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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자신의 상처를 헤집는 대담한 손길 - <베아트리스의 전쟁>

[리뷰] 자신의 상처를 헤집는 대담한 손길

- 베티 레이스, 루이지 아퀴스토의 <베아트리스의 전쟁>




<베아트리스의 전쟁>은 동티모르 최초의 장편 극영화로 포르투갈의 식민 통치가 끝난 후 새롭게 시작된 동티모르의 아픔을 대담한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이다. 베아트리스는 어린 나이지만 결혼을 하기로 한다. 전쟁을 겪고 있는 땅에서 어머니와 단둘이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잠시 평화로운 일상이 찾아오는 것 같았지만 결혼 첫날부터 사건이 벌어진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한 것이다. 결국 베아트리스는 포로로 잡혀가고 이때부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먼저 가족들이 죽더니 나중에는 마을 주민 전체를 향한 대규모 학살이 벌어지고, 살아남은 여자들은 갖은 수모를 감당해야 한다. 그렇게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 동티모르는 겨우 독립을 성취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영화는 아직 50분이 남았으며 어떤 면에서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한다. 어느 날, 죽은 줄 알았던 베아트리스의 남편이 건강하게 살아 돌아오고, 사람들은 기뻐하지만 베아트리스는 이 사람이 자신의 진짜 남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처음 몇 장면만을 본다면 <베아트리스의 전쟁>은 전쟁의 아픔을 꿋꿋하게 견디는 여주인공을 내세워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연대기순으로 극화해 보여주는 익숙한 형식과 내용의 영화라고 오해하기 쉽다. 물론 이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영화는 이 속에서 어떤 전형을 깨부수는 대담한 손길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영화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압제자의 자리에 놓고 동티모르인들을 피압제자의 자리에 놓은 뒤, 이 둘을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과 신음을 삼키며 살아가는 선한 사람들로 단순히 나눠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대신 이 영화는 동티모르인들이 거의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겪은 그 많은 사건들이 그렇게 칼로 자르듯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일본, 호주 등 강대국의 복잡한 이해 관계를 암시하고, ‘배신’이란 이름으로 살아남았던 사람들의 슬픈 눈을 보여주며, 동티모르인들과 인도네시아인들의 이상한 동거와 미래를 위해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결단을 내린 사람들을 정면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베아트리스의 전쟁>은 ‘인도네시아인들이 동티모르인들을 죽였다’라는 간단한 문장 속에 생략된 구체적인 사건들과 그 속에 녹아 있는 복잡한 맥락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베아트리스를 비롯한 포로들이 자신의 적인 인도네시아 군인들과 평범한 하루를 보내며 웃음을 보이는 장면이다(밝은 음악까지 함께 흘러나온다). 이 영화를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베아트리스의 평화로운 웃음은 동티모르인들이 자신의 슬픈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재현하고 있는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물론 이 영화가 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는 건 아니지만(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월드뉴스’를 통해 갖게 된 단순한 생각들을 한없이 복잡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타인의 잘못뿐 아니라 자신의 상처까지 대담하게 헤집는 손길로 말이다.


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