서 아버지가 미켈에게 “잉거는 이제 천국에 있으니 놓아주라”라고 말하자, 미켈은 “자신은 잉거의 육체도 사랑했다”고 대답한다.

 

이와 같은 사랑에의 인식을 억압하는 것은 결국 종교이다. 영화의 배경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덴마크의 기독교는 두 종파로 분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우선 영화에서 재단사 피터가 신봉하는 음울하고 광적인 기독교가 있다. 그들은 실제로 잔인한 폭력과 가혹함을 시험했다. 거기에 반기를 든 것이 영화에서 보겐 가족이 믿는 보다 밝고 즐거운 형태의 기독교이다. “당신들은 죽음에 매료된 신앙이지만, 나의 신앙은 삶의 행복함으로 충만하다”라고 말하는 보겐의 말은 이를 잘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주된 것은 두 종교 간의 편협함, 억압받는 사랑,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의 문제, 그리고 기적에 대한 믿음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또한 영화를 보는 관객은 광인인지 성인인지 알 수 없는 아주 미묘한 정체성을 가진, 요하네스라는 인물이 하는 말들을 믿어야 할 지를 시험 당하게 된다. 이 믿음의 여부는 영화를 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다.

 

드레이어는 물질적인 삶과 그것을 감싸고 있다고 생각되는 영적인 것들의 조화에 관심을 갖는다. 영화가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려할 때에는,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큰 숙제를 안게 된다. 드레이어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의 표현주의적 방법을 사용했다. 가령 제목부터 그러하다. ‘오데트’는 ‘말’이라는 뜻이다. 영화에서 말들은 다양한 형태로 물질화된다. 사망신고서, 신문의 부고기사, 편지 등의 물질화된 말은 객관성을 보증한다. 공간도 그렇다. 덴마크의 화가 빌헬름 하머쉐이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내부공간의 미장센은 삶과 죽음의 추상적 성격을 물리적 현존으로 구축해낸 느낌을 준다. 또 내부공간의 무거움은 패닝과 트래킹으로 구축되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 드레이어는 카메라 움직임이 수반되는 롱테이크의 빼어난 활용으로 영화의 공간성과 시간성을 구축하면서 영혼과 물질 사이의 틈을 탐색했다.

 

영화의 시공간감각은 미묘하게 구성되어 있다. 자연과 실내공간은 절연되어 있는 듯, 어떠한 연결성을 찾아내기 힘들다. 집의 내부와 외부를 인물이 직접적으로 오가는 모습은 볼 수 없으며, 내부와 외부의 시간대 처리도 매우 모호하다. 집안에서 창문을 통해 외부를 바라볼 때의 시점쇼트의 경우, 시선의 매칭이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어서 그들이 정말 그 풍경을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중요한 순간에 요하네스만이 창틀을 넘어 집밖으로 나가면서 그 절연된 경계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영화의 매우 결정적인 마지막 시퀀스에서 창틀을 통해 들어오는 백색 빛의 찬란함은 그 경계를 무(無)로 만든다. 앙드레 바쟁은 드레이어의 영화를 ‘백색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바 있다. 이러한 경계의 무화는 물질적인 세계 내에 침투한 영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믿음과 사랑에 대한 영화의 주제의식과 밀접히 관련된다.
 

 

카렌 카스톤은 “<오데트>에서의 기적은 어떤 면에서 물질과 정신이 하나이며, 그런 확신으로 살아가는 삶은 다를 것이라는 것, 그리고 사랑이야말로 그런 삶을 가능케 하는 인간적 경험이라는 신념에 대한 은유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영화 속의 모든 중요한 일들이 인간의 믿음과 사랑의 영역 안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드레이어가 진정 중요시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는 보는 자의 내면의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 낼지도 모른다. 즉 세상에 대한 믿음을 다시 회복하는 것. 이것이 이 영화의 기적이다. (박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